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편 : 김행숙 시인의 '문지기'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김행숙 시인 편 ♡
- 문지기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 다음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 [에코의 초상](2014년)
<함께 나누기>
오늘 시는 누군가를 밀어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숙명적인 슬픔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면서도 거절해야 하고, 거절하기 위해 또 기다려야 하는 그 끝없는 자기모순을 '문지기'라는 상징을 통해 아름답고도 슬프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냥 그 마음을 주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끝까지 그 사람과의 거리를 지켜야만 하는 관계의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거기에 문지기가 등장합니다. 원래 문지기는 집을 지키는 게 직업이지만 여기선 사랑에 빠지려는 마음과 경계하려는 마음의 중간에 섰습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문지기의 첫마디는 당신을 밀어내는 거절입니다. 문지기는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오려는 의도를 눈치채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빠질까 봐) 즉 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와 거리감은 상당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선 안 될 사이라고 스스로 울타리 치며 빗장까지 걸면서.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 다음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한다는 표현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한 부정은 긍정의 다른 표현이다' 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글자 그대로는 당신의 접근을 막지만 날마다 마주하며 부정하던 대상이 어느덧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확장되니까요.
그래서 이런 표현을 했겠지요.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하고. 여기에 이르면 미워하거나 거부하던 감정이 당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변화합니다.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대신 보고픈 마음이 충만해지는.
"그 다음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원래 문지기 역할은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기도 하지만 들어와도 괜찮은지 따져보아 들어오게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는 막는 역할만 했고 그게 내 문지기의 임무였습니다. 헌데 문제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게 직업이라고 했다가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게 직업이라고도 했으니까요. 당신을 내 마음 안으로 들여보내는 순간 문지기로서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기에 어찌할까 갈피를 못 잡는 듯.
참 힘든 사랑이요 너무 이것저것 따지는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한다고 하면 그만이건만 주변 시선을 생각해 울타리를 치는 건지... 이왕 빗장을 걸어둘 생각이라면 그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데... 그러니 '이래선 안 돼!' 하는 식의 내적갈등만 증폭되고.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또 자기모순의 표현이 나옵니다. '울지 않겠다' 하고선 '울었다' 했으니.. 문지기는 당신의 접근을 차단했으니 제 역할을 다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쓰라릴 수밖에요. 내가 선택한 일이니 그것 때문에 약해지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울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하지만 '일기'라는 가장 개인적이고 진실한 공간에서는 그 내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울음이 터뜨립니다. 당신과 헤어져도 '울지 않겠다'는 단단한 각오와 달리, 실제로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오늘 시가 [갯마을 차차차]라는 드라마에서 남주 홍반장이 여주를 위해 읊어 주던 시였다는데 그 드라마 보신 분들은 이 시를 이해했을까요.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죠, '시는 그냥 의미를 아는 것보다 느낌을 얻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말.
#. 김행숙 시인(1970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2000년대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온 미래파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현재 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
*. 두 번째 사진은 '갯마을 차차차'에서 오늘의 시 "문지기"를 읽어주는 장면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