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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씨 Writer C Oct 25. 2022

28살 청년이 공사현장에서 배운 인생의 법칙 10가지

4. 직급, 상황 뒤에 숨지 마라(2)

<3. 죄송하다는 말은 정말 죄송할 때만 해라>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현장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석가산 대체품을 적용해서 시공하는 아파트 현장이었다. 당시 현장에서는 대부분 나를 대리로 알고 계셨지만, 실제 직급은 사원이던 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디서든 회사 대표님이 실수로 나를 '0 대리'라고 부르시곤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업체들도 내 직급을 대리로 오해할 때가 많았고, 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팍팍한 현장에서 도긴개긴이지만 '사원'보다는 '대리'가 그나마 덜 무시받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준공이 얼마 남지 않은 아파트였고, 공사가 지연되어서 모두가 예민한 상태였다. 나는 큰 골조공사가 마무리 된 후, 마감공사에 투입되었다.


내가 현장에 상주하며 책임자로 나와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바쁜 대표님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대표님은 다른 일을 병행하시니 갑작스러운 일들은 전화로 여쭤보고 처리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도 나름 적지 않은 부분을 내가 챙기고 있었는데, 업체 간 소통은 주로 대표님이 정리해주셨다. 아무래도 아파트 현장은 여러 업체들이 급박한 일정 속에 부대끼며 일을 하다 보니, 업체들끼리 소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진행하던 석가산 대체품만 해도 4~5개 업체가 관련된 일이었다.


아파트는 준공 전에 발주처에서 진행하는 점검들이 있는데, 공사 막바지에 진행하는 현장 확인이라 보면 된다. 이 점검 시기에 이미 공사가 거의 완료되는 현장도 있고, 정말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장도 있다. 해당 현장은 후자의 경우였고, 이 상황 속에 우리의 후속 공정을 진행해야 하는 업체가 있었다. 그 업체도 점검에서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진척이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 업체는 일정 관련으로 우리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주었다.




그리고 점검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출근 직 후 해당 업체 담당자에게 불려 가 20분간 '혼나는' 경험을 하게 됐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어떤 내용의 얘기들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가지 정도만 기억나는 것 같다. 두 손을 모으고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던 내 모습과, 그래도 '타 업체 직원인데 나한테 이런 말들까지 해도 되나' 싶었던 마음.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건의 발단은 이랬을 것이다. 그 담당자가 아마도 무언가 조율을 해달라고 내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내가 정할 수 없으니 대표님께 전달드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대표님은 내 얘기를 듣고 당신께서 정리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적으로 그 담당자의 간절한 요구가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묵살됐었나 보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20분간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런 말들을 나한테 해도 되나'

'아 근데 심정이 이해는 가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감정적으로 정말 폭발한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의 문제다

 이 날 퇴근하면서 생각했다. 직급이나 상황 뒤에 나 자신을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당시에 나는 내가 그 일을 챙기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대표님이 그러라고 했고, 게다가 나는 사원이었다.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내 잘못이 아니니 마음을 털어버리라는 말을 들었겠지. 엄밀히 일의 귀책사유를 따진다면 나는 죄가 없다. 그런데, 내가 20분간 비정상적으로 혼이 난 건  더 이상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게 해를 끼친 일이 되는 것이다.


잘못이 있고 없고의 문제와 내게 해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엄연히 다른 얘기다. 대표님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욕먹는 걸 지켜주시지는 않지 않았는가. 사무실에서 직장상사의 품에 있는 것과 현장에 혼자 나가 있는 것은 정말 다르다.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지.



그 뒤로는 이와 비슷하게 내가 직장상사에게 이양한 일이 있다면 스스로 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들을 때 내가 먼저 판단을 한다. 이 얘기가 타당한지 혹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 뒤로 다른 이에게, 특히 직장 상사에게 얘기를 전달할 때 내 생각을 같이 전달하고, 최소한 직장 상사의 의중을 물어본다. 이 일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전략적으로 묵살할 것인지. 그래야 내가 지속적으로 직장 상사에게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팔로우업을 하면서 푸시를 하든, 묵살을 할 경우 상대측 업체에서 나올 반응에 대비를 하든 할 것 아닌가.


직급이 낮을 때 대부분 중요한 일의 결정은 다른 직급이 높은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이 일을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겠지라며 손 놓고 있는 것과 내 나름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 대비하는 것은 다르다.


특히 본인이 낮은 직급에도 업무의 최전선에 있다면, 그래서 나와 같은 경우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잦다면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멘탈케어에는 좋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이만 믿고 모르쇠 하는 것은 거위가 눈만 가려놓고 '내가  보이겠지'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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