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문 일지 1

by 한지원

위대한 명작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나오지 않는다.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는 항상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백일장"

'도대체 이런 건 왜 하는 것일까? '

향기로운 초록바람이 살랑거리는 따뜻한 봄날.

모처럼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습자지처럼 얇디얇은 원고지 위에 구멍이 뚫리도록 눌러쓰는 글에서 나는 비애(悲愛)를 느꼈다.

한정(限定)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시어(詩語)로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감각과 화려한 문체로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詩와 수필(隨筆)을 써서 제출하는 학우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런 학우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학우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상상 속에 꿈꿔왔던 유토피아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차려준 무대에서는 춤사위가 생각나지 않아 도무지 춤을 출 수 없었다.


"다음 시간 글제는 '문화재'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 노트 두 페이지 분량으로 써 가지고 온다. 알았지?"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수업시간이 10분 후로 도래할 때까지도 숙제를 안 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쉬는 시간에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뻑뻑한 방광(膀胱)의 시그널도 무시하고 전국의 문화재를 훑느라 정신이 없다.

"154번 버스가 동대문으로 가냐?"

앞에 앉은 놈에게 급히 물어 펙트 검증도 했다.

예전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에서 정차하는 154번 버스는 동대문을 돌아 을지로를 거쳐, 서대문을 지나쳐 불광동까지 가는 노선이다.


이하는 내가 중2 때 급조한 작문 일부다.

' 학교 앞 정문에서 154번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산동네(학교가 산 꼭대기에 있었음)를 내려간다.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며 뭐가 보이고, 뭐가 보이고... 중략... 오래된 문이 보인다.

간판에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쓰여있다.

중략...

그 문은 우리의 역사적 증인이다. 그 문은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의 역사를 마시며 꿋꿋이 서있었다. '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열심히 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옆의 짝꿍 녀석은 도무지 숙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너는 숙제 안 하냐?"

"오늘 난 안 걸릴 거야!"

숙제는 전수검사가 아니고, 선생님에게 선택당한 놈이 교탁 앞에서 작문 노트를 들고 낭독하는 형식이었다. 녀석은 본인이 선택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야! 너! 그래 너! 앞으로 나와서 읽어봐!"

바로 탱자탱자 놀던...

짝이었던 그 녀석이 지목당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교실 앞으로 끌려 나갔다.

내 작문 노트를 제 것처럼 옆구리에 끼고서...

'이런 죽일 놈이 있나...'


낭독이 끝나고 선생님의 강평(講評)...

"글을 이끌어 가는 도입부에서부터 전개과정, 그리고 마지막 하고자 하는 말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완벽했다. 정말 잘 썼다. 자! 모두 박수! "

내 나이 열다섯 살 평생에, 저런 극찬을 선생님에게 받다니 꿈만 같았다. 나는 그 칭찬이 선생님이 나에게 하는 것 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내 친구가 숙제 안 해온 사실이 발각될까 봐...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교지(校誌)에 그 선생님의 에세이가 실렸는데, "역사를 마신다"는 표현이 그 선생님의 글에 들어가 있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