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5편 : 문정영 시인의 '누'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문정영 시인 편 ♡
- 누 -
내 안에는 반골의 기질이 없어 어느 반골 시인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하는데, 그것이 풀의 테두리에 갇혀 살아온 결과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나를 뒤져보는데, 나 살면서 누구에게도 반항의 누 끼치지 못해, 온순한 누가 되어 마라강에서 쉽게 악어 떼의 밥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내가 만약 반골이라면 내 주위에 반골만 모이겠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술이나 마시겠지 그리고 뒤돌아서 흉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인데, 나보다 센 뿔 가진 놈에게 한방 먹일 준비는 아예 말아야 하는데, 누에게도 뿔은 있으나 누는 누끼리 누를 끼치지 않는다 달빛은 그 따듯한 광경 비추어줄 뿐이다
누가 죽어 수천의 누 떼가 강을 건넌다는데,
- [잉크](2010년)
<함께 나누기>
아프리카 누(Gnu) 떼가 마라강 건너는 광경을 영상으로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문인이라면 이를 글감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을 겁니다. 건기에 이르면 풀이 없어 초원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반드시 마라강을 건너야 합니다. 문제는 악어 떼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처음 한동안 수만 마리의 누 떼가 강둑에 모여 눈치 보다가 선발대 몇이 뛰어들면 나머지 무리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선발대는 악어 떼와 빠른 물살에 희생됩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몇몇 누는 자신을 희생하여 동료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이러니 글쟁이들이 놓칠 리 없겠지요.
화자는 천성적으로 반골 기질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반골 시인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언뜻 부러움을 보입니다. 왜 그에겐 반골 기질이 없을까요? 그 까닭을 풀의 테두리에 갇혀 살아온, 온순한 누 같은 초식동물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나 살면서 누구에게도 반항의 누 끼치지 못해, 온순한 누가 되어 마라강에서 쉽게 악어 떼의 밥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단 한 번 반항한 적 없이 온순한 누가 되어 마라강에서 쉽게 악어 떼의 밥이 되어 버렸다고. 여기에 함정이 놓였습니다. 실제 악어 떼의 밥이 된 누는 다른 누보다 훨씬 희생정신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뒷 얘기가 이어져야 함은 당연한 일.
"내가 만약 반골이라면 내 주위에 반골만 모이겠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술이나 마시겠지 그리고 뒤돌아서 흉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인데, 나보다 센 뿔 가진 놈에게 한방 먹일 준비는 아예 말아야 하는데,"
반골 주변에는 반골들만 모인다? 문득 유유상종이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납니다. 허나 화자는 반골이 아닙니다. 그러니 술 마시며 객기 부리지도 못하고, 남을 헐뜯는 험담도 하지 않고, 강한 자에게 맞서 싸울 생각은 애시당초 없습니다. 그런데...
"누에게도 뿔은 있으나 누는 누끼리 누를 끼치지 않는다 달빛은 그 따듯한 광경 비추어줄 뿐이다"
반골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 끼치지 않고 살았다는 떳떳한 고백입니다. 보통 동물의 뿔은 공격용입니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할 때 방어보단 상대를 공격해 무력화시키는. 허나 화자가 누의 뿔을 보았을 때 이는 누란 존재의 형상을 알리는 치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주먹은 있지만 단지 신체의 일부이듯.
여기서 동음이의어의 활용이 아주 멋집니다. '누는 누끼리 누를 끼치지 않는다'에서 첫째와 둘째는 동물을 가리키나 셋째는 '누(累)'입니다. 또한 우리가 '뿔났다(화났다)' 할 때 뿔의 어원 역시 동물의 뿔에서 왔다고 합니다. 허니까 뿔은 들이받는 역할이 분명하지만 누의 뿔은 온순합니다.
"누가 죽어 수천의 누 떼가 강을 건넌다는데"
선발대로 나선 누가 죽어야 누 떼가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그 온순한 누가 동료를 위해 희생할 땐 누구보다 용감합니다. 자 이제 잠시 앞으로 돌아가봅시다. 화자가 앞서 거론한 반골 시인들, 자기들끼리 모여 티격태격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술 마시고, 뒤돌아서 남의 흉을 보는 사람들.
화자의 눈에 비친 이들은 분노할 때 분노하지 않고, 힘 모아야 할 때 빠지고, 앞서야 할 때 슬그머니 뒤로 처지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말없이 있다가 자신이 필요할 때 앞장서는 것처럼 시인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시라 여겨 올립니다.
'누가 마라강을 건너는 광경'을 치면 수많은 영상이 뜨는데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https://youtu.be/wemBmxoLo00?si=Z86XSjVDuF6UmjCT
Nature Mam
68 likes, 6 comments. "강을 건너야 살아 남는다 "누우떼 " / wildbeests crossing the river with its life on the line"
www.youtube.com
#. 문정영 시인(1959년생) : 전남 장흥 출신으로 1997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광주일보]와 함께 운영하는 ‘동주문학상’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 [시산맥]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