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특성상 나는 참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오늘은 그중에서 기억나는 학생들과의 일화를 떠올려 보았다.
첫 학교에서는 중국 학생들이 80% 정도로 제일 많긴 했지만 아시아 학생들뿐만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학생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기억나는 국가 중에는 카메룬 학생들이 있다.
이집트 학생을 제외하고 아프리카 학생들은 그때 처음 가르쳐 봤었는데 그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나름 골칫거리였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카메룬 학생들은 한 학기가 다 지날 때까지 한글조차 몰라서 수업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하는 상황에서 수업은 일정대로 한 학기 10주 과정이 진행되어야 했다. 막무가내로 '모르겠다'라고만 하고 있으니 학교에서는 그들을 그만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정도였다.
한 학기 정도는 그냥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고 두 번째 학기에는 대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국가의 학생들만 모아서 한 반을 따로 구성하게 되었는데 여러 선생들이 그 학생들을 끌고 가다가 막판까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막판에 그 학생들을 담당하게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동안 다른 선생들로부터 그들의 악명(?)에 대해 말만 듣다가 처음 그들과 직접 마주하고 수업해 본 나는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카메룬 학생들과 그전에 소통이 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언어 차이였다. 카메룬 학생들은 영어도 잘 모르고 당연히 중국어는 더더욱 몰랐을 거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거다.
보통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게 '한국에 있는 외국인 대부분이 영어는 알겠지'라고 생각하고,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영어를 할 줄 모른다. 특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대부분 영어를 기본적으로 배우고 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2000년대 초중반에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중에는 일본, 중국 학생들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선생들 중에는 일본어,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꽤 많았던 상황이라 일본, 중국 학생들과 소통이 어느 정도 잘 됐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학생들은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당시 선생들 중에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선생이 많지 않았고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로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원칙이니 학습자들과 수업할 때 한국어만을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아니면 영어를 섞어서 쓰는 게 최선이었을 거다. 하지만 학습자들이 영어도 모르고 한글조차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었을 리가 없었다.
원칙적으로 대학 기관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한국어를 사용하여 가르치는 게 맞다.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 외국어를 사용해서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학생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는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해서 풀어줄 수 있는 부분을 명쾌하게 들려주는 것도 분명 필요하다. 간단하게 사전에서 찾아서 표현해 줄 수 있는 어휘나 문법 설명까지 한국어로만 설명하기를 고집하는 것이 때로는 그들의 요구에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카메룬 학생들이 바로 그런 학생들이었다. 자신이 익숙한 언어만 고집하고 다른 언어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한글을 왜 배우는지 목적조차 알기 힘든 상황이었다. 배우려는 의지도 없었고 그저 자신들에게 우리가 한국어를 떠 먹여서 뇌 속에 넣어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한글에 대한 오해'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보통 한글 수업은 길어야 일주일이면 끝난다. 한글은 굉장히 과학적인 문자임이 분명하다. 누구든 한글 모음과 자음만 익히고 나면 어떤 글자든 만들 수 있고 소리와 문자로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카메룬 학생들이 한글 자모조차 몰랐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 문자'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글자를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글을 한자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외워야 하는 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들 눈에는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온통 새로운 문자였던 거다.
뇌의 용량에 그 글자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담을 수가 있을까? 어떠한 천재도 그렇게는 못한다. 중국 학생들 중에서도 간혹 1년 넘게 한국어를 배워도 끝내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런 학생들 역시 이런 경우다. '한자'처럼 '한글'도 글자 하나하나를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중국 문자인 한자도 다 외우지 못하는데 한글을 외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한글' 교육은 한국어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간혹 한글을 가르칠 때 모음과 자음을 외우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거기에서 질려버리는 학생들이 있다. 그 '오해'를 풀지 않고 한국어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면 결국 진전되는 것은 없고 '한국어는 어려운 언어'라는 인식이 생겨 한글조차 배우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한글의 제자 원리와 발음, 제대로 된 조합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학습자들이 한글을 흥미 있는 언어로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한국어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글 교육, 즉 한국어의 기초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초급 교육일수록 경력자들이 노련하게 학습자들을 이끌어 가며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한글 교육의 체계성'에 따라 교육의 성과가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어 교육 경험이 없거나 한글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교사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부분이 바로 학습자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하루 만에 쓱쓱 가르쳐 버리는 경우다. 한글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저 외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글 교육이 시작되면 학생들은 거기부터 흥미가 떨어지고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니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어 어휘와 문법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래도 그 카메룬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잘못 가르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모든 교사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이해시키려 했을 거고 한글을 익히게 하려고 노력했을 거다. 다만 처음부터 그 시기, 즉 '골든타임'을 이미 놓친 거라 생각한다.
한국어 학습에도 '골든타임'이라는 시기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첫 시기가 '한글'을 익히는 과정이다. 한글을 이미 다 익히고 난 후에 익숙해지고 외우는 과정이 있어야 했지만 그들은 이미 그 시기를 놓치고 수업 진도를 나가야 했으니 거기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을 거다. 그 후 학습은 그때그때 시키는 대로만 진행되었을 뿐 자신들 스스로 흥미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외우려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 학생들은 그렇게 낙오가 되었을 거다.
나도 지금은 경험이 축적되고 경력을 많이 쌓아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지, 초보 교사가 한국어를 교육할 때는 이 부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학습자들을 분석하고 고민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그때 가르쳤던 카메룬 학생들에게 내가 첫 수업에서 '나는 프랑스어를 조금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그들은 그때부터 나에게 프랑스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할 때는 프랑스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하며 궁금한 것들도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한글 자모조차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다음 학습 진도를 나가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글부터 설명했고 모음을 익히고 자음을 외우고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할 때에는 숙제로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닌, '수업 시간 안에' '같이' 해결하려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마치 한글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처럼 이제야 한글이 '조합 문자'라는 것을 이해했고 그동안 자신들이 글자를 하나하나 외워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오해'를 풀기 시작했다.
이것은 편견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게으른 면이 좀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일해 본 선후배를 통해 들은 그들의 습성은 일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아침 늦게 출근해서 오후 3시만 되어도 일은 안 하고 퇴근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더운 날씨에 익숙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늦게까지 하지 않는 문화인 거 같았다.
내가 그런 습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숙제를 준들, 학교에서 배우는 시간도 아닌데 집에 가서 '그 숙제'를 할 리가 있을까? 그들이 집에 앉아 공부를 열심히 과연 할까? 당연히 아닐 거다. 그러니 그들에게 '숙제로 외워 오세요'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들이 하나라도 정확하게 익히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드디어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지고 한글 자모를 익히며 만족하는 시간을 가졌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글 교육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고 그들이 그 후 진도를 나가고, 시험을 봐야 했지만 그 시험에서 합격할 실력을 갖추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흐른 뒤였다. 그들이 다른 학생들과 섞여서 진도를 나갈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놓친 거였다. 그렇다고 그 몇몇 학생들 때문에 한 반을 따로 구성해 주는 것은 무리였을 거다.
그래도 카메룬 학생들은 변화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중 한 학생은 왕족이었고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온 것이었다. 그때 왕족 가족 중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뉴스에도 생중계를 했었는데 그들은 그 사람이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친척이라 말했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한국에 일을 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었던 거다.
그들은 한글을 깨치게 해 준 내게 고마워했고 보답하고 싶어 했다. 나와 계속해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기도 했는데 그중 왕자였던 학생이 내게 개인적으로 계속 만나자며 연락하면서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 황당한 일(?)도 경험해야 했다.
나는 그에게 만날 수 없다고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그는 내가 퇴근하고 나올 때까지 사무실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린다거나 연락하려 해서 곤란한 상황도 겪어야만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쯤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를 스토커처럼 생각해서 내가 피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그 학생에게 조금 친절하지 못했던 점이 미안하긴 하다. 그때는 내가 2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학생들이 내 또래도 많았는데 내가 어렸으니 '더 무시당하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선생은 선생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수업 시간 외에는 따로 학생들과 보려고 하지 않았었다. 유일하게 학생들과 따로 봤던 시간은 학생들이 수업을 완전히 수료하고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그 학생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떠올려 본다.
알에서 깨어난 오리가 처음 본 누군가를 엄마로 생각하듯이 한국어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간혹 처음 만난 한국어 선생님에게 꽤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실제로 한국어 선생들 중에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과 연인 사이가 된다거나 국제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꽤 많이 봐 왔다.
나도 그동안 많은 학습자들을 만났었고 그 사이에서 정말 바르고 착실하거나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학생들은 참 예뻐 보이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그 나라 유명인이나 재벌과 만날 수 있으니 소개해주겠다며 자신의 나라로 초대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연락하려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정도로 학생들은 한국어 선생에 대해 관심도 많고 호의적이었다.
많은 학생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학생도 있고 그때의 그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학생들 중에는 15년이 훨씬 더 된 인연도 있고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그들의 꿈이 바뀐 적도 있었고, 또 어떤 학생은 내게 일자리를 준 적도 있었다. 또 여러 가지 일로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나에게도움을 준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기억들은 나를 성장시켰고 그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내 미래에도 많은영향을 줄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한국어 교원으로서 생활하면서 소중한 인연, 그리고 그냥 스쳐 지나간 인연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 하는 내 학생들은 내게 참 소중한 존재들이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나의 인맥들 역시 감사한 인연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과 유대는 국경과 나이를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끈끈함은 값진 나의 일부로 남는다. 언제든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