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와 선택의 역사
기원전 75년, 스물다섯 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수사학을 배우러 로도스 섬에 가는 길에 해적을 만났다. 해적들은 그의 몸값으로 20 탈렌트를 불렀다. 카이사르는 웃었다. "20 탈렌트라고? 나는 최소한 50 탈렌트 값어치는 한다." 50 탈렌트는 은 1.6톤에 해당되는 값이었다. 그는 정말로 50 탈렌트를 요구하게 했고, 38일 동안 함께 지내며 시를 쓰고 연설을 연습했다. 그는 잠을 잘 때는 해적들에게 "조용히 해라! 카이사르가 자려고 한다!"라고 윽박지르는 등 포로가 아니라 상전처럼 행동했고, 그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자신이 풀려나면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몸값이 도착하자 그는 풀려났고 즉시 함대를 모아 돌아가서 해적들을 전부 잡아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 일화는 카이사르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았고, 유머 감각이 있었으며, 약속을 지켰고, 자비와 잔혹함을 동시에 구사할 줄 알았다.
당시 로마는 술라의 독재가 끝난 직후였다. 원로원은 권력을 되찾았고 여전히 칼을 쥐고 있었다. 마리우스파였던 카이사르의 집안은 술라의 숙청으로 몰락했다. 그는 빚을 지며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기원전 6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 로마의 최고 사제직에 당선됐다. 이 선거에 이르기까지 그가 진 빚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오늘 나는 최고 사제가 되거나, 로마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겼다.
시간이 지나 기원전 60년, 세 남자가 만났다. 그들 중 폼페이우스는 동방을 정복한 장군이었고,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가장 부자였으며,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가장 빚이 많은 난봉꾼이었다. 이 셋이 손을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견제로 인해 자신의 동방 정복을 함께한 퇴역군인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못해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를 질투했고, 권력과 명예를 원했다. 카이사르는 전직 법무관으로서 히스파니아에서 개선식을 치를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원로원의 견제로 인해 명예를 포기해야만 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일단 민간인이 되어야 했는데, 개선식은 군권을 가진 공직자여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부재중 출마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비밀 협정을 맺었다. 역사는 이를 제1차 삼두정치라고 부른다. 원로원에게 견제받는, 실력 있는 신참자들의 사적 야합이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당선됐고,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통과시켜 줬으며, 크라수스의 세금 감면안도 밀어줬다. 그리고 그들끼리 밀고 당겨주며 차기 집정관 자리도 차지했다. 대신 그는 갈리아 총독직을 얻었다. 정확히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 그리고 나중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까지. 5년 임기였다. 원로원은 원래 행정직인 '산림과 가도의 총독'에 카이사르를 임명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그것을 수락하면 자신의 정치적 경력도 그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 총독직은 곧 군대였고, 군대가 없는 총독직은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임기 끝에 찾아올 법적 공방과 몰락을 피하기 위해 갈리아를 선택했다. 갈리아는 로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원로원은 즉각 개입할 수 없었다.
기원전 58년 봄,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떠났다. 명목은 헬베티족을 막는 것이었다. 헬베티족은 스위스 일대에 살던 켈트 부족인데, 갑자기 전 부족이 마차를 불태우고 갈리아 땅으로 가려했다. 문제는 그 길이 로마 동맹 부족의 영토를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를 빌미로 개입했다. 그는 집정관 임기 중에 징집했던 추가 군단과 함께 헬베티족을 격파했고, 그다음에는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를 몰아냈으며, 그다음에는 벨가이족을, 그다음에는 베네티족을... 8년 동안 그는 갈리아 전체를 정복했다.
왜 헬베티족은 움직였을까? 게르만은 왜 헬베티족을 압박했을까? 이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 중요한 건 카이사르가 이 혼란을 기회로 봤다는 것이다. 그는 정복하면서 빚을 갚았고, 빚을 갚으면서 더 정복했다. 그의 군단은 충성스러웠다. 그는 병사들에게 후하게 나눠줬고, 병사들은 그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갈리아 전쟁의 마지막 해,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이름의 젊은 족장이 갈리아 부족들을 모았다. 그는 로마군의 보급을 끊기 위해 갈리아 땅을 스스로 초토화시켰다. 갈리아 전역비 카이사르를 배반했고, 카이사르는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실수를 했다. 계속 버티면 카이사르는 임기 종료로 돌아갔을 테지만,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대군을 이끌고 정면충돌한 것이다. 대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라는 요새 도시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하고 그 포위망 바깥에 또 다른 포위망을 만들었다. 안쪽 성벽은 베르킨게토릭스를 가두기 위한 것이었고, 바깥쪽 성벽은 갈리아 구원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는 6만 명의 군단병을 이끌고 25만 명의 갈리아 지원군을 격파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 앞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갈리아 전쟁의 끝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정치적 위기상황에 빠져있었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너무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갈리아 총독이 되어 전쟁을 시작하면서 카이사르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 되었다. 합법적인 속주 방어와 동맹 보호 수준으로는 계속되는 갈리아족과 게르만 이주로 인한 충돌을 뿌리 뽑을 수 없었기에, 그는 갈리아 전역을 누비며 적들을 박살 냈다. 카이사르의 군공은 쌓여갔고, 이와 비례해서 원로원의 경계 수준도 높아졌다. 심지어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며 목숨을 잃었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게 포섭되어 삼두정치도 끝나버린 상황이라 임기 연장도 불가능했다. 만약 베르킨게토릭스가 1년 더 버텼다면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남아서 군대를 불법적으로 이끄는 반역자가 되었거나, 동맹 갈리아 부족들의 배반으로 쌓은 군공을 모두 잃은 채 돌아가 숙청되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 임기 직후 집정관에 재취임하고자 했고, 남은 임기동안 원로원과 협상을 계속했다. 민간인이 되었다가 출마하는 건 내게 위험하니, 폼페이우스에게 해줬던 것처럼 부재중 출마를 하게 해 달라. 안된다고? 좋다, 내 휘하의 군단도 해산하겠다. 대신 내 안전을 위해 폼페이우스의 군단도 같이 해산하자. 하지만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제안을 전부 거부하고, 임기종료 전에 즉시 군단을 해산하지 않는다면 반역자로 간주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원로원 최종 권고"가 집행되었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밤, 루비콘 강. 카이사르는 망설였다. 원로원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혼자 돌아오라. 하지만 그건 자살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건 법정이 아니라 처형대였다. 그는 운명의 주사위를 던졌다. 내전이 시작됐다.
카이사르는 두 개의 군단을 이끌고 남하했다. 당시 본토에서 카이사르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가 전장에서 집필한 갈리아 전쟁기가 로마 시민들을 그에게 동조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가 로마에 접근하자 원로원은 재산을 빼돌려 남하했고, 이내 본토 전역이 카이사르에게 넘어갔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이탈리아를 버리고 그리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쫓아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맞붙었다. 폼페이우스는 병력이 두 배 많았지만 패퇴하고 이집트로 도망쳤고, 파라오는 그의 목을 베어 카이사르에게 선물로 바쳤다. 이집트를 떠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갔다.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가 내전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제라에서 그를 격파했다. 전투는 4시간 만에 끝났다. 로마로 보낸 보고서는 세 단어였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비상시 6개월 한정 직책이었다. 종신 독재관은 모순어법이었다. 그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달력을 고치고, 원로원 의석을 900명으로 늘려 갈리아 부족장들을 앉히고, 토지를 재분배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복수를 천명하며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이루어진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는 쓰러졌다. 쓰러진 곳은 폼페이우스 동상 바로 앞이었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우리는 질문을 시작한다.
기원전 121년, 한무제는 흉노를 칠 결심을 했다. 흉노는 오랫동안 황하 유역을 약탈해 왔고, 한나라는 결국 오르도스 초원을 쳤다. 흉노는 패배했고, 서쪽으로 밀려났다. 흉노가 서진하자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압박받았다. 그들은 다시 서쪽 초원의 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를 밀었다. 사르마티아 문화는 기원전 2~1세기 흑해 북안에서 서쪽으로 확산된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사르마티아의 서진은 게르만 부족들을 압박했다. 게르만은 동쪽에서 밀려오는 기마 유목민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팽창했다. 수에비족, 킴브리족이 로마 변경을 위협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중반, 헬베티족이 게르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갈리아로 이동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바로 그 순간 갈리아 총독이었다.
유라시아 초원은 하나의 연결망이었다. 한쪽 끝에서 일어난 충격은 반대쪽 끝까지 전달됐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만난 것은 단지 갈리아 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원 전체의 압력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 8년간 카이사르와 함께 싸운 병사들은 로마가 아니라 카이사르에게 충성했다. 그들은 갈리아의 진흙탕에서, 게르만의 숲에서, 브리타니아의 해안에서 함께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줬고, 승진을 약속했으며, 위험을 함께 나눴다. 루비콘을 건널 때 그를 따라온 군단에게 원로원의 명령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갈리아 전쟁기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 선전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직접 자신의 전쟁을 기록했다. 모든 문장은 카이사르가 현명했고, 용감했으며, 자비로웠다고 말한다. 이 책은 로마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알렉산드로스와 비교했다. 원로원은 그를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적대로 이어졌고, 적대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갈리아 전쟁 없이 카이사르가 독재자가 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갈리아는 그에게 독재자가 되기 위한 모든 도구를 제공했다. 하지만 상황을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공화정 자체가 이미 병들어 있었다. 병의 시작은 그라쿠스 형제였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법을 제안했다. 귀족들이 독점한 공유지를 빈민에게 재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거부했다. 티베리우스는 민회를 통해 법을 통과시켰다. 원로원은 그를 "왕이 되려 한다"라고 비난했고, 폭도를 동원해 그를 광장에서 때려죽였다.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원로원이 시민을 살해한 순간이었다. 10년 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이 되었다. 그는 형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곡물법, 도로 건설, 동맹시 시민권 확대를 제안했다. 그는 부유한 상인들이었던 기사 계급을 원로원에서 떼어내려 했고, 이탈리아 동맹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려 했다. 원로원은 다시 공포에 질렸다. 기원전 121년, 원로원은 이후에 카이사르에게도 사용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했다. 이것은 사실상 계엄령이었다. 권고밖에 할 수 없는 원로원이 초법적 권한을 휘둘러 가이우스와 그의 추종자 3000명을 학살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 공화정은 변했다. 원로원은 "비상대권"을 정당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정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폼페이우스의 군벌화, 그리고 카이사르의 독재는 모두 이 흐름 위에 있었다. 공화정의 제도는 남아 있었지만, 제도를 지탱하던 합의는 무너졌다. 원로원은 더 이상 권위가 없었다. 군대를 가진 자가 권력을 가졌다. 카이사르는 이 구조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만인지상의 자리를 노렸는가? 갈리아 전쟁은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와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 갈리아를 정복한 것이다. 루비콘을 건넌 것도, 파르살루스에서 싸운 것도, 종신 독재관이 된 것도 모두 그의 계획이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권력에 굶주린 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상황에 떠밀렸다. 그는 정치적 성공을 위해 갈리아에 갔고, 때마침 갈리아는 흉노족 이동의 여파로 극심한 혼란에 접어들 시점이었다. 갈리아에서 필요 이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질투를 샀고, 원로원이 기소하려 하지 않았다면 루비콘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타협했다면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신 독재관도 공화정을 개혁하기 위한 도구였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야망이 있었고, 동시에 상황이 그를 밀어붙였다. 그는 기회를 보는 눈이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했고, 규칙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규칙을 깼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빚을 갚기 위해, 정적을 이기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결국 공화정을 죽였지만, 공화정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독재자가 되었지만, 독재는 이미 로마의 문법이 되어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죽은 순간부터, 술라가 로마로 진군한 순간부터, 로마는 이미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스물세 번의 칼이 들어갔을 때, 카이사르와 함께 공화정도 죽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공화정을 구하려 했지만, 그들이 죽인 것은 공화정 그 자체였다. 칼로 독재를 끝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칼은 더 큰 독재를 불러왔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기까지는 1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사는 개인의 야망과 구조의 압박이 충돌하는 장소다. 카이사르는 그 충돌 지점에 서 있었던 남자였고, 그는 선택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