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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북극 Dec 21. 2024

기억에 대한 오해/그날 밤 또 다른 취조실에서의 대화


"당신... 누구입니까"

나의 질문은 그의 말처럼 벽 이곳저곳에 닿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린 듯 울림이 없다.

울림이 없는 나의 말들이 그에게 닿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빈 테이블 위의 어느 지점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를 기억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곳에 마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

대답대신 그는 원망의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원망의 말투라고 했지만 사실 그의 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있지 않다는 게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투는 밋밋해서 오래된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처럼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듯했다.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꿈속의 그(그녀)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내 앞의 그 처럼 생기 없는 밋밋한 억양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던 눈빛과 감정을 담아 그(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혹시 그(그녀)는 지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지금 이 사람인 걸까?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꿈속의 그(그녀)는 지금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영혼이 텅 빈 껍질 같은 사람이지만 꿈속의 그(그녀)은 충만한 생기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그녀) 말에는 언제나 진정성이 느껴졌었다.

결국 그(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지는 못 했지만 그(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랫동안 알아왔던 것처럼 설레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 사람에게서 그러한 익숙함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질적이고 몸에 베이지 않은 불편함이 이 사람을 대하고 있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그(그녀)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우리  누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이것만은 당신이 꼭 기억해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누군가와 당신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했도 괜찮습니다. 대화를 나눈 사람이 우리  누구였는지만 기억해 내면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특별한 액센트가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그(그녀)도 그 점을 강조했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내 앞의 그처럼 억양이 없는 밋밋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말하던 그(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대화의 내용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누구였는지만 기억해 내라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화에 대한 의미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누구라는 것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누구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복수의 존재가 있고 나는 그 존재들 중 누군가 적어도 한 명을 만났거나 알고 있다는 것일까?


그가 우리라고 할 때 그는 당연히 내가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에 대한 존재를 조금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중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나도 모르게 그 말들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바싹 마른 메마른 소리가 오래된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가 말할 때의 말들은 사방의 벽에 울려서 한동안 방안을 맴돌다 사라지곤 했지만

나의 작은 소리는 입안에서 살짝 맴돌다가 목구멍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가 작은 방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렇게 사라졌다.

내 귀에 조차 제대로 도달하지 못한 소리는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비명 같던 "우리"라는 단어 때문인지 어둠 속에서 실체의 마룻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부터 삐걱대는 마찰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귀가 잘 맞아 들어간 마룻바닥에 틈이 생기면 어떤 것들은 그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중요하던 중요하지 않던 사라진 것들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기 마련이죠. 물론 찾아야 할 것들이라면 언제 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게 되겠지만, 그 존재감이 미약한 경우는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겁니다. 사라졌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입니다.”



문득 잊혔던 꿈속의 장면처럼 생각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지지 말 것, 그대로 둘 것, 경고의 목소리였지만 진짜 그가 경고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라졌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일인지 알려주려 했던 것일까?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비명 같은 "우리"라는 목소리에 나는 잊고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을 뿐이다.

그전에는 그런 대화가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슬픈 일이었을까?

기억조차 못 한다면, 이렇게 문득 생각이 떠올라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체 살았을 텐데.

과연 무엇이 슬픈 것일까?

잊힌 무언가가 자신을 기억해 주지 못하는 슬픔인 걸까?

아님 한때 소중했었던 서로의 관계에서 이어진 공감의 상실 때문인 걸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미동도 없던 그가 또다시 경고했다.

그가 앉아있던 그곳을 멍하게 바라본다.

미동 없이 앉아 있어야 할 그는 텅 빈 어둠으로 비어있다.

마룻바닥에 틈으로 감쪽 같이 사라져 버린 무언가처럼 그는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뒤이어 그의 말들이 작은 방 벽의 이곳저곳에 부딪혀 울리다가 점점이 사라지고 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어쩌면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말하던 우리  누군가의 말들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마룻바닥의 틈으로 사라진다.

나의 존재만을 거기 남겨 둔 채로 감쪽같이 다들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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