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68)
고구마 심을 밭을 고르려 삽질하다 힘들어 잠시 쉴 겸 마을길 산책하는데 젊은 반장이 저만치서 관리기를 돌리고 있다. 관리기 돌릴 때는 하도 시끄러워 누가 지나쳐도 모른다. 자칫 소리 내 불렀다간 사고 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지나치려는데 흥얼대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중씰한 나이에 든 이라면, 아니 젊어도 ‘복면가왕’ 같은 음악프로를 열심히 본 이라면 이 노래를 다 아실 터. 대중가요 가운데 가장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노래가 지금은 무엇인지 모르나 한때 바로 이 노래 「봄날은 간다」였다.
1954년 백설희(가수 겸 배우인 전영록의 어머니) 님이 처음 부른 뒤 동시대 가수인 황금심, 은방울자매, 금사향은 물론, 현대(?)로 와서 한영애, 나훈아, 조용필, 최백호, 장사익, 주현미, 심수봉, 임지훈, 린 등 기라성 같은 가수가 리메이크해 음반을 냈다.
이 노래는 십여 년 전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다. 2009년 문학잡지 [시인세계]가 우리나라 현역시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노래가 바로 손로원 님이 작사한 ‘봄날은 간다’였다.
나는 양인자 씨가 작사하고 가성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1위라 여겼건만 불행히도(?) 2위였다. 3위는 정태춘이 쓴 '북한강에서', 4위는 양희은이 쓴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5위는 하덕규가 쓴 '한계령'
2위에서 5위까지 네 편은 정말로 쟁쟁하다. 2016년 뛰어난 노랫말로 노벨문학상 받은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작품 못지않게. 거기에 끼일 뿐만 아니라 1위를 차지한 작품이 '봄날은 간다'라니. 솔직히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뒤의 작품들을 누르고 1위를 한 게.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이건 노래잖아' 가장 우수한 노랫말을 묻는 게 아니라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을 묻는 질문이었으니까. 시인의 감성은 개화(開花)보다는 낙화(落花)에 더 끌린다. 화려함보다 사라져 감에. 그러니 그런 감성에 딱 들어맞았으리라.
이 노래가 얼마나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는지 같은 제목의 영화와 연극도 상영, 상연되어 세월의 벽을 뛰어넘는 대중적 인기를 보여준다. 아마 앞으로도 더 많이 활용되리라. 왜냐면 나이 들어 가장 큰 아쉬움이 가는 봄날을 붙잡고 싶은데 붙잡지 못하니까. 곁에 오래도록 두고 싶은데 금방 떠나니까.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다시 이어 부를수록 노래 맛이 들어 참 좋다. 마치 예전 [TV문학관]의 한 장면처럼.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펴보았다.
때는 바야흐로 전쟁의 포화가 걷히고 상처 입은 대지 위로 이름 모를 풀꽃들이 고개를 내밀던 1954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충청도 어느 깊은 산골, 연분홍 치마폭을 살랑이며 걷는 열아홉 처녀 순녀(順女)의 가슴팍에는 아무도 모르는 새빨간 꽃물 하나가 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장날의 소음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 동!" 소박한 작은북 소리가 정막한 장터를 깨우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그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
"동동 구리무! 동동 구리무!"
등에 방물 짐을 지고 북을 치며 나타난 장돌뱅이 사내. 도회지 바람이 묻어나는 그의 말끔한 생김새에 순녀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장바구니를 든 손끝이 떨려왔습니다.
그러다 길모퉁이에서 운명처럼 마주친 그 사내가, 말 한마디 없이 순녀의 손바닥에 슬쩍 밀어 넣은 것은 동그랗고 하얀 '구리무' 단지 하나였습니다. 거부할 틈도 없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던 그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그것이 순녀의 첫사랑,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순녀의 하루는 온통 '닷새'라는 야속한 시간의 마디에 묶여버렸습니다. 나물을 캐다가도 냇가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사내의 웃음을 떠올렸고, 쌀을 안치다가도 하얀 김 속에 서린 그 사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내가 마을 앞 느티나무 길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날, 순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길목에 숨었습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산새 소리보다 크게 들려 들킬까 겁나던 찰나, 갑자기 눈앞을 막아서는 듬직한 그림자! 깜짝 놀라 주저앉는데,
“아니, 이 처녀가!”
놀라 쓰러지는 순녀를 사내가 덥석 안아 일으켰습니다. 순녀의 앙가슴이 사내의 가슴팍에 맞닿은 그 짧은 순간, 온 세상은 멈추고 오직 진한 분홍빛 꽃향기만 진동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돌아와 옷매무새를 추스르니, 저고리 고름 사이에서 또 하나의 구리무 단지가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방 안 가득 퍼지는 그 달콤하고도 아릿한 향기... 그것은 사내가 남기고 간 치명적인 낙인이었습니다.
"난 진달래꽃이 참 좋아. 네 바알간 얼굴빛 같아 참 예뻐."
사내의 달콤한 속삭임에 순녀는 연분홍 치마와 옥빛 저고리를 꺼내 입었습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면 함께 웃었고, 꽃잎이 지면 함께 울었습니다. 별이 뜨면 영원을 맹세했고 별이 지면 다시 만날 날을 손가락 걸어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아, 야속한 봄날은 왜 이리도 짧은 것입니까.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이 채 식기도 전에, 운명은 가혹한 장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장날, 설레는 마음으로 사내를 찾아간 순녀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동동 구리무!"
외치는 소리는 같았으나, 사내의 곁에는 아이를 업은 낯선 여인이 다정하게 서 있었습니다. 순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사랑의 탑은 모래성이었으며, 사내의 품속에서 느꼈던 온기는 모두 시린 거짓이었습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우는 순녀의 귓가에는 여전히 사내의 웃음소리가 맴돌았습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사내와 여인, 그리고 아이가 그려진 단란한 그림 한 장이 순녀의 가슴을 난도질했습니다.
"다 헛것이었구나... 사랑탑이 아니라 거짓탑이었어!"
사내가 사는 저 먼 마을로 흐르는 냇물에 '그리워요'라고 적은 꽃편지를 수천 번 띄워 보냈건만, 물결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길목에 청노새가 끄는 역마차 방울 소리만 들려도 혹시나 하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린 바람뿐이었습니다.
이제 열아홉 꽃다운 시절은 황혼빛에 물들어갑니다. 순녀는 오늘도 앙가슴을 쥐어뜯으며 동구 밖 신작로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저 멀리 보이는 구름 그림자 속에 사내의 뒷모습을 투영해보지만,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그 얄궂은 노래만 가슴을 후벼팔 뿐입니다.
아아, 꽃은 피어 발갛게 타오르건만, 순녀의 서러운 봄날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만 갑니다.
노래의 주인공은 순녀라는 처녀를 내세우는 스토리가 되었으나 보부상 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새색시의 마음을 담았다는 식으로 꾸며도 상관없다. 붓 가는 대로 휘두르면 되니까.
이렇게 영상으로 꾸며가다 보니 시인들이 왜 이 노랫말을 좋아하는지 분명히 알겠다. 상상력을 가미할 수 있다는 점. 내가 그 스토리 속의 남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렇게 봄날은 또 오고 또 간다.
*. 커버 사진과 앞 사진 넷은 pixabay에서, 뒤 네 사진은 AI를 활용해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