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74)
“저노무 자슥, 아아가 와 저리 빼릿빼릿하지 못하고 굼비(굼벵이)가 됐노!”
그땐 굼비(굼벵이)가 느림보 벌레인 줄 모르고 ‘바보’ ‘온달’ ‘쪼다’처럼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붙이는 별칭인 줄 알았다.
그렇게 잊고 지나다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티브이에서 굼벵이가 남자들 정력에 좋아 인기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기자가 초가를 허물고 새로 집 짓는 곳에 나가 취재를 하던 모양인지 말라붙은 짚 속에 허연 벌레들이 득실득실하였다.
솔직히 처음엔 징그러웠다. 그렇지 않은가, 꼬물꼬물 기어가는 모습이. 그때 심정으론 아무리 정력에 좋다고 해도 막상 주었다면 거부했으리라. 나중에 번데기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당시엔 영양보다는 혐오감이 더 짙었으니까.
그 뒤 굼벵이를 다시 본 건, 아니 먹은 건 달내마을로 옮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나보다 몇 년 더 일찍 외지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데 시도 쓰고 찻집도 운영하며 그야말로 신선놀음 즐기던 중이었다.
내가 국어교사란 걸 알고 자기랑 통한다고 여겼는지 하루는 불러서 집에 갔더니, 소주병 옆에 기이하게 생긴 희끄무레한 뭔가가 담긴 접시에 눈이 갔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정 선생님, 여기가 뽕나무가 많고 오디가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번데기입니다.”
그때사 반문했다.
“번데기 빛깔이 아닌데요.”
“아 토종 번데기는 원래 빛깔도 이렇고 덩치도 큽니다.”
미심쩍었지만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설마 거짓말하랴 싶어 먹었는데 제법 구수하고 맛있었다. 어떻게 보면 번데기 맛과 비슷하기도 했고.
그 뒤 두어 달 지난 산책길에서 만나자 그가 웃으며 대뜸,
“혹 사모님에게 무슨 좋은 소식 없던가요?”
“예?”
“아, 나는 직빵이던데…”
“무엇이 말입니까?”
“내 나이가 올해 쉰둘인데 재작년에 저번 그 벌레 먹고 아들 만들었지 뭡니까.”
짐작하겠지만 그 벌레는 번데기가 아닌 굼벵이였고, 그 뒤 이어진 얘기는 자기가 굼벵이를 먹고 늦둥이 얻었으니 나도 그걸 먹었으니 늦둥이 생기지 않았느냐는 농담이었다.
다시 또 굼벵이를 본 건 십여 년 전 캄보디아 여행 갔을 때였다. 야간시장 투어를 하는데 가이드가 우리를 한 노점상 앞에 끌고 갔다. 그곳은 수많은 벌레가 튀겨지는 곳! 메뚜기나 개구리야 예전에 먹었으나 거미, 박쥐, 전갈, 물방개로 이어지는 벌레들의 군상에 질릴 지경...
거기 한쪽에 굼벵이도 자리했다. 사실 굼벵이는 특정한 곤충 애벌레가 아니라 풍뎅이, 사슴벌레, 하늘소, 매미의 애벌레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날 먹으려 나서는 사람이 없어 괜히 남자다움을 보여주려 이것저것 먹었는데 솔직히 별맛이 없었다. 아무리 고단백이라 해도 ‘벌레’라는 기분 탓이었으리라.
이렇게 굼벵이와의 인연은 끝난 줄 알았는데 산골로 와 살며 텃밭 갈 때나 고구마ㆍ 감자ㆍ 땅콩 캘 때 숱하게 마주쳤다. 녀석들은 삽으로 땅을 파 뒤집다 보면 꼭 얼굴을 내민다. 사진에서와 똑같은 모양새다. 처음 보는 이들이 징그럽게 여기기 딱 좋게.
낚시를 가끔 다니기에 지렁이를 만지고 해도 그리 징그럽지 않은데 굼벵이는 만지기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지렁이와 굼벵이는 둘 다 땅속에 살다 보니 두더지의 먹잇감이란 공통점은 있으나 모양도 다르고 또 다른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밭작물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아 ‘땅속의 보물’이라 부른다. 굼벵이도 썩은 나무, 낙엽, 퇴비 등 유기물을 먹고 분해하여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분해자 역할을 해 땅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선 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은 굼벵이는 고구마, 감자, 땅콩 같은 뿌리작물을 야금야금 작살낸다. 두더지 갉아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두더지는 먹은 표티가 확실히 난다. 사과 한쪽 베어 먹은 양 그 흔적이 아주 뚜렷이 남으니까. 허나 굼벵이는 살짝살짝 얄밉게 파먹어 처음 보면 마치 무슨 병이 걸린 듯이 보인다. 결론은 두더지든 굼벵이든 입을 댄 건 버려야 한다는 점.
앞에서 굼벵이가 풍뎅이, 사슴벌레, 하늘소, 매미의 애벌레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나라 밭에 보이는 건 매미 애벌레가 대부분이다. 암컷 매미가 나무줄기 같은 곳에 알 낳으면 무려 일 년이 지나 이듬해 여름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된다. 이게 바로 굼벵이다.
그런데 알에서 깨어난 굼벵이는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7년 동안 땅속으로 들어가 서너 번 정도 허물 벗으며 오랫동안 성장한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굼벵이로 살다 여름밤 땅 밖으로 나오면 나무 위로 올라가 마지막 허물을 벗고 날개가 달린 성충이 된다. (이를 ‘우화’라 함)
여기까지 보면 성충이 된 매미는 오랫동안 살겠거니 생각하기 쉬운데 고작 2~3주 동안만 낮에는 크게 울어 짝짓기 하고, 알을 낳은 뒤 죽는다. 성충으로서의 그 짧은 시간에 비하면 굼벵이로서의 시간은 얼마나 긴가. 그 안타까움을 아는 문인들이 당연히 글로 옮길 수밖에.
한때 굼벵이 때문에 뿌리작물이 피해 입어 볼 때마다 하도 열받아 보는 족족 밟아 죽이려 했는데 그런 점을 알고 나니 삽질과 호미질할 때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예전 마을 선배처럼 잡아 구워 먹을 수도 없고. 모를 때는 먹었지만 알고 나면 못 먹는다. 혹 입맛 다시는 분은 찾아오시길.
정태중이란 시인이 쓴 「굼벵이 놓아주기」란 시를 보자.
“그라지 마소 / 고실고실한 고구마 두렁에서 / 굼벵이 한 마리 꿈틀대는 것을 / 호미로 찍어블믄 어쩐당가
지놈도 살것다고 온몸 굴려 발버둥 치는디 / 어쩌다가 사람 눈에 뜨여서 / 호미 끝에 걸린 신세인디 / 자우 당간 불쌍 안 헌가
고구마 영근 것 좀 보소 / 볼그스롬 밑도 참 야물게 들었슨께 / 물컹한 저 굼벵이는 지 살길 가라고 냅둬 불세
(이하 생략)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하늘에서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아이구 저노므 자슥 저거, 빠릿빠릿 못하고 굼비처럼 느려터져 큰일 하기는 다 틀렸네. 저걸 우찌 할꼬.”
아버지 말씀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느린 성격이 급한 성격으로 변해 실수가 잦아졌으니 그 점은 틀리는데, 큰일 못한다는 점은 또 맞는 것 같으니.
끝으로 굼벵이 관련 속담 몇을 곁들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
“굼벵이도 제 일을 하려면 한 길을 판다.”
“굼벵이가 담벼락을 뚫는다.”
“굼벵이가 지붕에서 떨어질 때는 생각이 있어 떨어진다.”
*. 굼벵이 볶음과 튀김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