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저녁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 놓은 식탁 위에는
아들의 물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어폰을 낀채 통화 중인 듯했다.
나는 괜히 발검을을 멈췄다.
문 앞에 서는 습관은 이제 조금 고쳐졌는데도
그날은 왠지 멈춰 섰다.
노크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엄마."
문이 먼저 열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왜?" 하고 돌아섰지만,
심장은 조금 빨라졌다.
아들은 문틈에 기대 서 있었다.
예전처럼 쪼르르 뛰어나오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닫혀 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할말이 있어"
그 말이 왜 그렇게 크게 들리던지.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물었을 것이다.
학교는 어땠는지, 친구는 왜 그랬는지,
무슨 일인지... 하지만 그날은 기다렸다.
아들이 입을 열기를, 조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예전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엄마, 나 요즘 좀... 이상해."
그 말이 아주 작은 고백처럼 떨어졌다.
친구와의 일, 괜히 예민해지는 감정,
이유 없이 화가 나는 순간들.
말은 더듬거렸고 이야기는 정리되지 않았지만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들었다.
그 아이가 이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지 생각하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문은 내가 두드려서 열린 게 아니었다.
기다렸기 때문에 열린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두드려 왔다.
"괜찮아?", "말해봐." "엄마한테는 다 말해도 돼."
그 말들이 혹시 부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 들었다.
아들은 말을 마치고 나를 힐끗 보았다.
조언을 기다리는 눈빛일까?
혼날까 걱장하는 눈빛일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있어."
그게 전부였다. 해결책도, 인생 강의도,
엄마의 경험담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만
건네고 싶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그랬어?" 나는 웃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래."
그 말에 아들이 조금 웃었다.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 웃음이 우리를
다시 이어 주는 끈 같았다.
그날 밤, 방문은 다시 닫혔다.
하지만 이상하게 쾅!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닫힌 문이 더 이상 벽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문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것이라는 걸
그날 알았다.
중요한 건 항상 열려 있는 상태가 아니라
열 수 있는 믿음이라는 걸.
아이를 키우며 나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다.
노크를 하며 허락을 기다리는 사람.
예전엔 내가 마음대로 들어가던 공간이었는데,
그런데 어쩌면 그게 성장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고, 엄마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그 문이 열리던 날, 나는 알았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사라진 게 아니라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라는 걸.
손을 잡고 걷는 거리로...
때로는 앞서가고, 때로는 뒤따라가며
같은 방향을 보는 거리로..
아들은 아직 완전히 어른이 아니고,
나는 아직 완전히 초연한 엄마가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문이 닫혀도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한 번 배웠으니까..
그리고 나는 안다.
언젠가 아들이 더 먼 세상으로 나가도
그 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 사이 어딘가에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하나의 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