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은 조용히 시작된다
최근 나는 꽤 불편한 경험을 했다. 지인의 소개로 한 조직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강연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력을 보다가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박사라고 소개했고
누군가는 대학교 교수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연구원이나 박사라고 했다.
나는 10년도 더 전에 박사 과정에 진학을 했다가 학위를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박사인 사람들이 그저 부러웠다. 그래서 그 미련을 못 버리고 지금도 박사를 다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박사'라는 건, '교수'라는 건 나도 해 봤기에 그 자리가 그리 쉬운 자리는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다. 적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다.
권위 있는 사람들의 노력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감히 따라 하거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그 권위를 거짓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기만한다면 그것 또한 큰 사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싫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노력하지 않고 돈과 몸으로 쉽게 박사 학위를 땄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나는 그가 너무 싫었다.
내 지인이 믿는 사람들이었기에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세상에는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생각했고 그들에게 나도 배울 게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믿는 사람과 같이 하려 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어떤 누군가가 강연했다던 PPT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적힌 그의 이력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유명 A 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유명 B 대학교 어떤 "연구소 석사"
어느 지방 대학교 건강기능학 교수
여기에서 이상한 점. 바로 "연구소 석사"였다. 보통 석사를 말할 때 어떤 대학 이름을 말하고 전공명과 함께 석사를 쓰지 않나? "연구소 석사"라는 게 있을 수 있나? 거기에서 나의 의문이 시작됐다.
다른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과명이나 표기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적어도 교수라면, 박사라면,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라면 이런 표기는 쓰지 않을 텐데 생각했다. 그래서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학과 이름이 실제 대학 체계와 맞지 않았고, 예상처럼 학위 표기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과 달랐으며 연구 활동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사람에 관해서도 찾아봤다. 그 사람은 박사라고 했었고, 내게 진로 조언까지 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프로필에 적혀 있던 학교와 학과명이 조금 이상하다 전부터 생각했었기에 이참에 둘 다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사람의 프로필을 보고 나니 어쩌면 이런 거짓 프로필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박사라면, 학위 논문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먼저 연구 실적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었다. 그리고 그 학과 이름으로는 박사 과정이 그 대학에 아예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슷한 거라도 찾아보니 평생교육원 같은 기관에서 받는 수업만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착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이력들이 조직 안에서 권위를 만드는 도구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전문가의 말을 쉽게 믿는다.
“박사입니다.”
“대학교 교수입니다.”
“연구소에서 연구했습니다.”
이 세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내용이 무엇이든 그 말 앞에 이런 이력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의심을 멈춘다. 특히 네트워크 기반 조직에서는 이런 권위가 더욱 큰 힘을 가진다. 조직을 확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보다 훨씬 화려해 보이는 이력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조직 안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사실처럼 굳어지기도 한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이력의 문제 자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지인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 같아.”
“그럴 리 없어.”
“그걸 왜 굳이 따져?”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특히 그 믿음이 시간, 돈, 인간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면 더 그렇다. 그래서 때로는 사실보다 믿음이 더 강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른다. 자신이 투자한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그 선택을 정당화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스라이팅은 강압적인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훨씬 조용하게 시작된다.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
반복되는 성공 이야기
조직 내부의 긍정적인 분위기
이런 것들이 모이면 사람들은 점점 의심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심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경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조금 더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 사람이 말하는 이력이 사실인지, 그 권위가 검증된 것인지, 그 성공 이야기가 객관적인 것인지.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럴듯한 이야기”에 설득당한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하는 일을 멈춘다.
의심은 냉소가 아니다. 의심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방어 장치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강연자든, 어떤 리더든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불편해하는 구조가 있다면 그때야말로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세상을 이해할 권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