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날의 데이트

by 바를 정


#1)



주말 내내 남자친구의 자취방에서 쉬며 휴일을 보냈다. 본가에서 보내는 일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루틴이지만, 그렇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갈 때마다 내가 오기를 기대하고 반겨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닌텐도 스위치를 들고 가기도 했다. 퇴근하면서 선물사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걸까..?ㅎㅎㅎ 달려나와서 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겨주란 말이야~



밖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격식있는 식당에 가서, 라자냐와 파스타를 나눠먹고 즐거운 데이트를 한 후 집에와서 영화도 보고 누워서 뒹굴뒹굴 한껏 게을러진 상태로 쉬다가, 어쩐지 진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영화를 보느라 불을 꺼 놓은 채 둘이 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어떤 섹슈얼한 무드도 풍기지 않는 정말 편안한 분위기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평소에는 말하기 어려웠던 소재들을 하나둘 꺼낼 수가 있었다.



난 그런 게 참 좋았다. 서로 살냄새를 맡고 탐하지 못해 안달이 나야지만 눕게 되는 침대가 아니라, 벌러덩 드러누워서 남의 배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두고도 서로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 나는 화장기도 없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큰 티셔츠와 긴 바지를 입고, 옷을 마구 뺏어입은 티가 그대로 나는 모습으로. 야하지 않아도 되는 침대. 내가 굳이 성적 매력을 어필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주고 있는 사람.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다 보니 왠지 무슨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원래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유난히 말하기가 더 목이 막혔다. 꾹꾹 누르면서 한 마디씩 했더니, 너무 끊어 말해서 뭐라는지 잘 이해가 안되다고 말해서 웃었다.



네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존재가 되었는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사랑할수록 상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커기지 때문에... 벌써 만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이전보다도 네가 더 소중해질 수록 그 마음이 더 직면하기 어려웠다. 잦은 이사 때문에 너무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어오면서, 내가 택한 방법은 그냥 그 누구와도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었는데, 점점 서로의 삶에 침범하는 영역이 커질수록 반대로 밀어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엔 그렇게 커지는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느끼면서도, 이 상태를 이겨내보고자 꾸욱 참고 그대로 말을 끝까지 전했다. 이렇게 구체적이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나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꽤 큰 도약이었다. 그래서 의미가 컸다.



#2 )



내 남자친구는 참 아이같다. 미울 땐 철 없어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상처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순수하기도 하고, 그 순수함을 의심하게 되다가도, 대가없이 주는 마음을 받을 때면 또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즐거워하며 웃을 때도 천진난만 어린아이 같고, 무언가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은 너무 멋있는데, 이 부분에서 되게 특이한 감정을 느꼈다.



내 남자친구는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가 따로 있는데, 나는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적어놓은 블로그라 사실 읽어도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수줍게 블로그를 자랑하며 본인이 직접 정성스럽게 꾸민 썸네일, 열심히 쓰고 정리한 글 등을 보았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보았을 때에 너무 기특해서 감동을 받은 듯한 묘한 감동을 느꼈다.



남자친구를 기특해하는 마음.. 을 느껴도 되는 게 맞나?

실제로 나는 남동생이 있는데, 나이 터울이 많이 나서 마치 내 아들인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실제로 그 동생을 양육하는 과정에 참여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내 모성애가 남들보다 더 많이 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남자친구가 아들처럼 예쁘다. 마치 내 가족과 자식을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바라보는 마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상대방이 뭔가 열심히 일을 할 때, 한 단계씩 성장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내가 그의 인생 자체에 있는 성장의 일부를 지켜보는 사람처럼 응원하게 되고, 그 모습이 마치 시험에서 백점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내 동생처럼 기특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근데 이렇게 느끼는 게 괜찮은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남자가 원하는 건 여자친구지, 엄마같은 여자가 아니라는 말도 있고, 내가 과하게 애착을 느끼는 것일까 봐 유난스러움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 모성애같은 마음에 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