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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Mer 라메르 Oct 13. 2024

소비되는 소모품, 이대로 괜찮을까?

닳고 단 감정 소모

 그때는 덤덤하게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했을 때 어떤 일은 내게 크나 큰 상처로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가끔 기억 저 편에서 나를 괴롭히곤 한다.  

  '씻은 듯이 잊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가끔은 이상하리만큼 그 기억을 들춰내고 끄집어내어 한 번씩 돌이켜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할지 아니면 평생 묻어두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덩달아하게 된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햇수로 약 17년 동안 나는 많은 일을 겪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좋은 기억도 많지만 내가 언급을 고민하는 이 일은 겪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고 그로 인해 십수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아 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라서 취하게 마셔 본 적도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술이 약한 편이 아니라서 웬만하면 취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술을 도가 지나치게 마신 적도 없었다. 가족들하고는 술을 마셔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가족들은 심지어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기도 하다. 또 대학 때 친구들도 술을 즐기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맥주나 와인 한두 잔씩 마시는 경우만 있었을 뿐 진탕 술에 취하게 마셔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술 없으면 안 될 만큼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작정하고 술 마실 기회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마실 일은 없었다. 혼술은 와인 한 잔, 맥주 한두 캔을 즐기는 편이고 와인 한 병을 마셔도 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일적으로나 분위기를 맞춰야 할 때는 어느 정도 마실 줄 알았고 지금껏 취해서 정신을 못 차려서 흐트러진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풍물패 동아리를 했었는데 대학 때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였던 것 같다. 그때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물 컵에 소주를 슬쩍 옮겨 담았고 물인 것처럼 옆에 놔뒀었다. 근데 그것을 수의학과 남자 선배가 물인 줄 알고 마셨다가 들켰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 선배가 내 비밀(?)을 알면서도 지켜줘서 그 후로 우리는 더 친해졌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잘 마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나는 마시고 싶지 않을 때에는 그런 꼼수를 쓰기도 했었다. 

 대학 때 이 일을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학교 일로 그 선배와 연락이 닿아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면서 평범한 일상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주고받기도 했다.

 

 정말 작정하고 취해야겠다 생각하고 마셨던 적이 살면서 한 번 있었는데 그때는 소주 4병을 마셨던 것 같다. 그랬더니 머리만 아프고 다음날 숙취로 엄청 고생을 해서 역시나 술은 그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와인은 좋아하는 편이어서 동호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4명이서 와인 4병을 마셨으니 와인 한 병은 취하지 않고 마시는 정도인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술은 내가 조절하면서 마시거나 맛없는 술은 즐기지도 않고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사람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밖에서는 불편해서라도 조절을 하게 된다. 




 한 대학교의 과정을 이끌면서 커리어에 정점을 찍고 있을 그때, 일적으로 술자리에 가야 할 일이 종종 생기곤 했었다. 그때 윗분들이나 일적으로 관련된 사람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도 자주 가야 했었는데 그때마다 그것은 술자리로도 이어졌었다. 그래도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다며 원장이 우리 집 근처에서 나를 불렀고 그 자리에 아무런 의심 없이 나가게 되었다. 사실 그전부터 원장이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술 한잔 하자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다. 그때마다 내가 바쁘기도 했고 사실 둘이 만나서 할 말은 학교에서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었다. 그런데 여러 번 이야기하니 거절을 계속할 수는 없었고 그날은 더구나 아예 우리 동네에서 보자고 하니 안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도 술은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라서 그때도 평소처럼 한 잔만 조금씩 마셨다. 그분은 술을 빨리 마시는 편이었는데 나는 끊어마시면서 권할 때에도 살짝 축이기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했던 얘기들은 학생 수를 한 반에 더 많이 넣고 반을 하나를 줄이자는 거였다. 그러니 강사 수를 줄여서 내가 더 일을 하라는 거였다. 그때 강사가 나를 제외하고 3명이었는데 반 하나를 줄이면 강사 수도 줄여야 했다. 그리고 한 반에 있는 학생들 수는 더 많아지니 강의식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거였다. 


 어학 수업은 15명 이하로 운영이 되어야 제대로 된 수업이 진행된다. 하지만 그는 한 반에 25명은 넣으라는 거였다. 강사료를 줄이고 수익을 더 남기기 위해 교육의 질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강사 수를 줄이는 것을 나보고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선발한 선생들을 내 손으로 잘라달라는 게 그의 요구였다. 


 나는 대학에서 주 40시간, 하루에 8시간씩 강의했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그곳에서는 내 연봉을 책정하지 않고 시수를 많이 담당하게 해서 돈을 더 가져가라고 했었다. 일반 강사들보다 시간당 받는 돈이 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강사들이 아무리 수업을 많이 해도 내 월급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항상 월급 때마다 했던 이야기가 총장이 내 월급이 왜 이리 많냐고 한다는 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일반 강사 2~4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벌었던 강사료는 한국어 강사로서는 절대 벌 수 없는 그런 금액이었다. 다른 대학에서는 아무리 많이 수업을 해도 주 20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없었다. 비정규직 강사법으로 주 15시간을 넘길 수 없었고 만약 15시간 이상 시수를 받는 경우에는 정년까지 채용해야 하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했다. 시간 강사는 프리랜서로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15시간 이하로 대부분 시수를 자르는 게 학교에서는 더 이득이니 그게 관례처럼 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학에서 월수금 12시간 강사와 화목 8시간 강사로 수업을 구성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시간 강사가 아니라 전임이었기 때문에 주 20시간 이상이 가능했던 거였고 전임이면 사실 연봉을 책정해서 월급제로 줘야 맞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 연봉을 책정하지 않는 대신 시간당 강사료를 일반 강사보다 많이 주고 모든 수업을 내 마음대로 시수를 담당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던 거다. 강의가 오전, 오후 수업으로 구성이 되니 내가 결국 오전, 오후 수업까지 다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그래서 나는 주 40시간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 강사였으면 결국 강사 4명이 해야 하는 수업을 나는 혼자 담당해야 했던 거다.


  나는 40시간을 쉬지 않고 강의해야 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당연한 구조였고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나는 혼자서 4명의 몫을 담당한 거고 그러면서도 행정일을 포함하여 업무 일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심지어 S전자로 저녁에는 출강도 나갔기 때문에 몸을 갈아가며 쉬는 시간도 없이 그렇게 일을 해야 했다. 그만큼 수입은 좋았던 시기였지만 내 몸은 축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나는 교통사고가 난 당일에도 잠시 병원에만 다녀온 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었다. 그만큼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빠지면 제대로 운영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임파선이 부어서 턱 아래 목이 부어 오른 적도 있었는데 염증에 좋은 차와 약을 먹어가면서 건강에 좋다는 것들을 챙겨가며 그렇게 일을 해야 했다. 

 내가 뮤지컬 배우를 하다 그만두었던 이유 중 하나가 목이 약한 탓이었는데 나는 강의하면서 그런 내 목을 혹사시켜 가며, 매일 다리가 부어가며 그렇게 일을 해야 했었다. 2년 동안 나는 그렇게 쉽지 않은 '남의 돈벌이'를 경험해야 했다.  

 

 처음부터 그들이 내게 연봉을 책정해 주지 않고 강의를 많이 하길 원했던 거였으니 결과도 당연한 것인데도 원장은 내게 월급 때마다 총장님이 '그 선생은 왜 우리들보다 더 많이 버나'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실제로 총장님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총장님을 뵐 때마다 내가 인사를 하면 그분은 나를 다시 한번 보셨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왜 내게 매번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술자리에서 대화를 하면서 차선의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나를 믿고 와 준 강사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나도 강사 입장으로 생각했을 때 하루아침에 반이 없어지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기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시수가 줄어드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아예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최악의 상황인 거다. 그래서 나는 원장과 협상을 했다. 반을 줄여야 한다면 내 수업을 줄이고 선생들에게 내 수업을 나눠주는 것으로 말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강사료는 줄어드는 거니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뿐이었으니 나만 괜찮다면 나쁠 게 없었다. 

 나는 사실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내 시수가 적어져도 상관없었다. 이미 나는 과분하게 많이 벌고 있는 상황이었고 학생들이나 강사들에게 피해가 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에 내가 더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리고 원장은 내가 원하는 대로 운영할 수 있게 다 해줄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노래방 소파에 누워 있었고 내 레깅스와 스타킹이 반쯤 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소파 끝에서 원장이 쭈그려 앉아 내 음부를 보면서 만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는데 그때서야 원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내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나는 그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축 늘어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났고 몸이 저절로 비틀거렸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50통이 넘게 찍혀 있었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사이 기억이 사라졌고 아무 기억도 없이 내가 노래방에 와 있는 거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나는 코트에 하늘색과 회색 투톤 목도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내 목도리도 없었고 내가 들고 왔던 내 짐도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술을 취하게 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 마신 술의 양도 소량인 데다가 내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억 못 하게 마실 사람이 아니었다. 부재중 전화가 50통이 넘게 올 동안 아무 소리나 진동도 못 듣고 느끼지도 못하고 그렇게 있었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화장실로 갔고 그곳에서 부재중 연락을 했던 그때 당시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위치를 그에게 알렸다. 나는 그때 기억이 없었는데 내가 남자 친구에게 '나 좀 살려달라'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화장실을 나와 아래로 내려가 보니 원장은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택시를 잡으면서 모텔을 가자고 했다. 내 몸이 흔들리고 있어서 그가 부축을 했고 때마침 그때 남자 친구가 멀리서 뛰어 왔다. 그리고 남자 친구는 나를 붙들고 그 원장에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그 원장은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화를 내며 택시를 타고 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걸을 수가 없어서 남자 친구는 나를 엎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집 현관 앞에 앉아 '일을 그만하고 싶다' 말하면서 주저앉아 한참을 펑펑 울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겪은 일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때 한 장면씩 떠오르던 그 모습들...... 내가 소파에 누워 있던 장면, 나 좀 살려달라고 와 달라고 말했던 장면, 그리고 화를 내며 갔던 원장의 모습 등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정말 술에 취했던 걸까? 그래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 건 그때 당시 '물뽕'이라는 걸로 술집에서 나쁜 마음을 먹고 술에 타는 범죄가 많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그런 일을 당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봤다. 증명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신을 잃었고 기억이 사라진 사이에 나도 모르는 장소에 내가 가 있었다. 

 

 그 사건은 내게 지금까지도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일을 당장 때려치우고 원장을 신고한 후에 모든 것을 멈췄어야 했을까? 


 불행히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의 내 기억이 혼란스럽기도 했고 물증도, 증인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때 그만둔다면 다른 강사들이나 학생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찝찝함을 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날 출근했다. 그리고 그 인간 같지 않은 인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사무적으로 대했다. 소름 돋는 일이었다. 그는 내가 전날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을 줄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 일이 그렇게 원활하게 진행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강사료 이야기는 계속해서 원장이 줄여야 한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는 내 강사료를 일반 시간 강사료로 결국 깎았다. 계약과 위배되는 일이었지만 내 힘으로는 그걸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유학원 원장과 그곳 원장이 나의 권한을 점점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점점 일적으로 내게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내 일이 싫어졌다. 가르칠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부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서 변태적인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을 동료 선생들과도 나눌 수도 없었고, 학생들에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밝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곪고 있었다. 


 그 후, 또 일적으로 술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2차로 노래방에도 가야 했다. 나는 그날 약을 먹고 있다는 핑계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원장은 내게 블루스를 추자며 끌더니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뿌리치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가서 그 길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 버렸다. 

 내가 아예 그 자리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안 그는, 내게 메시지로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나는 무시하고 그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가 취했었나 봐요.'라고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 그렇게 넘어갔다. 




 여자로서 어떤 위치에 올라가고, 여자로서 불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 같다. 내가 남자였어도 그런 일을 겪었을까? 

 내가 그들의 접대에 응하지 않을 때 불이익을 주고 나에게 뭔가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그런 일이 말이나 되는 일일까? 내가 미혼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이런 일이 가능이나 한 일이었을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걸까? 내가 약자임을 이용해 일을 시키고 말을 잘 안 들었을 때는 불이익을 주고, 말을 잘 들으면 자신들과 불법적인 행위를 같이 하게 만드는 그런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날 이후로 2년 계약을 채우고 그만 둘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도 그는 내게 선생들의 시수 문제로 끊임없이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강사들 입장에서 학교와 맞섰고 강사들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힘썼다. 내가 그만두기 전까지 다른 강사들의 시수와 수업은 다행히 지킬 수 있었다. 강사들은 내가 그때 어떤 일들을 당하면서 그들의 시수를 지키려 했는지, 한국어 과정을 없애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아마 알지 못할 거다. 나는 그때 끊임없이 그들로부터 협박받았고 그곳에서 학생들과 강사들에게 피해 가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내게 일기를 편지처럼 쓰던 학생이 그런 사실을 조금 눈치를 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했던 학교 측이 그에게도 협박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에게는 '네가 장학금을 받으면 너 때문에 선생님이 그만둬야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협박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원 원장도 학생들에게 '선생에게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 선생이 알면 너희는 다 불법 체류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협박하고 이간질시켰다. 학생들에게는 내 일자리를 가지고 협박하고 나에게는 '학생들을 불법체류자로 다 만들어버려서 학교 한국어 과정을 없애면 그만이다'로 협박하기 일쑤였다. 이때 어학원장과 유학원 원장 두 사람이 중간에서 학생들로부터 받은 돈을 뒤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상당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땐 나만 감당하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고 그러면서 나는 다른 곳으로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해외 대학의 한국인 총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학과장으로, 전임 교수로서 갈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박사 과정과 동시에 교수로서의 삶을 선택해서 내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나는 돈도 필요 없었고 그저 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상식적인 곳에서 봉사하며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었다. 내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었고 돈이 없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내 길을 선택할 때 돈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서까지 이 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원장은 내게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았었는데 '능력도 있고 멀쩡하게 생겨서 왜 결혼을 안 하냐, 어디 다른 하자가 있는 거 아니냐,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진다' 등 불쾌한 말들도 농담처럼 마구 던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MeToo'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이런 성희롱적인 발언을 수시로 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희롱과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해외로의 길을 택했다. 다른 한국어 강사들은 해외에서 경력을 쌓은 후에 국내에서 정착하는 게 대부분인데 나는 국내에서 이미 탄탄한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모두 뒤로하고 모든 것을 접고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그들과 끊고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그들의 눈엔,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생각이 되었던 걸까? 그들이 내게 준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니, 나를 한낱 소모품으로 그렇게 취급했겠지? 


과연 우리는 소비되는 소모품으로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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