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이라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참 많다. 정말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 같다.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학습자들, 교사들과 함께 했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그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 느낌과 방향은 같을까?
나는 직업 특성상 참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그 인연은 정말 뜻하지 않게 이어지기도 했으며, 좋았다가 안 좋아진 인연도 있었고 안 좋았다가 좋아진 인연도 물론 있었다. 나는 그중 학생들과의 인연을 조금 더 추억해 보려 한다.
내가 지금까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는 훌륭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 학생들과의 일화는 내 SNS에도 가끔 그들과의 추억이 등장할 정도로 나에게 의미 있는 이들이었다. 그 학생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꽤 여러 길로 가고 있었다.
내가 첫 직장에서 마지막에는 누군가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학생들에게 당한 게 아니었기에 내게 타격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개인적으로 고등학생 과외도 하고 있었고 오히려 더 많이 들어오던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에 특별히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그만두었던 그 학교에서만 강의를 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도 학부 출강도 했었기에 첫 학교에서 그만둔 후에도 일적으로는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나는 그때 과외 업체의 지점장을 맡게 되어 사업도 하게 됐었는데 그 사업을 하면서 느낀 점은 내가 돈을 좇아 나아가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받았고 그들로 인해 보람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려운 사람은 돕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키워 주고 싶어 했다.
일을 하면서 무엇인가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거나 찜찜한 부분이 있을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지금도 이어지는 내 단점이자 장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사업가 마인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하면서 이익을 좇아야 하는데 나는 이익보다는 그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전 동료 선생으로부터 단기 강의 자리를 소개받아 지방까지 다니기도 했고 그 도시에 간 김에 주변 도시의 다른 일자리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자리든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원하고 도전했다. 과외 교육 사업은 계속하면서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도 문을 두드렸고 다문화센터에도 지원했다가 덜컥 붙어서 수업을 바로 하게 되었다. 한꺼번에 모든 일이 다 몰아치며 내게 다가왔다. 도전하는 것들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니까 그저 신기한 그런 시기였다.
그때까지 대학이나 기업체에서만 강의를 했었기 때문에 나는 전부터 다문화센터의 상황도 알고 싶긴 했었다. 다문화센터에서는 대상 학습자가 결혼이주여성이라서 대학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매력이 그곳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다.
버는 돈은 적었지만 나는 그들과 정을 느끼며 알아가는 시간도 꽤 흥미로웠다. 내 예전 다이어리를 들춰 보면 그때 나는 내 일에 만족도가 꽤 높았던 것 같다. 학생들과 수다를 나누듯이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그들의 시부모, 남편과의 갈등 문제도 서로 이야기하며 생활을 도와주기도 했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다들 결혼한 외국 여성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는 어렸는데, 그중 한 학습자는 어느 날 3~4살 꼬맹이를 교실에 데리고 오기도 했었다.
그때 날이 꽤 추웠던 2월이었던 것 같다. 아이 얼굴이 하얗게 튼 모습을 보니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다녔던 니베아 크림을 얼굴에 발라주며 아이도 같이 돌보면서 수업하기도 했었다. 대학 강의에서는 이런 일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 강의가 아닌 다문화센터와 초등학교에서까지 강의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서 하게 된 강의는 한국어가 아닌 사물놀이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아이들도 만나니 기분 좋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쉽게도 굉장히 짧은 기간에 그 일을 끝내야 했다.
어느 날, 첫 직장이었던 학교에서 가르쳤던 학생이 내게 연락을 해 왔다.
그 학생은 수업 시간에도 착실했고 한국어도 잘하는 중국 여학생이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불과 1살밖에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친구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그 학생을 가르칠 때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그 대학교에서 근무할 때 그가 교실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었는데 쉬는 시간에 자신의 가방 안에 지갑을 넣고 밖에 나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그 지갑에는 현금이 많이 들어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6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가 반에서 지갑을 꺼내서 돈을 확인까지 하고 넣어 두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지갑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가 그것에 손을 댔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같이 CCTV를 확인하러 관리 사무소에도 갔지만 교실 안에는 CCTV가 없었고 복도에만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있었을 뿐, 지갑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과 같은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지갑과 돈을 찾지 못하고 그날의 일과가 끝났다.
그런데 안타까워하며 속상해하던 그의 모습이 퇴근길에도 내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았다. 내가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현금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외국인등록증, 사진뿐만 아니라 여러 추억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우리 반 학생수와 같은 숫자의 상자를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그 상자를 준비해서 다음날 학생들에게 나눠 주며 말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갑을 가져갔거나 그 지갑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상자 안에 지갑을 넣어 주세요. 그것은 똑같은 모양의 상자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것을 안에 넣었는지 알 수 없어요. 제가 내일 교실 한쪽에 큰 상자를 놓을 테니 거기에 지금 받은 상자를 모두 넣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다행히 학생들도 내 제안을 수락했다.
다음날 교실에서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집에 간 후에 우리는 그 상자들을 확인해 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끝까지 '그 누군가'를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해 지갑을 찾으려는 노력이라도 했기 때문인지 그 학생은 내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내게 종종 연락을 해 왔고, 내가 그 학교를 떠난다고 했을 때에도 자기 일처럼 정말 슬퍼해 줬다. 또 그가 한국에서 학교도 계속 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가끔 볼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내게 꼭 할 말이 있다며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리고 내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중국에서 유학원을 크게 운영하는데 한국의 어떤 대학과 유학원이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는 지금 한국어 교수를 채용한다고 했고 본인에게 실력 좋고 젊은 선생님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는 거다. 결국 그는 나를 그분들에게 추천했고 그렇게 그 학교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 대학의 언어교육원장과 어학원장이 내게 직접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달라고 했고 면접과 시범 강의까지 본 후, 나는 그 대학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대학에서는 한국어 과정 전체를 총괄하고 운영할 사람을 뽑았던 거였는데 교육원장과 어학원장이 학생을 유치하고, 나는 교육 과정 전체를 만들고 선생들을 선발해서 이끌어 가야 했다. 그때 내 나이는 29살이었다. 20대였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교사들을 평가하고 뽑아서 같이 수업을 진행해야 했는데 내 첫 직장에서 친하지 않았던 선생들도 내게 채용을 부탁하는 연락을 하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인 건 분명했다. 교재도 내가 선택하고 과정을 만들고 그에 맞게 학생들을 파악하고 강의하면서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특히 그 대학에서는 내 연봉을 책정하지 않는 대신 강의를 많이 맡겼었는데 나중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 40시간을 강의하기도 했었다. 보통 한국어 강사들은 주 15시간 이하로 일을 하지만 나는 그때 쉬지 않고 주 40시간 강의를 하면서도 전체 관리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런데 이 대학에서 내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몇 개월의 시간이 떴었다. 3월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과는 달리 다음 학기로 '교육과정 개설'이 미뤄진 것이다. 하지만 교육원장이 내게 급하게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본의 아니게 다문화센터와 초등학교 사물놀이 강사 등을 급하게 그만둬야 했었다. 그동안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바로 그 대학에서 일을 시작할 줄 알았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학 측에서 계속해서 날짜를 미루는 상황이었고 나는 일을 안 하고 그것만 믿으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사이 나는, 기업체 출강과 단기 강의 등을 이어하면서 학교의 행정적 문제가 해결되기만 기다려야 했다.
결국 6개월쯤 후, 그 대학은 문을 열었고 '나의 잊을 수 없는 학생들과의 인연'이 그렇게 또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 오기까지 나는 스쳐 지나가듯 소중한 한 명 한 명의 인연으로 그 자리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안 본다고 평생 안 보는 게 아닐 수도 있고, 평생 볼 거 같았던 사람도 언젠가는 영영 못 보게 되는 것도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 분명한 건 단 한 명이라도 그냥 허투루 지나치는 인연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