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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Jul 20. 2022

"네가 아픈 것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다"

[조용호의 문학공간] 이정록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열한 번째 시집 '그럴 때가 있다' 펴낸 이정록 시인

무거운 죽음조차 해학으로 활달하게 위무하는 익살

국가와 종교로 나누어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세태

시골 할머니와 버스 기사의 대화에 밴 구성진 말 맛

37년 교직 물러나 '이발소'(이야기발명연구소) 차려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자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종달새')


새 시집을 펴낸 이정록 시인. 그는 "이번에는 자신감이 좀 생긴 것 같다"면서 "예전과는 달리 독자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시를 쓰려고 했다"고 밝혔다. [조용호]

 

헤어졌던 가족이 만났다. 어미는 반가워하기보다 왜 일찍 도망왔느냐고 타박한다. 아버지는 아예 말이 없다. 어미가 당부한다. 애간장이 녹아버리고 울화통이 터져서 그런 게니, 조용히 죽은 척 누워 있으라고. 죽어 있는데 죽은 척 하라니 헛웃음이 나오는데, 꽃 피는 봄까지 기다릴밖에. 봄에는 아버지도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다고 어미가 토닥인다. 


"살림의 시를 쓰고 싶어요. 살림의 언어인지 죽임의 언어인지, 살림의 정치를 하는지 죽임의 정치를 하는지, 근원적으로 저는 살림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많아요. 시를 읽고 난 사람이 유쾌해지고 살맛이 났으면 좋겠는데, 해학과 재미만으로는 안 되잖아요.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갈등하는 지점을 유쾌하고 활기 있게 만져줘야 해요."


이정록 시인이 새 시집 '그럴 때가 있다'(창비)를 펴냈다. '종달새'를 포함해 60편을 실었다. 직전 시집이 '동심언어사전'(2018)이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2016) 이후로는 6년 만이다. 천안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37년 만에 올 초 퇴직한 그가 기자들을 만나러 잠시 상경했다. 익살과 해학이라면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은 이번 시집에도 여일하지만, 이전에 비해 조금 더 깊이 어루만지는 느낌인 건 맞다.



이정록은 "이전에는 작가인 나 중심으로 언어를 응용을 했다면, 이번에는 독자가 조금 더 쉽게 가닿을 수 있는 부분들을 생각한 것 같다"면서 "훨씬 읽기가 쉬워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좀 느슨해진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초창기에는 없었는데 근자에 내 시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고 시극(詩劇)을 만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다"면서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 영역을 고려한 것인데, 역시 시는 작가의 것에서 독자의 것으로 넘어가야 된다"고 덧붙였다. 이런 작의가 대표적으로 개입된 작품이 표제작이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그럴 때가 있다')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어 끝이 없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불가의 설법을 듣지 않더라도, 이 시 한 편이면 중생은 한소식을 얻을 법하다. 핸들이 덜컹하고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 촛불이 꺼지려다 다시 살아날 때, 그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서 시인은 전율한다. 전쟁터의 젖은 눈망울과, 나오지 않는 젖을 빨다가 가까스로 잠든 아기를 떠올린다. 


이정록은 "세상 모든 생명의 고통은 다 연결돼 있다는 생각은 확연했지만,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면서 "타인의 고통을 국가와 종교로 나누어 저 고통은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시극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라면서 "큰 북이 중심이 된 국악 관현악을 바탕으로 어린이합창단 목소리가 배경으로 깔리면서 침묵과 암전, 향피리와 대금이 나오는 지점까지 나름 무대를 생각해 구성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시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라졌어도 걸쭉한 해학은 여전하다.


이정록은 어머니가 던져준 씨앗을 해학과 깨달음의 시편으로 발아시켜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젖의 쓸모'를 받았다. [조용호]


늬덜 다 크구 늬덜 아부지두 돌아가셔서 쓸모없을 줄만 알았는디 요렇게 몸뻬를 올려 입으면 내려가지두 않구 덜렁 대두 않구 참 기가 맥혀 젖퉁이가 상체인지 하체인지 헷갈렸는디 이제야 또렷하게 알겠어. 요건 필시 아랫도리여 남자 거시기는 껄떡껄떡 일평생 상체를 꿈꾸는디 여자는 안 그려 목마른 씨앗덜은 다 바닥 쪽에 있으니께 마른 젖이라두 물려야지. 뿌레기 꽉 물고 있는, 땅이란 게 원래부터 몸땡이 전체가 하체여 봐라. 미끈허지. 나두 이젠 롱다리 미쑤 코리아여. ('젖의 쓸모')


이정록의 마르지 않는 시의 젖줄인 어머니가 던져준 한마디를 붙들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배꼽을 잡게 한다. '젖'이나 '젖퉁이'라는 단어가 외설스럽기는커녕, 땅에 '뿌레기'를 '꽉' 박은 모성의 깊은 품까지 아우르며 사뭇 감동적인 뉘앙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구멍'이라는 단어는 어떤가. 


이거 말이여. 물려줘. 파스에 구멍이 났더라고. 한 장밖에/ 안 썼어. 얼른 뗐어.// 근데, 왜 닷새나 있다가 오셨어요?// 구멍 난 파스 때문에 차비 아깝게 시내 나오남? 장 볼 때 와야지. 고추밭 농약도 황 노인한테 시키려고 했더만, 머저리 같은 영감탱이가 이해를 못 해서 말이여. 빨랑 구멍 안 뚫린 거로 바꿔줘.// 살갗도 숨 쉬라고 뚫어놓은 거예요. 나이 자실수록 구멍이 중요하잖아요.// 남세스러워라. 몰랐네.//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아무렴, 구멍이 중허지. 아직은 콧구멍으로 숨 쉴 만혀. 죽을 때쯤 붙여야겄네. 이건 그냥 놔두고 구멍 없는 걸로 하나 따로 줘. ('구멍')


이즈음 세태에서 남성 문인이 여성의 신체 부위를 직접 거론하거나 연상케 하는 단어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의도와는 별개로 자칫 오해를 받을 여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어휘를 고를 때 미리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정록의 답변은 활달하다.


이정록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성적인 것을 구분 못하고, 문인들이 범죄자처럼 같이 숨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한다. [조용호]


"아니, 손을 손이라 하고 눈을 눈이라 하듯이, 엄마가 아기한테 젖 먹으라고 할 때 그때도 아기한테 그러면 이거 너무 섹시한 거니까 이거는 '응응' 먹어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아가야 젖 먹어야지, 거기에다가 밑줄 딱 치고 이거는 검열해, 그건 아니죠. 우리 건강한 삶 속에서 성을 훔치려고 하고 몰래 보려고 하고 그걸 통해서 남들을 능멸하려고 하고 이럴 때 문제가 있는 것이지, 건강한 사람들끼리 대화하고 그런 속에서 나온 신체 일부분들은 그런 게 아닌 거죠. 작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그런 성적인 것을 구분 못하고 범죄자처럼 같이 숨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성은 성이 아니고 그냥 삶이죠. 내가 과도한 성을 훔치려고 하고 성을 이용하려고 하고, 성을 나만 갖고 즐기려고 하고 팔고 이런 게 문제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신체의 일부분이고 생명이고 왕성한 그 생명의 활동을 어떤 특별한 잣대로 무너뜨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어느 도덕적 한 지점에서 장악해가지고 상대를 이기려는 도구로 사용하고 이런 건 안 되지요."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 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 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겄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 눈감아드릴 테니께/ 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 등 뒤에 바짝/ 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 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 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 다 짝 찾는 일이쥬./ 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 그짝이 지나치게 연상 아녀?/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 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팔순')


이전 시집에서 '청양행 버스 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에 출연한 할머니가 "이게 마지막 버스"냐고 묻자, 버스 기사가 '막버스' '영구버스'가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더랬다.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이 할머니, "그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줘"라고 답해 기사를 녹다운시켰는데, 이번 '팔순'에서는 기사가 할머니 무릎수술을 두고 '성장판 수술'이라고 농을 하자,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 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라고 몰아붙인다. 산문집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를 펴낼 정도로 주로 할머니들이 대부분인 시내버스에 올라 상대적으로 '젊은' 기사와의 대화를 유심히 듣곤 하는 이정록이 건져올린 해학이다. 그는 시골 노인들이 타는 시내버스를 무대로 삼아 그들의 대화만으로 채우는 연작시집까지 구상하는 중이다.


이정록은 "죽음에 대해 다정해졌다"면서 "근원적으로 죽임이 아닌 살림의 언어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조용호]


어떤 소재이든 해학으로 감싸면서 깊이를 일구는 스타일이지만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몇 편은 사뭇 무겁다. '내 몫인 어둠에게' 말한다. "저승 갈 때도 딱 하루만 더/ 시를 쓰고 유언을 고칠게요// 슬픔과 고통에게 말하겠어요/ 늘 내 몫인 어둠에게 말하겠어요/ 하루 먼저 왔구나/ 하루 먼저 왔구나." '빌뱅이 언덕'에서는 "네가 아픈 것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라고/ 밤새 날아가는 새는 늘 눈망울이 젖어 있다고" 쓴다. '몽돌해수욕장에서'는 "노래는 들이마시는 울음이라고, 내뿜는 독창이 아니라 망망대해를 삼키는 합창이라고" 울음을 삼킨다. 


교사직에서 물러나 '이발소'(이정록의 이야기 발명 연구소)를 차린 이정록은 여전히 왕성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가을에는 동시집과 그림책을 펴낼 예정이고, 직접 그림까지 그리기 위해 매주 수업도 듣고 있다. 길게는 이정록만의 언어로 사물을 재규정하는 '정록 사전'을 펴낼 생각도 품고 있다. 이번 시집의 중심을 꿰는 실 같은, 이런 시편은 어떤가.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일찍 뜬 별 하나에 눈을 맞추고/ 은하수가 흘러간 쪽으로/ 고개 들고 걸어갈 것// 먼저 이별을 준비할 것/ 땡감처럼 바닥을 치지 말고/ 상처 없이 감꽃처럼 내려앉을 것// 감꽃 목걸이처럼/ 감정의 중심에 실을 꿸 것/ 시나브로 검게 잊힐 것 ('감정의 평균')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51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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