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은 어떻게 사고를 만드는가
상상을 한 번 해보자. 분홍색 코끼리와 초록색 코끼리가 좌우에서 천천히 걸어서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분홍색 코끼리는 등에 노란색 새끼 코끼리를 태우고 있으며, 노란색 새끼 코끼리는 연지곤지를 찍은 채 점프해서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착지한다. 그리고 초록색 코끼리는 무지개처럼 몸 색깔이 바뀌고 있는데, 뒷발로 서서 들썩들썩 어깨를 움직이며 걸어오다가 물구나무를 선다. 배경은 해 질 녘 노랗게 물든 사파리고, 저 멀리서 수사자가 코끼리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람소리는 마른 풀잎을 스치며 쏴아아 하고 들려오며 원숭이들이 우끼끼끼끼 하며 소란 피우고 있다. 마침내 운석이 떨어져 모든 게 폭발한다. 쿠오오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의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진다. 물씬 풍겨오는 탄내가 느껴진다. 그리고 휘날리는 재의 쓴맛이 올라온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의 머릿속에 무엇이 그려지는가? 오감이 생생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일부 묘사는 실감 나게 떠오르지만 일부 묘사는 그저 글로만 이해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지만 내용은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 그것을 심상(心像)이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형상 말이다. 영어로는 image라고 하지만,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모두 심상으로 구현이 가능하다. 인간의 오감 모두가 그 대상인 것이다. 만약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면 그것 또한 심상의 대상이다.
한때 과학계에서 이러한 심상은 인정되지 않기도 했다. 심상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관련 연구가 허상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상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다루어져 왔다. 대략 2천 년 전부터.
모든 학문의 조상격되는 인물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상을 사고의 기반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판타스마 가설이다. 그는 인간의 감각이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일종의 그림 같은 판타스마를 구성하여 이성적 사고와 감각적 체험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 계열의 심상 구현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머릿속에서 심상을 구현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색하여 논리를 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임마누엘 칸트 또한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심상을 셰마, 즉 도식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각의 연결수단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셰마가 있음으로 인해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하며, 만약 셰마가 없다면 수학적, 과학적 개념의 구성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먼 과거에 사람마다 심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의 과학자들이 심상을 부정한 원인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1800년대 후반, 영국 과학자인 프랜시스 갈톤은 아침 테이블 실험을 통해 사람마다 심상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조사하였다. 사람마다 아침식사 테이블을 떠올리라는 말에서 다른 형태의 심상을 보인다는 것이 근거였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정적인 테이블 상황을 떠올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침 식사 때 가족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영상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갈톤의 발표를 들은 과학자들 중 다수는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아침식사 메뉴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그 모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갈톤의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다!'
갈톤의 실험 이후를 행동주의 쇠퇴기라 부른다. 갈톤의 주장을 부정한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을 시작으로, 심상 없는 사고가 가능한 사례들이 보고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심상은 외부에서의 관측이 불가능했기에 점점 등한시되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20세기 중반 로저 셰퍼드와 재클린 매츨러의 정신적 회전 실험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쯤에서 정신적 회전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알아보자. 셰퍼드는 피실험자에게 두 개의 입체 이미지를 제시하고 같은 것인지 질문했다. 여기서 제시된 이미지는 거울에 비친 모습일 수도 있고 그냥 어느 정도 회전한 모습일 수도 있다. 피실험자들은 입체 이미지가 많이 회전했을수록 두 이미지가 같다고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소요시간은 대략 60도 회전당 1초 정도. 이 실험으로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물체를 떠올리고 회전시키도 한다는 것이 정량적으로 측정되었다. 이 실험은 사이언스지 표지에도 실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사고가 전적으로 언어에 의존한다는 행동주의의 교리를 박살 내는 증거였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사례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아침 테이블 실험에 반박한 과학자들처럼 심상이 구현되지 않거나 그 기능이 단순하여 회전하는 물체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회전하는 물체의 심상을 떠올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아판타시아(Aphantasia)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시각적 심상 대신 대안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했기에, 엄밀한 실험 없이는 심상 부정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심상의 존재 여부는 이후 뇌 mri 촬영으로 근거가 공고해졌다. 심상 구현시 뇌에서 시각피질이 활성화되는 보편적 현상이 관측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심상의 존재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제 이 글의 도입부를 다시 보자. 당신은 어떠한가? 저러한 테스트를 VVIQ 테스트라고 하며, 점수에 따라 어느 정도의 심상 구현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한다. 안심하시라. 여기에서의 IQ는 심상 설문(Imagery Questionnaire)의 두문자어다.
심상의 존재 여부와 그 형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 장면을 생생한 3D 영화처럼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단어의 나열로만 이해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이는 지능의 우열이 아니라 인지 방식의 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판타스마를 사고의 기반으로 본 것은 그 자신이 시각적 심상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갈톤의 실험을 부정한 과학자들은 심상 없이도 완벽하게 사고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둘 다 훌륭한 사상가였지만,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교육 현장을 생각해 보자. 만약 수학 교사가 기하학을 설명할 때 오로지 시각적 도형 회전에만 의존한다면, 아판타시아를 가진 학생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모든 설명을 언어적 논리로만 풀어낸다면, 시각적 심상에 강한 학생은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창작 분야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가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보고' 그것을 글로 옮기지만, 어떤 작가는 단어와 리듬의 조합으로 세계를 구축한다. 둘 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모두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심상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같은 설명을 들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며, 더 나은 소통과 협력의 토대가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분홍색 코끼리, 초록색 코끼리, 운석의 폭발. 당신이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당신만의 인지적 지문이다. 중요한 것은 심상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 인정에서부터, 진정한 이해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