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빛나고 있을 그들
살다가 가끔 지치고 힘들 때는 좋았던 추억을 하나쯤은 끄집어내 떠올리기 마련이다. '추억'으로 '힘듦'을 버티고 소중한 기억을 버팀목 삼아 그렇게 살아 나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아주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쾌한 일이 연타로 터질 때가 있다. 물론 안 좋은 일은 안 일어나는 게 가장 좋은 거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꼭 일어나야겠거든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적절히 섞여서 일어나면 그래도 조금은 버틸만할 텐데......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힘듦'이 마구 몰려올 때가 있다.
나의 최근 몇 년이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소중한 이를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배신을 당했고 사람들에게 지쳐갔고 그런 시간을 연달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고 '신이 있다면 그분은 내게 대체 무슨 깨달음을 주려고 이러시는 걸까'라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나의 힘듦'이 최근 몇 년 사이에만 일어난 게 맞는 걸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정도만 달랐을 뿐, 행복하고 기분 좋은 일도 많았지만 나는 분명 슬프고 힘든 일도 20대, 30대에도 계속해서 겪어냈다. 그저 나는 그 기억과 경험들을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의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되어 남기도 한다. 그래서 그때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때 그 일은 지금의 힘듦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였지'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내 뇌가 망각하고 다른 좋은 기억으로 다시 그 힘들었던 기억들을 밀어 넣은 거였다.
하지만 예전에도 나는 힘들었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힘들었던 기억이 무뎌지고, 잊히고, 때로는 재해석까지 되면서 '그때가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거야'라는 착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니 '만약 지금 내가 그런 일을 다시 겪는다면, 나는 과연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좋은 기억'은 그저 안 좋은 일일뿐이다. '어느 것은 정도가 약해서 버틸만하고, 어느 것은 정도가 강해서 버틸 수 없다'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나의 결론은 '행복'과 '불행'은 '정도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다. 다만 불행을 겪을 때에도 행복도 곁에 함께 있다면 그 불행이 완화될 수는 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내가 겪은 어떠한 상황이 너무 힘들었을 때 내 곁에는 항상 그 힘듦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 일들을 잘 겪어왔고 버텨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기억을 떠올려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떠올리는 그들은 내게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동시에 떠올리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내 인생에서 그 시기는 자신감과 총명함이 가장 빛났던 시기였던 동시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겪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20대와 30대의 경계에서 내 인생은 꽤나 빛나고 있었다. 일적으로는 인정받아 곳곳에서 스카우트를 요청해 왔고 박사도 아니었던 나에게 최연소 교수 자리까지 제안이 왔을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가 너무 많아서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꽃길만 걷는 듯했다.
일뿐만 아니라 연애에서도 그랬다. 소개팅도 꽤나 많이 들어왔고 심지어 모 방송에서 진행하는 그때 당시 유명했던 짝짓기 프로그램 관계자와 출연 관련 인터뷰도 했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내 분야에 자신감도 있었고 내 인생에서 걱정할 만한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만족하며 나아갔고,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그때 한 학교의 과정을 이끌어가는 전임이 돼서 교원 2명을 우선 선발한 후,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9월부터 첫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수업이 시작하기 전 8월에는 맛보기 수업으로 전체 학생 대상으로 수업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대만 학생들에게 특강도 했었는데 그 학생들이 내게 남긴 편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좋은 기억이었다.
첫 학기에는 30~40명 규모의 학생들로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대학에서는 중국의 유학원과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100% 중국 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재를 선택할 때에도 중국어 설명이 들어 있는 책으로 선정했다. 학생들 중에는 한국어를 배운 후, 취업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재도 대학 교재가 아닌, 회사 생활과 관련된 교재를 선택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학생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싶어서 중국어 과외도 받았었다. 학생들이 '팅부동, 칸부동'이라며 '들어도 몰라요, 봐도 몰라요'라는 말을 자주 해서 내가 중국어를 배우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의 성비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많은 시기였음에도 그 대학에는 유난히 남학생들이 다른 곳보다 꽤 많았고 한글조차 전혀 모르는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한글 교육부터 시작했고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붙잡아 두길 바랐기 때문에 오전, 오후로 수업을 구성해 학생들과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했다.
첫 1~2주는 모든 학생들에게 내가 먼저 교육을 시작해서 학생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반에 들어갈 수 있게 수업을 구성하고 교사 3명과 함께 팀 티칭하면서 이끌어 나갔다. 나를 믿고 와 준 선생들이었기 때문에 주 20시간씩 수업을 보장해 드렸고 시간적인 편의도 적절하게 맞게 해 준 상태였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는 지금도 연락하며 지낼 만큼 그때 우리는 재미있게 그 과정을 함께 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규모가 조금 커져서 교원 1명을 더 선발하기도 했었는데 그때는 전 직장에서 함께 했던 분들과도 다시 함께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문제없이 잘 해내고 있었다.
그곳은 그동안 일했던 곳과 달랐던 점이 있었는데 우선 학생들이 하루 종일 한국어를 배우고 함께 하는 데에도 쉽게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오전 수업에 점점 지각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또 유학원 원장의 권한이 다른 대학에 비해 꽤 컸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었다.
유학원과 관련된 사항은 그 대학의 언어교육원 원장과 유학원 원장의 관계에서 내가 낄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 시스템을 나는 우선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거에 대해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았다.
간혹 한국에 일하러 오는 것이 목적인 유학생들은 어학 코스를 듣다가 비자 문제만 해결되면 어디론가 사라져서 불법 체류자로 남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원이 학생 관리를 전담하는 거에 대해 이상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이탈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학생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 유학원에서 학생 관리를 도맡아서 했던 거였으니 그 부분은 오히려 고맙기도 했다.
내가 교육 외의 학생들까지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교육과 교사 관리, 전체적인 프로그램 운영 관리를 책임졌고 유학원 원장은 학생들의 숙소와 편의, 비자 문제와 같은 것을 학교 측과 협의하에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처음 내가 일을 시작한 후, 유학원 원장과 언어교육원 원장은 자주 식사나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가끔은 출입국 관리소 관계자와 함께 하는 식사나 술자리에도 동행해야 했다. 그러면서 학교 운영 문제나 여러 가지 정책들, 학생들 문제 등에 대해 듣기도 했다. 그동안 교원으로서는 몰랐던 사실들을 그때 많이 알게 되었고 유학 사업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남학생이 한국어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한글도 못 읽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학생은 한국어를 배운 지 1개월 정도가 되자 2급 정도의 수준이 되는 듯했다. 보통 일반 대학 기관에서 10주 정도를 공부하면 1개의 레벨을 배우는데 그는 4주 만에 4개월가량의 학습량을 소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두 학기(6개월) 정도를 공부하고도 고급(5급)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가 유난히 똑똑하고 착실해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는 모든 학생들을 총괄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 한글 수업에서만 그를 가르친 후 뒷과정은 다른 선생의 반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른 교사들을 통해 그가 빠르게 학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반을 수준별로 재구성하면서 나도 그를 다시 가르치게 되었다.
나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 쓰기'를 추천한 적이 있다. 과거 표현을 배운 후에는 학생들에게 하루에 7~8 문장이라도 일기를 쓰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것을 유일하게 실천하고 있었던 학생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직도 일기를 쓰고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내 질문에 깜짝 놀라며 자신이 쓴 일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그는 내게 자신의 한국어 일기를 제출했다. 그리고 나는 매일 피드백을 해 줬다.
어느 날부턴가 그의 일기는 편지처럼 내게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는 글을 썼고 나는 피드백해 주면서 답변도 달아줬다. 그러면서 나는 학생들의 생활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매일 일기를 쓰던 그 학생이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일을 해서 씻지 못했는데 숙소에 가서 씻고 와도 될까요?"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요청을 허락했고 그는 숙소에 다녀와서 수업을 들었다.
나는 이미 그의 일기를 통해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외국 학생들이 일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학으로 왔을 경우에는 일을 하면 안 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일정 시간 이하로만 일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내게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수업이 끝나고 뭐 하냐'는 질문에 항상 다들 '공부한다'라고 했었다. 나는 그들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안다는 것을 티 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학생이 자신의 친구들이 선생인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에 대해서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거짓말은 나쁘지만 나는 그들의 사정도 이해한다'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그날 오후 수업에 몇몇 학생들이 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늦은 이유를 물었고 그들은 뭔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얘기하세요'라고 했고 일기를 쓰는 그 학생이 중국어로 학생들에게 '선생님에게는 말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내게 꽤 충격이었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유학원에서 소개해준 일자리에서 처음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유학생들 중 어학원에 등록하자마자 나오지 않았던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 학생들은 이미 오자마자 바로 먼 시골로 일을 하러 간 거라고 했다.
나는 유학원 원장을 통해서 그들이 한국에 오자마자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미 유학원에서 그들의 일자리를 정해준 거였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등록하기 전에 이탈한 거니까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거다.
지금까지 유학원에서 학생들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데려 오면서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킨 거였다. 그리고 유학원 원장은 학생들에게 '선생님에게 절대 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거다.
나한테 말하면 그들 모두 다시 중국으로 강제 출국 당할 거고, 그러면 그들은 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유학원 원장이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든 일들은 그들끼리 내가 모르는 중국어로 소통한 거다.
유학원 원장이 나에게 중국어를 할 필요 없다고 자주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소통할 때 그는 항상 중국어로 이야기했고 내 눈치를 살필 때가 많았는데 그의 그런 행동이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내게 일기를 써 왔던 학생 역시, 처음부터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서 온 거였고 여자 친구도 한 두 달 간격을 두고 어학원에 등록한 후, 둘이 같이 일을 하면서 한국에서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오니 유학원이 약속과 다르게 학교에서 오전부터 오후까지 하루 종일 공부를 시키니 이들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던 거다. 그래서 새벽에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겨우 소개받아 9시부터 6시까지 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그 후 밤새 일을 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 한국에 올 때부터 이들은 어학원에 등록하는 게 아닌, 직업소개소처럼 유학원에서 일자리를 바로 구해준다고 해서 모집된 인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1인당 유학원에 1,000만 원 정도를 주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에서 돈을 벌면 한 달에 500만 원은 벌 수 있기 때문에 3개월 이상만 벌어도 유학원에 낸 돈을 뽑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유학원에 돈을 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친척들에게 한국에 오는 돈을 빌려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돈이 꼭 필요하니 일을 해야 했다.
한글조차 잘 익히지 못했던 학생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은 학력도 속이고 등록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문대학 졸업 이상자들인 줄 알았던 그들의 일부는 학력조차 위조된 거였다. 심지어 문맹이었던 거다. 중국어도 못 읽는데 중국어로 된 책으로 한국어를 공부시키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한국어는 멀고 먼 나라의 외계어였던 거다. 그러니 하루 종일 한국어를 공부만 시키는 내가 이해가 안 되기도 했을 거다. 그래서 나한테는 쉬쉬하면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리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게 일기를 썼던 학생을 통해 그들은 내가 유학원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유학원 원장은 나에 대해 도대체 뭐라고 했었을까? 그건 상상도 하기 싫다.
학생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나는 너희들 편이니 무슨 일이 있을 때 말해 주면 내가 도와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날 그들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또 한 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일기를 썼던 학생을 포함해서 남학생 5~6명 정도가 양계장에서 '닭을 잡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밤새 매일 닭을 잡아서 한 마리에 '5원'을 받기로 했단다. 중국 돈 5원이 아닌, 한국 돈 5원... 닭 한 마리를 잡으면 5원을 받는 일을 그들 여럿이 같이 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 했던 돈은 그때 당시 1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대체 닭을 몇 마리를 잡은 걸까?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을 하고 돈을 받아야 하는데 사장님이 돈을 안 줬다는 거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받기 위해 점심시간에 사장과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 사장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그때 한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이 없는 상태였고 자신들이 일했던 장소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사장을 찾아갈 수도 없었던 거다.
장소를 몰랐던 이유는 양계장에서 차로 그들을 어느 시골로 태워 갔다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고 교실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돈도 그들에게는 그때 절박했었던 것 같다.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 싶다.
나는 그들 이야기를 듣고 사장의 전화번호를 내게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장에게 바로 전화를 해 봤다. 내 번호는 모르는 번호여서 그런지 그 사장은 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사람은 내게 누구냐고 질문했고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인데 사장님과 학생들이 만나기로 하지 않았냐, 학생들에게 왜 돈을 안 주고 약속을 안 지켰냐, 약속을 지켜 달라'라고 말했다.
그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변명 같은 이야기를 늘어놨다.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고 유학원에서 소개받아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래 외국인이 일을 하는 것이 불법이니까 돈 벌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도 말하기도 했으며 연락이 잘 안 된 것뿐이지 자신은 돈을 떼어먹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끊은 후, 내 연락도 받지 않았고 그렇게 또다시 잠수를 탔다. 학생들이 일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필요한 만큼만 중국 유학생들을 부려 먹은 후, 그렇게 양아치 짓을 한 거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내가 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돈을 떼어먹으려고 머리를 굴린 '그의 양심 없음'에 화가 났다.
나는 사실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못된 사장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 사장에게 돈을 받아주지는 못했다. 내가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학생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그전에도 학생들이 내 말을 잘 듣긴 했지만 그날부터의 변화는 '문제가 있던' 학생들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찾아왔다.
다음날부터 학생들은 수업에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열심히 출석했다. 정말 눈에 띄는 결과였다. 한국어에 흥미를 붙인 학생들도 있었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무조건 교실에 앉아서 수업에 집중했다. 공부를 못 해도, 한국어를 못 해도 나를 웃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단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았고 수료할 때까지 우리 반 사람들은 즐겁게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날부터 내게 편지와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잘 못하는 한국어로 편지를 쓰기도 했고 중국어로 빼곡하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나는 그 변화가 굉장히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 따뜻했고 나를 마치 친구나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그 사장에게 전화를 해 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를 믿기 시작한 거고, 내가 그들을 위해 나서줬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마음을 활짝 열었던 거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흔히 말하는 중국의 '꽌시'였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도, 설날에도, 스승의 날에도 모든 학생들은 내게 선물을 하나 이상씩 주었고 더 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할 정도였다. 자신들이 떠나야 할 때는 90도로 내게 인사를 하며 눈물을 그렁그렁했던 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한 2년의 시간 동안 참 많은 감동을 받았고 행복했고 아파야 했다.
학생들 중에는 수료를 한 후, 수료 전에도 결국 일자리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끝까지 의리를 지켜줬다. 가더라도 몰래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났던 학생들이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수업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퇴근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고 내게 집에 바로 가지 말고 자신들을 꼭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그들을 학교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를 기다렸던 학생들 중, 한 학생의 키는 180cm가 훨씬 넘고 덩치가 아주 큰 학생이었는데 불과 한 두 달 정도만에 살이 쏙 빠져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얼굴이 까맣게 탄 채로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람과 동시에 그들 손에 들려 있던 수박을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그들은 지금까지 경상남도 어느 시골의 수박 밭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일한 곳에서 키운 수박을 내게 주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3~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오면서 수박을 안고 왔다는 거다. 나는 먼저, 그들의 변한 외모에 놀랐고 그들이 내게 준 커다란 수박 한 통에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수박을 그들은 내 차 뒷좌석에 넣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하게 된다. 학생들이 내 차에 수박을 싣으면서 지었던 표정, 짧게 인사 나누면서 나눴던 대화, 그때의 그 상황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더 속상했던 것은 그들은 내게 수박을 주자마자 바로 다시 자신의 일터로 향해야 했다는 거다. 내가 밥이라도 사 주려고 했지만 그들은 버스 시간이 다 돼서 가 봐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수박을 내게 전해주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왔던 거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돈 벌면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후,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씩 그렇게 일을 하러 갔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일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 핸드폰 번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간혹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도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어학원을 떠나면서 그들은 아마도 불법 체류를 하면서 시골 어딘가에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라 생각한다.
내게 일기를 꾸준히 써 왔던 그 학생은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한 여학생도 학교에서 조교 일을 하면서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내게 일기를 써 왔던 학생은 워낙 똑똑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내가 추천을 했는데 학교 측에서는 막상 그 학생이 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자, 말을 번복하고 말았다. 갑자기 장학금을 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 학생도 결국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정말 많이 속상했다. 그 대학에서는 사실 중국 학생을 진학시킬 마음이 없었던 거다. 아니, 유학원과 어학원장의 거래에는 대학으로 진학시키는 게 아닌, 취업으로 학생들을 연결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돈을 주고받아 그렇게 학생들을 팔아 호의호식했던 거라 생각한다.
나의 마음을 위로할 줄도 알았던 그 학생은 결국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내게 연락을 해 줬다. 나는 그 학생이 더 좋은 길로 가게 해 주지 못한 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에 진학하려 했던 마음을 유학원 원장과 어학원 원장이 꺾어 버린 거 같아 야속하고 속상했다.
그래도 그는 성실했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도 인정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에서도 사장님이 비자를 해결해 줄 테니 일을 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나는 그 학생이 공부를 더 하면서 더 좋은 일자리로 가길 바랐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권했었는데 그는 여자 친구와 같이 살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혼자만의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나의 의견을 물어보곤 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그도 멀리 일을 하러 떠났다. 그는 결국 수박 밭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한국어를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닌, 그곳에서 사무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처음에는 내게 학교로 수박을 보내왔고, 나중에 내가 해외로 나간 후에는 우리 부모님 집으로 여름에는 수박을, 겨울에는 멜론을 보내왔었다. 그러다가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결국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그곳에서 2년 동안 학생들을 교육하고 지내다가 해외로 나가게 됐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의 선택도 있었지만, 그전에 나를 힘들게 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곳에서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학생들이었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이제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2년 동안 내게 해 온 여러 가지 사건들, 학생들에게 해 온 일 등이 결국에는 어떠한 좋지 못한 일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떠한 속셈들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 힘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여러 사람에는 나도 포함이었다. 그들의 만행을 그때는 일일이 말할 수도 없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나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했었는지 이제는 말해도 될 거 같다. 너무 늦었지만 그때는 내가 말할 수 없었던 일들, 그리고 내가 왜 아파야 했고 왜 힘들었어야 했는지에 대해 풀어볼까 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던 학생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시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 아파야 했다. 학생들 편에 섰던 내게 다가왔던 시련, 잘못된 선택, 그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러 가지 후회되는 일들, 그 이야기에 대해 다음 편에 계속 이어 쓰려한다.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중국 학생들, 지금은 어디에선가 환하게 빛나고 있을까?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힘들게 지냈던 그들, 지금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디에선가 빛나고 있을 그대들, 그 시간에 함께 해 줘서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