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이름의 착각

by 헤론 베누

시간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공간에 대한 이해는 직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점, 선, 면, 부피가 바로 그것이다. 0차원에서 3차원에 이르는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원시인들도 쉽사리 감지할 수 있었다. 딱히 공간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있는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달랐다. 공간과 구분된 별도의 개념. 눈에 보이지 않고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일관적으로 흐르는 사건의 변화. 그 정도로만 이해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를 동시에 관측할 수 있었지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관측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간은 공간보다 신비로운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러한 시간이 공간처럼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라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아인슈타인 이후였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학에서 광속불변과 그로 인한 시간의 흐름 차이를 발견했고, 더 나아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시간은 여전히 공간과 달리 비대칭적이고, 직관적인 이해에서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엄밀하고 정량적인 과학적 고려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이야기를 조금 돌아서 가보자. 현대물리학의 양대 축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은 우주의 시공간에 대해 다루며, 다루는 규모가 클수록 고전역학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반대로 양자역학은 극도로 작은 규모의 일을 다루며,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 수준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우주에는 온갖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현상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블랙홀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블랙홀은 막대한 질량으로 시공간을 왜곡시켜 극단적인 상대론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하지만 블랙홀의 본체는 그 중심에 아주 작은 규모로 존재한다. 양자역학이 전문인 스케일이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합치면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둘을 합치면 무한대가 튀어나온다. 컴퓨터로 따지자면 치명적 에러로 소프트웨어가 강제종료되는 상황인 것이다. 왜냐하면 두 이론의 기본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 값을 입력하는 꼴이라고 해야 될까?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공간이 완전히 연속적인 곡선을 그린다고 본다면, 양자역학에서는 그래프를 확대해 보니 계단식으로 픽셀이 찍혀있더라 하고 말하는 셈이다. 중력이 작용하는 방식조차 두 이론은 다르게 서술한다. 상대성이론이 '중력은 시공간이 왜곡된 결과다'라고 한다면 양자역학에서는 '두 개체가 중력자라는 입자를 주고받아서 영향을 준 결과다'라고 말한다. 아직 중력자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상의 입자라는 사실은 지금은 넘어가자.

이제 상대성이론이랑 양자역학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게 시간이랑 무슨 상관이냐?라는 질문이 나올 시점이다.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갈 때라는 얘기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두 이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몇 가지의 양자중력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게 '나는 세상이 고리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좋겠어 vs. 난 끈모양이 좋은데?'로 나타나는 끈이론과 루프 양자중력 이론이다.

아직 이 중에서 어느 가설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모른다.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서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일지도. 하여튼 이러한 양자중력 가설들은 특징적인 모습을 보인다. 바로 '시간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일단 양자역학을 한번 더 자세히 보자. 양자역학에는 파동함수라는 것이 있다. 어떤 입자가 어디에 있는가를 설명하는 수학적 도구다. 특이한 것은, 파동함수는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태가 중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명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이것을 말한다. 상자 속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외부의 관측자가 관측을 하면서 한 가지 상태만이 남게 된다. 상자를 열어봐야 비로소 고양이가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물리학자들의 고차원적 상호 디스전을 위한 복잡 미묘한 배경과 자질구레한 세부설정이 뒤따르고, 언급되는 이유도 이 글의 논지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중요한 것은 고양이와 함께 박스에 들어가 꾹꾹이를 받는 관측자가 아니라, 밖에서 지켜보는 관측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상자 밖의 외부 관측자는 중첩된 상태를 알고, 측정을 위해 관측을 하고, 파동함수의 수렴 결과를 확인하게 되는 일련의 흐름을 갖는다. 앞뒤 사건의 변화를 관측하여 사건이 순서대로 배열되는 것이 곧 시간의 경과를 말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양자중력 이론은 다르다. 양자중력 이론이 다루는 건 입자 하나가 아니다. 중력이 있는 곳, 바로 이 우주 전체다. 바로 앞에서 시간은 일련의 변화 흐름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 관측자가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측정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다루는 대상이 우주 전체라면? 시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외부 관측자가 필요해진다. 즉, 누군가가 우주 밖으로 나가서 관측한 뒤 결괏값을 가지고 우주 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롭게 우주 밖에서 이 우주에 대한 메타 물리학을 연구하는 존재라면 이 우주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만약 우주 밖에서 움직이는 시계를 보고 온 존재라면 차라리 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신은 전지전능하신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님 이외의 존재일 수가 없다.

스티븐 호킹은 이것을 이렇게 간단히 설명했다. '남극에는 남쪽이 없다.' 지구상의 누군가는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남쪽의 시작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남쪽의 시작점에 닿을 수 없다. 그저 어느 지점을 지나고 계속 걸어가면 다시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지구 전체의 기후가 같다면 그것조차 모를 것이다. 이를 외부 관측자 시점에서 보자. 국제우주정거장의 우주비행사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남극이라 찍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자전축이나 자기장 측정값 등의 값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지구상의 탐험대원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우주정거장의 우주비행사가 임의의 남극점을 알려주려고 전화를 걸어도 탐사대원에겐 전화기가 없다. 이를 무경계 제안 또는 무경계 우주론이라고 한다. 우주는 구형이고, 어느 동요에서처럼 자꾸 걸어 나가서 온 세상 어린이들을 다 만나고 오더라도 바깥으로 가는 경계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이 무경계 제안, 무경계 우주론이라는 것은 '혹시나?'에서 시작되었다. 호킹은 기존의 방정식들을 계산하면서 답이 없는 문제들과 마주쳤다. 호킹 복사, 경로적분, 재규격화 등등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 들어보지도 못할 문제들 말이다. 호킹은 어느 날 방정식에 넣을 시간을 허수로 해볼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는 기존 양자역학 방정식에서는 지안카를로 위크라는 사람이 방정식을 풀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으로 도입한 '위크 회전'이라는 트릭이다. 위크 회전을 도입하면 복잡한 양자역학이 비교적 단순한 통계역학으로 변하는 효과가 있다. 호킹은 '나도 계산할 때 결과가 터지는데 위크 회전을 도입해 볼까?'라는 발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마법처럼 방정식이 손쉽게 풀리는 것이 아닌가?

허수 시간을 도입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xy 좌표를 그려보자. 가로축인 x축은 실수 시간, 그러니까 우리에게 친숙한쪽인 시간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사건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세로축인 y축이 허수 시간이다. 이 좌표계에서. 사건들은 x축에만 배치되어 있으며, x축을 따라 움직이면 우리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y축을 따라서 세로로 이동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x축과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꺼번에 모든 사건을 마주치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화로 비유하자면, 실수 시간에서는 관객들이 광고부터 시작해서 엔딩 크레딧까지 순차적으로 보게 되지만, 허수 시간에서는 영화 필름을 죄다 풀어서 한 번에 시야에 넣는 셈이 된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이던 것이 일종의 공간을 형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다시 우주로 옮겨가보자. 우주는 빅뱅이라는 특이점이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허수 시간을 도입한다면 시간은 특이점을 잃게 된다. 공간이 원래부터 둥글게 말려서 구형이 되어있는 것처럼, 시간도 원래부터 둥글게 말려있는 일종의 새로운 공간축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시간은 착각이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시간은 없다. 4개의 공간차원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시작된 적도 없고 흐른 적도 없다. 그저 우리의 차원적 한계에 갇힌 직관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우주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므로 우주 안에 있는 존재가 절대적 관측자라는 지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련한 우리 인간들은 우주 안에 갇힌 불완전한 관측자로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라는 착각은 그러한 우리의 불완전하지만 버릴 수 없는 지팡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우리가 의지해서 걸어 나가야 하는 동반자다. 우리가 '지금'을 경험하는 까닭도, 무시간의 우주를 시간이라는 언어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방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