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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호 Sep 12. 2023

공간의 재발견 : 달강

5부 전통을 소환할 권리 


  40대는 달리기가 취미였다. 계절마다 마라톤대회를 신청하고 일정에 맞춰 운동하는 루틴을 유지했다. 50대부터 달리기에서 걷기로 종목을 바꿨다. 인간의 관절도 수명이 있다는 의사친구의 조언이 이유였다. 정해진 시간에 하체운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운동은 조깅이 최적이다. 나이가 들면 포기할 것이 많아진다. 지금도 운동장을 보면 숨이 바닥에 찰 때까지 내달리는 상상에 빠져든다.    


  지하철 삼각지역에서 내린다. 미군부대를 오른편에 끼고 숙대입구역 방향으로 직진한다. 남영동 4거리에서 우측 언덕방향으로 오른다. 잠시 후 용산고등학교 정문과 마주친다. 내가 졸업한 학교다. 여기서 대각선 방향의 오르막길을 계속 서행한다. 후암동 골목길을 걸으며 옛집의 정취를 응시한다. 이윽고 등장하는 후암초등학교 옆 돌계단을 오르면 남산도서관 횡단보도가 나온다. 


  위 문단은 평소에 즐기는 서울산책길이다. 식사는 오전이면 원대구탕, 오후에는 명동교자에서 주로 해결한다. 남산 둘레길과 만나기 위한 짧은 여행길이다. 남산에서 내려와 명동에 도착하면 중고물품점이 즐비한 회현지하상가 방문은 필수다. 체력이 닿으면 명동에서 종로통으로 이동해 서울레코드와 세운상가 구경을 겸한다. 강북의 요지를 가로지르는 위 코스를 10년 넘게 반복했다. 


  걷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보행길에서 가장 아끼는 공간은 <달강>이다. 달강이라, 무슨 의미일까. 이는 부사 ‘달가당’의 준말로 ‘달강이다’라는 동사로 변하면 작고 단단한 물건이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자리잡은 이곳은 비밀로 간직하고픈 멋들어진 한옥카페다. <달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충무로역 근방에 위치한 한옥마을 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도심에 터를 잡은 한옥마을은 명동에 숙소를 잡은 외국관광객의 주요 방문지다. 걷다 보면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과 마주친다. 한옥을 포함한 오래된 건축물에서는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하회마을에 가면 병산서원에 들려야 한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병산서원을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고 극찬했다. 한옥마을에서는 다양한 전통문화공연이 열린다.  


  20세기 후반부터 마구잡이식 고층건물이 도심에 들어선다. 여백의 미를 자랑하던 한옥이 무차별적으로 사라졌다. 주거의 편리성을 앞세운 개발붐이 만들어낸 콘크리트 디스토피아의 현장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는 강교수(김의성 역)는 수업시간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이라고. 


  <달강>은 마당이 있는 휴식공간이다. 천연잔디가 아닌 인조잔디를 깔았지만 야외벤치에 앉아 한옥의 매력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자리에서 담화를 나누는 이도 있지만 <달강>에 가면 한옥 마루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는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누구와 대화를 나눠도 느린 말투로 서로를 자극하지 않게 된다. 단층 가옥 위로 보이는 하늘과 나무숲이 마음을 다스려주기 때문이다.  


  따가운 햇볕이 부담스러운 여름을 제외하고 <달강>을 찾는다. 봄이 오면 카페건물을 에워싼 벚꽃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의 기시감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가을단풍에 어우러진 <달강>의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와 다름없다. 겨울 강추위에도 <달강>에는 한옥 특유의 온기가 흐른다. 인간과 자연을 함께 고려한 건축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비가 내리는 날은 실내 창가자리도 나쁘지 않다. 카페에는 책을 비치하고 있어 혼자 방문한 이에게 독서의 기쁨을 덤으로 준다. 커피 말고도 다양한 전통차를 판매하는데 나는 국화차를 주로 시킨다. 화려한 맛은 없지만 은은하게 퍼져가는 잔향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인간의 거칠고 날 선 감정을 변화시킨다. <달강>에서는 큰 목소리로 주변을 힘들게 하는 이가 적은 편이다. 


  한국의 산은 거창한 풍경을 연출하지 않는다. 서울시민이 찾는 남산 역시 마찬가지다. 산의 기운을 고이 품은 한옥마을의 <달강>은 평생을 같이하고픈 공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져 간 청춘과, 멀어져 간 인연과, 적멸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달강>에 저녁이 찾아왔다. 선선한 바람이 마당 여기저기를 배회한다. 작은 바람결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시 살아야겠다.  


< 공간의 재발견 : 한옥카페 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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