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임계] 안개 속 IPO, 3.5층의 멈춤

소리 낼 수 없는 CFO의 고독

by 안민낙도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때론 사람을 질식시킨다.


15년 차 재무 전문가이자 CFO로서 나의 일상은 늘 숫자의 최전선에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해 보이는 수식어보다, 가야 할 길이 아득히 많이 남은 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의 난간’ 뒤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다.


사람들은 IPO에 성공한 CFO의 과거 책상을 그저 화려한 성공 지표와 승전보로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그날 내 책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은 차가운 '손실 지속'의 경고음과, 멀어진 것 같은 IPO의 가능성 속에서 지분 매각 주선하라는 자본 시장의 서슬 퍼런 독촉장이었다.

자본의 냉엄함은 결코 나와 회사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숫자는 실시간으로 내 호흡을 갉아먹고 있었다.


상장의 가능성은 불확실성이라는 안갯속에 가로막혔고, 애초 계획했던 방향과 틀어진 숫자의 향방에 나도 갈 길을 잃었다.

자본의 논리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요구와 자본조달의 불투명성은 숫자로 무장해야 하는 나의 이성조차 마비시켰다.


"이 숫자들이 무너지면, 인간인 나의 가치도 함께 소멸하는가?"라는 실존적 불안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 질식의 감각은 나의 사무실이 있던 4층을 향하던 3.5층의 계단 위에서 마침내 이유 모를 물리적인 엔진고장으로 터져 나왔다.


발이 멈췄다.


단 다섯 개의 계단. 평소라면 3초도 걸리지 않았을 그 짧은 수직의 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채(Liability)처럼 나를 짓눌렀다.

엔진은 굉음을 내며 멈춰 섰고, 연료가 바닥난 기계처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섯 칸만 더 오르면 마주해야 할 가혹한 일상, 부정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들. 그 짧은 계단참에서 나는 거대한 벽을 만난 듯 얼어붙었다.


그것은 체력의 한계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현실 회피 기제'가 온몸의 근육을 붙잡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멈춰라, 저 문을 열지 마라."


그 멈춤은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음악 전공 선택의 기로에서 아버지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던 소년.

결국 현실의 벽 앞에 스스로 꺾이기를 선택하며 생장점을 잘라냈던 그날의 무력감이 3.5층의 계단참에서 소름 돋는 데자뷔로 재현되고 있었다.


앞은 안개였고 뒤는 낭떠러지였다.

15년을 쌓아 올린 숫자의 성벽은 나를 보호하기는커녕 나를 가둔 감옥이었던 것인가.

그곳엔 빛도, 소리도, 나중을 기약할 바흐조차 없었다.

그저 막다른 골목에 버려진 한 40대 중반 남자의 고통스러운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나의 임계점은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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