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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tN May 10. 2022

작가라는 인간에 대하여

완결 없는 작가-되기의 작업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할 때, 혹은 그 문장 속 단어 하나에 이어질 다음 단어를 고민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로서의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나는 다음 단어로, 다음 문장으로 무엇을 원할까? 작가는 동전을 넣으면 화려한 음악과 함께 정해진 모양의 이야기를 뽑아내는 달고나 기계가 아니다. 작가의 글쓰기에는 정해진 투입과 산출의 함수가 없다. 오직 영감에 매료되어 매 순간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는, 삐뚤빼뚤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문(自問)에 자답(自答)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을 생산한다. 물음에 체계를 부여해주는, 외부로부터 온 눈금자는 없다. 자기문답의 문항들은 의식 내부에서 스스로 구성된 것이다. 당신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해도, 혹은 고정된 형식의 글을 쓴다고 해도, 의식의 자유로운 문답과 연상작용은 글쓰기 안에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오히려 이러한 제약은  의식활동에 재미와 활기를 더해준다. 만일 당신이 공문서를 작성하고 있다면, 의식은 이러한 문답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문장을 ”야“로 시작하면 안 되겠지?”)  글의 종류와 형식, 주제와 관계없이, 오직 글쓰기 작업 내부에서/자체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연상 작용. 나는 그것을 작가-되기라고 부른다.      


’문답‘이라는 말은 분명한 시간적 관념, 다시 말해 선후관계를 전제한다. 우리는 작가로서의 자아로부터, 글쓰기의, 텍스트의 공백으로부터, 아직 채워지지 않은 미래로부터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너는 무엇을 쓸 것인가?” 이에 답하고, 텍스트의 여백을 활자로 채우는 작업은 그러한 질문에 사후적으로 답하면서 시행된다. 결국 우리는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자아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가감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당신이 다음 단어를 고민할 때에는 물론, 하나의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에도. 우리는 “너(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이, 결코 충족될 수 없음을, 완벽히 답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애초에 그러한 질문에 주어진/정해진 완벽한 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텍스트의 여백에서부터 가해진 질문에 답하고자 글을 쓰지만, 곧 그러한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음을 알게 된다("미래로부터 온 물음"에 완벽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는 예언자일 것이다. 혹은 필연을 믿는 꼰대거나.). 결국 우리가 제시하는 글, 직조하는 텍스트는 항상 작가로서의 자아의 요구와 질문에 불충분한 답을 제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 무한의 간극, 매 순간 펼쳐지는 공간이 작가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곳이다. 작가-되기는 완결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종착점은 없다. 창작의 고뇌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작가로서의 자아가 제시하는, 여백으로부터의 물음에 완벽히 답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 부여된 비극적인, 그러나 동시에 창조적인 축복이다.  


글쓰기를 즐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다. 제아무리 괴로워하며 쓴 글에도, 작가로서의 자아에 다가가고자 하는 약동과 에너지가 묻어있으며, 문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답변'이 있다는 사실을. 이 사실이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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