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작가의 '곰팡이꽃'이 생각나는 날
"술 트렌드를 어디서 알 수 있는지 알아요? 쓰레기통이에요.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가보면, 요즘 사람들이 무슨 술을 좋아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니까!"
얼마 전 주류업계에 영향력 있는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에 쓰레기장에 가보면 빈 병들이 한 데 모여 있다. 소주병, 맥주병, 막걸리병 등등.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1999년에 동인문학상을 받은 하성란 작가의 소설 <곰팡이꽃>이 생각난다. 쓰레기 봉투를 집으로 끄집고 가서 파헤친 남자는 쓰레기를 통해 이웃을 파악했다. 물론 이 소설의 결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소 다르지만, 재활용 쓰레기장 아이디어는 제법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무수한 와인병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 몇년 전만 해도 와인병을 내놓는 집이 우리집 밖에 없더라니까. 그때는 그게 참 어색했는데 말이지."
한 분은 또 이런 말을 거들었다. 와인이 지금처럼 우리 곁으로 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엔 고급술이었는데 요새는 1만원대 와인을 두고서도 굉장히 오랜 고민을 해야 한다. 너무나 좋은 품질의 싼 와인들이 널려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혼술러들은 편의점에서 와인을 휙 집어다가 홀짝홀짝 마시곤 한다. 아파트 단지에는 소주, 맥주병이, 오피스텔에는 와인이나 양주병이, 또 사는 곳에 따라도 차이도 날테다. 조금 어려운 동네는 아마 저렴한 술병이, 잘 사는 동네는 고급스러운 술병들이 놓여 있겠지. 논둑에 와인병이 나뒹구는 걸 보기 어려운 것처럼 삶의 환경, 터전 따라 마시는 술도 참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고 오피스텔 재활용 쓰레기장을 찬찬히 관찰하고 있자니, 와인병이 참 많고 그중에서도 요새 내추럴 와인병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리고 4병에 1만원 수입 맥주는 전보다 좀 줄어든 거 같기도 하다. 대신 잭다니엘이나 아구아, 말리부 같은 타 먹기 좋은 술이나 토닉병은 또 많다. 위스키병도 보인다. 코로나 19 이후로 값비싼 술에도 주저 없이 지갑을 꺼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나보다. 물론 이게 정확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무의미한 건 또 아닌듯 싶다.
"생각해보세요. 집에서 소주만 마시는 사람들 몇 안돼요. 소주도 사람들이 모여야 마시지. 혼자 있으면 다 즐길 수 있는 술을 마시게 되거든요. 한 번 술 맛을 들이니까 또 소주 먹기가 싫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막상 우리술 비중은 아직도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그렇게 많이 보이진 않았다. 쓰레기장에서 "와 진맥소주네, 댄싱사이더네! 나루생막걸리네! 경성과하주네!" 이렇게 감탄해보고 싶은데 아직은 많이 발견치 못했다. 요새 편의점에도 복순도가 손막걸리며, 나루생막걸리며, 달빛유자며 전통주들이 제법 들어와있는데도 그렇다. 언제쯤이면 와인병이 쌓인 것 만큼 우리술을 볼 수 있을까. <원소주> 공병처럼 리셀하기 위해서 아껴놓은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홈술, 혼술 하는데 우리술 비중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홈술, 혼술하기 좋은 맛 좋은 우리술을 알리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