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취경전

엘리사벳과 안드레아

by 구일권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이북에서 태어나셨지만 부모님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해방 전까지 사셨다. 학교 공부도 잘하셨지만 붓글씨 등 여러 방면에서도 뛰어나 수재라 불릴 정도였다고 했다. 그 후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 땅을 떠나기로 결심한 외할아버지는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1949년 초 추운 겨울날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셨고 그 힘든 여정은 굳이 설명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북에서 이미 결혼한 어머니 윗 언니 둘은 따로 월남하여 춘천과 원주에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만 함께 중구 초동의 한적산 가옥에서 지내던 중 우리 집안과 이북에서부터 친교가 있던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육사를 나와 초급 장교였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몇 장 남아있는 당시 사진에서 보면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연미복 차림의 아버지와 머리에 꽃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 모습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 후 6.25 가 발발할 당시 아버지는 전방에 게셨고 영문도 모르는 우리 가족들은 나를 임신한 어머니 때문에 피난도 못 간 체 지내다 내가 태어난 후 인민군들이 서울에 남아있는 군인가족들을 색출 중이라는 소식에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전가족이 정릉에 있는 봉국사란 절로 피신했다고 했다. 서울수복 후 다시 만난 아버지 덕분에 1.4 후퇴 때에는 미군 함정을 타고 모두 부산으로 무사히 피난을 갈 수 있었고 군인 가족 이란 덕분에 피난시절 남들이 겪었던 그런 험한 고생은 안 했던 것 같았다. 미군부대 타이피스트부터 국회의원 비서와 학교 교사 등을 거친 어머니는 말 그대로 커리어 우먼이었다. 아버지의 잦은 전출로 인해 그 경력은 단절됐지만 나중에 싱가포르 동생집에 계실 때는 어머니의 진가가 발휘되어 일본어나 중국어 통역과 가이드도 하시면서 용돈도 벌어 쓰신다고 동생 이전했다.'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안 나고 수심만 가득하다는' 외할머니의 넋두리 섞인 노래 가사처럼 아버지의 바람기로 인해 어머니 가슴도 다 타들어 갔을 것 같다. 1미터 80에 가까운 큰 키에 인물까지 좋았던 아버지 주변에는 늘 여자들이 끊이질 않아 어머니의 속앓이는 계속되었고 동기생들 중 처음 장성이 될 거라고 촉망받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4.19 즈음에 남들보다 일찍 제대를 하셨고 그리고는 집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 시간을 보냈다. 5.16 후 동기생들이 출세하는 모습에 후회와 한탄 등 아버지의 마음은 복잡했으리라 이제야 짐작되며 그 때문인지 두 해를 병원서 지내시다 50을 넘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천주교 신도이신 어머니 덕분에 대세를 받으신 아버지의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그 후 어머니는 이북 사람답게 억척같이 생활을 꾸려 나가시며 고생만 하시다 지금 내 나이에 작고 하셨다. 어머니의 한 많은 세월 누가 알아주겠냐마는 그래도 노년에는 경복궁 노인 대학 등 세 곳의 노인 대학을 졸업했는데 노래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는지 그때 사진들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 시간이 무척 즐겁고 만족스러운 때였나 보다. 엘리사벳의 세례명을 가지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와는 절대 합장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지만 의정부 천주교 묘원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계신 아버지에게 살아계실 때 어머니에게 잘못했던 일들을 사죄하며 저승에서라도 어머니를 잘 보살펴 달라는 마음으로 보내드렸는데 몇 년 전 내가 죽으면 누가 산소를 돌보겠냐는 생각에 두 분을 늦게나마 대전 현충원에 함께 모시게 되어 조금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가족에게 소홀했던 아버지를 원망하여 한때는 산소도 잘 안 들렸던 나인데 나는 가족에게 어떠했던가를 되돌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가족들에 대해 성실한 아버지는 아니었다는 미안한 마음과 나만의 삶을 살지 않았나 하는 회한(悔恨)의 빈 웃음만 나왔다. 요즘 아빠들 대부분이 가족들에게 지극정성인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해보지만 이미지난 시절 아닌가, 골목길을 돌아서다 언뜻 만나 스쳐간 바람처럼 만남과 인연 모두 지우고 애이불비(哀以不悲)의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남김없이 모두 흘려보낼 테니 이제 그만 편히 쉬시라는 마음을 전했다. 우리 집에 고부갈등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그런 이유로 싱가포르 동생집으로 떠나신 어머니는 10년 넘게 그곳에 계시다 한국으로 돌아오신 몇 해 후 나와 떠난 벚꽃 구경을 마지막으로 늦은 봄날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고 한참이 지난 이제야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부디 좋은 세상에 가 계시기를 빌 뿐이다. 주현미의 잠깐만 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아직도 내 가슴에 큰 멍으로 남아있다. 해 질 녘 불당을 울리는 독경소리와 처마 끝 풍경소리 , 목탁소리 그리고 내 마음을 씻어줄 시냇물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작은 바람소리에도 허허로워지는 마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면 싶었다. 절이 속세의 번뇌를 씻어 주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버리고 늑대가 달을 사랑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남은 시간 보내려 한다. 급류에 떠내려온 돌멩이 같은 신세지만 먼바다로 떠나기 전 멈춘 글이라도 마무리 지으려 힘을 내어본다. 오늘따라 회심곡(回心曲)이 마음에 와닿는 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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