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호 Aug 13. 2022

그리움의 긴 여로, 그리움이라는 긴 여로

조용호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아픈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다가

미라로 박제되는 기억도 있다.”


뜨겁지만 희미한 ‘기억’과

선명하지만 차가운 ‘기록’

그 사이 어디쯤에서 ‘의문사’로 휘발된 삶과

실종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떠나는

그리움의 긴 여로, 그리움이라는 긴 여로


조용호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 이나무』 등의 작품을 통해 사랑에 실패하고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주인공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 온 작가 조용호는 색 바랜 사랑과 흔적으로 남은 사랑을 그리면서도 사라진 것들의 회생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유하는 그의 소설은 정처 없되 한 번도 가라앉은 적이 없으니, 상실과 그리움의 추진체는 그에게 사랑의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떠다니네』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소설이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이후 12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작가는 이 소설이 될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진 뒤 평생 동안 그 사람을 그리워하다 그리움을 빼놓고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한 남자의 이야기. 조용호가 가장 잘 쓰는 마음이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용호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조용호는 이전의 낭만적 열정을 지닌 조용호인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세계와 조우하는 조용호다. 그리움과 상실이라는, 조용호 문학의 원형과도 같은 질료들이 현대사의 그리움과 상실로 자리를 넓힌 탓이다. 198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비극은 어느 순간 문 닫힌 비극처럼 낡음 속에 갇혔다. 조용호의 이번 소설은 야학연합회 사건을 중심으로 닫힌 문을 열고 그 시대를 다시,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미시사나 거시사로 규정되지 않는 이야기는 문학적 시선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준다. 개인과 국가, 현실과 환상, 사랑과 이별, 상실과 회복이 한데 뒤 섞인 채 다만 잃어버린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주인공은 그동안의 부유함을 만회하려는 듯 거침없이 행동한다. 만날 수 있다면 간다. 실망하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길을 나선다. 물 위를 떠다니던 작가 조용호는 이제 길 위를 걷는다.


야학연합회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역사에 대한 연장된 시선을 제공하는 소설로 읽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이후 삶도 죽음도 의문에 부쳐진 한 사람에 집중해 읽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흥미로운 추적기가 될 것이며, 사라진 사람을 성실하게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리움에 최선을 다하는 이야기로 읽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그리움에 대한 실존적 성찰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의 세계로 수렴한다. 그리워하는 일에 대한 낙관이다. 포기하지 않는 그리움이야말로 완성된 사랑이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을 펴낸 조용호.

 

사라진 하원을 찾아서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에는 1980년대 야학연합회 사건이 자리한다. 사건의 경험자인 ‘나’는 당시 실종된 인물인 하원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30년이 지나도록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이제 ‘나’ 자신이 되어 버렸다.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고 있을 때조차 ‘나’를 붙들고 있는 건 하원과 함께 보낸 기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원의 젊은 시절과 꼭 닮은 여인을 만난 ‘나’는 그녀와 함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하원의 실종 사건을 추적한다. 그녀가 실종된 시점으로부터 30년, 조사 시점으로부터는 20년이 지난 지금, 단서라고는 없는 이 무모한 추적의 길에서 하원을, 혹은 하원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기록과 기억 사이, 그리고 기억의 연대


한 사람의 시작과 끝에는 삶에 대한 기록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람은 출생신고를 통해 사회에 나타나고 사망신고를 통해 사회로부터 사라진다. 그런데 기록이 그 증명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의문사라는 상태는 사람의 존재를 휘발시킨다.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지만 죽지 않은 상태. 하원은 의문사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의 삶과 죽음을 좀처럼 ‘완료’하지 못한다. 의문사로 일축된 한 사람을 기억하는 개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을까. 한 사람의 기억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기억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잠든 기억들을 깨우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필요하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만한 선택도 불사하면서. 하원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깨울 수만 있다면 오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 눈’으로 보고 싶은 것


작품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사자의 푸른 눈’은 소설 속에서 이스파한의 3대 미스터리 중 하나의 이야기로 등장한다. 남쪽 사자상 앞에서 강 건너 북쪽 사자상의 두 눈을 보면 청록색 빛이 레이저광선처럼 뻗어 나오는데, 신기한 것은 그 사자상 주변에 반사될 만한 아무런 조명도 없고 자체 발광할 조건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으로 사자상은 무엇을 보려는 걸까. 우리가 바로 그 북쪽 사자상이라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까.


반사되는 것이라고는 없는 그 캄캄한 밤에 우리는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다가 미라로 박제되는 기억”을 품고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리워하는 존재’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청록색 빛을 띤다는 아름다운 전설로 우리 가슴속을 떠다닐 것이다.


박혜진(문학평론가)

작가의 이전글 "안중근을 그의 시대에 가두어놓을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