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족이 되는 시간 Aug 13. 2023


떠나간 아이와 찾아온 아이

진해-권**

 

자식을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한다.

자식들이 조금씩 나아짐으로써

인류와 이 세계의 미래는 

조금씩 진보하기 때문이다.

   -칸트-     


  아기는 엄마 등에 업혀 뽀얀 얼굴을 비벼댔다. 비빌 때마다 뺨이 젤리처럼 흔들렸다. 머리칼은 쭉쭉 솟아있었고 까만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면 반짝, 별이 총총 떴다. 위탁부모 온라인 자조모임에서 본 별님이(가명)였다.

별님이는 일시위탁 아기라고 했다. 친부모에게 돌아갈지 보육원으로 갈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디 친가정이 회복돼서 아기와 함께 살 수 있길 바라며 화면 앞의 별님이에게 눈을 맞췄다.


 위탁 부모 정임 씨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 부모였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입양과 위탁을 선택했을까? 아이들에 관한 생각이 남달랐을까?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삶을 몇 걸음 따라가 보기로 했다.    

 



 저는 스물일곱에 결혼했어요. 2∼3년 정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크게 걱정을 하진 않았어요. 젊었으니까. 결혼하고 3년째 될 즈음. 신랑 공부 때문에 독일에 가 있었는데 거기서 첫째를 임신했어요. 임신도 처음이고, 병원도 처음이고, 출산도 처음이고…, 그래도 잘해보고 싶었어요. 


 한 번은 정기검진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당장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날이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신랑이랑, 신랑 연구소 직원들이랑 파티하러 가려고 했거든요. 갑자기 큰 병원에 가라고 하니까 당장은 못 간다. 오후에 약속이 있다 했더니 당황하시더라고요. 아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약속이 있다고 하니까. 


 집에 가서 짐 챙기고 신랑한테 전화를 했죠. “병원에서 나 큰 병원으로 빨리 가래. 오늘 모임에는 못 갈 것 같아.” 그리고 대학병원으로 급하게 갔어요. 독일어로 설명해 주신 걸 다시 영어로 들었는데. 아이가 너무 많이 내려와 있다고 했어요. 무서웠어요. 도저히 거기서 출산을 못 하겠더라고요.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도착해서 병원에 갔더니 당장 입원하라고 했어요. 매일매일 아기가 얼마큼 내려왔는지 체크하고, 아기가 내려올까 봐, 다리를 들고 누워있었어요. 그렇게 4∼5개월을 보내고 첫째 찬희를 낳았어요.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그때 아기를 지켜 준 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저는 종교도 없었거든요.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함’을 내내 안고 살았어요. 


 아기를 낳고 키우다 보니까 좀 바빴죠. 첫째가 돌 즈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내 안에 있던 감사함을 그냥 가지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출발이었어요. 막연하게 이 감사함을 누군가에게 어떻게 돌려주면 좋을까. 내가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어디 가서 봉사를 할 수는 없을 텐데 하면서 찾았죠. 그러다가 ‘가정위탁’이라는 걸 보게 됐어요. 


 가정위탁센터에서 봉사자를 구한다고 해서 문의를 드렸죠. 그런데 봉사자는 일반인 봉사자가 아니라 ‘반디’라는 대학생 봉사자를 구하는 거였어요. 그렇구나 하고 있는데, 담당자가 가정위탁의 과정을 설명해 주셨어요. 가정위탁제도를 그때 처음 알게 됐어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제가 찬희를 양육하고 있고 다른 아기가 와서 형제처럼 같이 크면 좋지 않을까. 그때는 아이를 위해서 한 생각이 아니었고요. 내가 할 수 있겠다, 가능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신청을 했어요. 


 “신청할게요!” 했는데 교육도 들어야 하고, 뭐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찬희가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대에 교육을 듣고, 위탁부모 자격을 갖췄어요. 매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안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찬희가 너무 어리니까 쉽게 매칭해 주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신청만 하면 금방 아기가 와서 같이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3년이 그냥 흘렀어요. 그 시간 동안 찬희가 많이 커서 어린이집에도 가고 저는 직장을 다시 나가게 됐어요. 딱 1년을 다녔는데 둘째가 생겼어요. 그리고…, 유산이 됐어요. 


 좀 쉬다가 다시 직장을 나갔고요. 일상을 바쁘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또 아기가 생겼어요. 병원에서 얘기하길 첫째 때 자궁경부 무력증이 있어서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수술해야 한다, 근육의 힘이 없으니까 묶어두는 수술을 하자. 그래서 묶었어요. 


 직장 열심히 다니면서 아기를 키웠어요. 그러는 중에 제가 방광염에 걸렸어요. 염증이 자궁 쪽으로도 들어가서 열이 올랐어요.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아기가 너무 많이 내려와서 위험하다고 바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나는 둘째도 또 누워서 맞아야 되나, 했는데 그날부터 열이 펄펄 끓었어요.


 병원에서 얘기하시더라고요. 낳아야 된다고. 그때 아기가 20주 안 됐던 것 같아요. 낳았어요. 다행히 nic에서 아기를 받아보자 하셔서…. 아기가 한 달 조금 넘게 살다가…. 갔어요. 


 엄청 많은 걸 놓아버리게 되더라고요 그냥 다 놓아버렸어요. 일상을 살아내기가 힘들었어요. 첫째 돌보는 것도 힘들었고요. 슬픔은 아이를 보낼 때 이미 다 쏟아내서 그래도 어떻게 지나갔는데 무기력이 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 하겠고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 동안 무기력에 빠져 있었어요. 


 그게 우울증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가정위탁센터였어요. 100일 지난 여자아기가 위탁이 필요한데 키워줄 수 있냐고. 무조건 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갑자기 눈이 반짝반짝해 가지고 그런 얘기를 꺼내니까 아무도 말리질 못하는 거예요. 친정도 그렇고 시댁도 그렇고 하겠다는 걸 하지 말라고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남편이 옆에서 많이 걱정했죠. 그때가 둘째 아이 사망 신고하고 딱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어요. 사망 신고 기간(3개월)을 꽉 채워서 마지막에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낳은 아이랑 위탁 아이랑 생일도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요.


 저한테 위탁 아이는 제가 낳은 아이 대신 온 아이로 느껴졌어요. “내가 이 아이한테 엄마가 돼야겠구나.” 그런데 가정위탁은 다시 돌려보내야 되잖아요. (위탁) 아이 생모도 다시 데려가서 키우려는 의지가 있었어요. 3년 동안 위탁했는데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생모를 만났어요. 위탁센터도, 저도 생모의 양육 의지가 있다고 판단을 했죠. 언젠가 돌려보내야 하는 아이로 저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어요.     

 



 은희(위탁 후 입양자녀)하고 보내는 시간이 한정적이라고 생각해서 은희가 한 개를 원하면 두 개를 주고, 첫째한테도 무조건 양보해, 양보해, 이러면서 은희를 과잉보호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좀 miss였어요. 하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처음 위탁센터 의뢰받고, 일주일도 안 돼서 왔어요. ‘긴급’이었거든요. 일단 같이 얼굴을 보고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그땐 은희가 안 왔고요. 그다음에 위탁센터에서 은희를 만났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


 두 번째 만날 때 집에 데리고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은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두 번 보고 저한테 온 거잖아요. 그런 부분은 미안해요. 은희는 첫날부터 너무 잘 잤고 순한 아기였어요. 그런 아기는 처음 봤어요. 첫째랑 너무 달랐으니까요.


 첫째 찬희는 돌아서면 울고, 놓으면 우는 아이였거든요. 은희는 안아서 재우면 불편해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닥에 놓고 그냥 편안하게 자야 더 안심하고 잘 자서 깜짝 놀랐죠. 한 번은 은희가 자길래 방에 눕혀놓고 저녁을 준비했어요.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것 같아요. 다 구워 먹고 시간이 엄청 많이 걸렸는데 설거지를 할 때까지 계속 자는 거예요. 


 신랑이랑 혹시 아이가 잘못됐나. 한번 가봐, 한번 가봐, 아기 잘못된 거 아니야? 이렇게 안 울 수가 없는데 했죠. 가니까 자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쩜 이런 아기가 있나, 했거든요. 

은희 짐에는 분유가 딱 한 통이 있었어요. 뚜껑을 열어보니까 그날 저녁 먹일 양도 안 될 정도였어요. 신랑한테 아기 분유부터 사 오라고 했죠. 신랑이 똑같은 분유를 사 왔어요.


 은희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숱이 별로 없었대요. 잔머리 같은 거만 송송 난 아기였는데 베개에 닿는 그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에 똘똘똘 말려가지고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더라고요. 신랑이랑 같이 보면서 아기를 바닥에 얼마나 오래 눕혀놨으면 말리고 말리고 해서 이렇게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을까 했어요.


 머리칼이 떼어지지도 않았어요. 신랑이랑 가위로 자르면서 아기를 많이 안아주기는 힘들었나 보다, 했죠. 생모랑 오랫동안 같이 만나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들었거든요. 



 

 제가 생모를 영이(가명)라고 불렀어요. 영이는 열아홉 살이었어요. 그때 고등학교 졸업식을 해야 하는데 다행히 교장 선생님이 졸업장을 주시겠다고 해서 졸업장을 받았어요. 대학도 가겠다고 했고요. 그래 대학 가라, 은희하고 같이 살려면 대학도 가고 돈도 벌어야지. 그래서 입학했어요. 그런데 대학 생활이 힘들었는지 공부가 어려웠는지 한 학기 다니고는 그만뒀어요. 휴학을 했는데 나중에 복학을 안 했죠. 


 그 후에 취업을 알아봤는데 아기 외할머니께서 그래도 생활 능력이 있으셨어요. 차 운전을 하셨거든요. 혼자서 딸 둘을 키우셨대요. (저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이걸 아는 거죠.) 할머니는 새벽 6시에 나가면 저녁 10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셨는데 그사이에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지냈대요. 외할머니는 영이가 출산하는 날 아신 거예요. 


어떻게 몰랐어? 엄마가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물어보니까. 엄마가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시니까 엄마 들어올 때쯤 되면 빨리 누워 자고. 큰 옷을 입고 있었대요. 맨날 라면만 먹고.


저는 미혼모들의 마음도 수용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에서 아시고도 잘 받아들여 주질 않았나 봐요.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임신했다고 하고. 낳아야 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아마 더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은희 같은 경우는 (태중에서) 계속 엄마 등 쪽을 보고 있어서 낳을 때까지 성별을 몰랐대요. 아이 위치나 이런 것들이 위험해서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고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 거죠. 


 친가정에서 100일 정도 양육을 하셨어요. 아이 생부하고 그쪽 부모님 하고 서로 만나서 의논하는 자리도 가졌고. 그쪽 아버님, 그러니까 은희 친할아버지께서는 칼을 앞에 놓고, 자기는 감옥도 갔다 오고, 뭣도 해봤고 하면서…. 위협하고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말을 했대요. 너무 두려웠고 엮이면 안 되겠구나, 싶었대요. 


 그래서 ㅌ시에서 ㄱ시로 도망가듯 이사를 했대요. 아이 때문에 피신을 가신 거예요. 너무 두려워서 계속 도망을 다니는 느낌이었고. 영이(생모)도 자주 전화번호를 바꿨어요. 처음에는 은희랑 같이 시댁에 들어가서 살아보려고 갔는데 그 집에 있는 강아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대요. 여기서도 나를 반기지 않구나 하면서 나왔대요. 



 다행히 주민센터에 문의를 했더니 거기서 가정위탁제도를 알려줬대요. 그런데 그걸 하려면 현재 수급비 지원을 받는 가정이어야 한다고. 할머님이 수급비를 받고 있었는데 다음 해가 되면 월급이 오르면서 안 되는 그런 경계에 있었나 봐요. 그래서 조금 빨리 아이를 보내게 됐고, 부랴부랴 저희한테 오게 된 거죠.


 은희는 정말 건강하게 왔어요. 허벅지에 줄이 두 개, 팔에도 줄이 두 개. 막 볼록볼록 했어요. 분유도 오는 날부터 100ml 넘게 먹었고요. 피부도 하얗고 눈도 크고 방울방울 했어요. 신기했어요. 첫날은, 애 안 키워본 사람처럼 정말 정신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맘으로 돌아갔어요. 신세계였어요. 그날 하루는 아예 기억에서 날아가 있을 정도예요.


 은희가 네 살 정도 됐을 때예요. 영이(생모)가 창원 터미널로 온다고 해서 만났거든요. 근처 키즈 카페 같은 데 가서 같이 놀고, 밥도 먹고, 몇 시간 있다가 헤어지고. 주로 그렇게 놀았는데 그날은 영이(생모)가 그러더라고 “엄마 이사 갔는데 은희야 한번 가볼래?” 


 웬일로 은희가 간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갈래?” 제가 다시 물었는데 가겠다고 했어요. 저는 늘 은희가 생모랑 빨리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친해져야지 나중에 은희가 생모에게 돌아가도 힘들지 않을 테니까요. 영이(생모)한테 “며칠 있다가 보내도 돼.” 하고 보냈어요. 은희도 좋다고 따라갔어요.   

   

 그날 저녁이었어요. 신랑이 통풍 때문에 무릎이 너무 아파서 119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병원에 가니까 이건 통풍이라고. 다음 날 바로 수술해서 치료하고 물도 빼야 한다고 했어요. 은희가 없으니까 제가 그걸 할 수 있었죠. 은희가 있었으면 제가 은희를 계속 업고 여기저기 연락하고 했을 텐데요. 


 남편이 한 3∼4일 병원에 입원해 있었거든요. 근데 영이(생모)가 한 이틀인가 3일 지나서 전화가 왔어요. 은희가 자꾸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안 될 것 같다고. 내일 보내겠다고. 그때는 남편도 회복 단계였어요. 




 은희가 저를 많이 도와주는 것 같아요. 자기도 모르게 우연히.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사실 지금 생각해도 은희가 진짜 나를 도와주러 온 아이 같아요. 내가 힘들 때, 어려울 때, 은희가 직접 도와주든지 아니면 은희가 어떤 수고를 덜어주든지. 은희는 항상 저를 도와주더라고요. 가장 힘들 때 찾아와 줬고, 나를 살려줬고, 나를 자라게 해 줬고….

 

 첫애는 그냥 키웠거든요. 돌보는 게 부모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그냥 씻기고 먹이고 양육만 했어요. 은희 키우면서는 위탁센터에서 부모 교육도 듣고 배운 걸 적용해 보면서 예뻐만 하는 게 아니구나, 알았죠. 아이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그러면서 나도 성장해야 한다는 걸 배워가고 있어요. 위탁부모 보수교육을 받으러 가서 깨달은 거죠. 은희가 가르쳐주는 게 많아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은희가 아니었으면 입양도 몰랐을 거고, 위탁은 더 몰랐을 거고요. 보통 사람들한테는 너무 당연한 부모와 자식 간의 역할이나 사랑, 이런 것들을 내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은희가 다섯 살이 된 2월이었어요. (위탁) 계약기간 만 3년이 지나는 때였죠. 보호 종료되는 시점에서 은희도 유치원을 가야 하고 영이(생모)도 충분히 양육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직장도 다니면서, 아이도 케어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은희도 더 지나면 생모에게 안 가겠다고 떼 부릴 것 같았거든요. 다섯 살이 뭘 알 듯 모를 듯한 그 정도의 나이인 거예요. ‘이 시기가 지나면 생모도 감당을 못하겠다.’ 생각했죠. 보호 종료하면서 생모랑 얘기를 많이 했어요. 센터를 통해서 들었는데 은희를 더 봐주면 안 되냐는 말도 있었대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생각을 해봤어요. 그때만 해도 생모의 양육 의지는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의지와는 다르게 생활에 대해서 어떤 성실성이나 노력은 진전이 안 보였어요. 저는 그 부분이 좀 아쉬웠고, 약간 미웠어요. 




 지금 생각하면은 이게 위탁 엄마들의 공통적인 마음인 것 같아요. 위탁 엄마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인 줄 알면서도 친가정이 회복되어서 아이가 다시 사랑받고 자랄 수 있기를 바라고, 지지하고,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저도 그 마음이었어요.

 

 왜 (은희한테) 이렇게 안 해주지? 지금 (은희한테) 이렇게 노력을 해야지. 그래야 데리고 갈 거 아니야. 그래야 우리 은희가 행복할 거 아니야 하는 마음이었죠. 이런 생각이 크다 보니까 생모의 성실함이나 노력들이 아쉽기만 했고 나도 모르게 다그치는 말을 하게 되는 거죠. 


 ‘이 시기가 지나면 어려울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돌려보내기로 했어요. 제가 위탁센터에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속 여쭤봤어요. 애초에 3년이라는 위탁 기간으로 시작을 했고 전문가들도 이 시기가 지나서는 애착이 생기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미 위탁엄마랑 애착이 다 되어 있는데 더 지나면 생모하고 애착이 생겨서 뭘 해나가기는 어렵지 않겠냐, 하셨어요. 


 설사 돌아가서 결과가 안 좋다 하더라도 그것까지 센터나 위탁엄마가 책임질 수는 없다. 그때는 센터 말이면 다 따랐거든요. 그래서 보냈어요. 보내는 날,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어요. 

은희한테 전부터 계속 얘기를 해줬어요. 이제 영이 엄마랑 같이 살 거야. 그런데 (위탁)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엄마가 보고 싶으면 영이 엄마한테 얘기해서 가고 싶다고 해. 


 얘기를 해도 은희는 앞에 말만 듣고 계속 울었어요. 그 과정을 두세 달 넘게 했던 것 같아요. 은희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부터는 영이 엄마랑 살아야 된다.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영이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되는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은희는 저랑 헤어진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던 거예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두려웠던 거예요. 은희가 다섯 살이었죠. 다섯 살이기는 해도 생일이 10월이라 네 살 정도 수준이었던 건데. 그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던 아인데. 그래서 헤어진다는 말만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같이 안고 울고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도 미리 얘기를 하면 은희한테 조금이라도 준비가 되지 않겠나, 해서 아이가 울고 내가 울더라도 우리가 헤어지는 상황이고 서로 분리가 되는 상황인 걸 계속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아팠지만 얘기를 했고, 마지막 날도 같이 잘 갔어요. 남편도 같이 가니까 기분 좋아했거든요. 은희 침대하고 그동안 썼던 짐들하고 다 챙기니까 짐이 엄청 많았어요. 가서 침대 설치해 주는 동안 서류 작업을 해야 하니까 위탁센터에서 오신 분하고 영이하고 주민센터에 갔어요. 저하고 남편하고 은희하고 방에서 같이 놀면서 있었죠.

 

 일 처리를 끝내고 돌아오셨어요. 진짜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잖아요. 그때부터는 이제 분위기가 이상한 거죠. 서로 인사하고 가야 하니까. 그때부터 은희가 자기도 갈 거라고, 갈 거라고, 계속 악을 쓰면서 울었어요. 눈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얼굴이 벌겋게 돼서 꺽꺽거리고 괴물 소리를 냈어요. 비명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거기서는 못 헤어지고, 같이 내려와서 놀이터에서 놀다가…. 마지막엔 은희를 안아서, 그분들이 분리시켜 주셨죠. 그날 밤에 걱정돼서 잠을 설쳤어요. 


 다음 날 영이가 은희 사진을 보내줬어요. 헤어지고 나서 많이 울었고 놀이터에서 조금 데리고 놀았다고. 이젠 좀 괜찮아졌다고 하면서 사진 몇 장을 보내줬어요. 그래 괜찮아야지 괜찮겠지, 하면서 내 마음만 추스르면 된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은희를 입양하면서 ‘그날’을 물어봤어요.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간 느낌이었대요. 마치 고아원이나 그런 데 맡겨지는 기분을 그대로 얘기하더라고요. 듣는 순간 ‘내가 은희를 버린 거였구나’. 죄책감이 들었어요. 생모가 거부하고 거절한 상황인데 은희한테 남아 있는 건 제가 버리고 간 것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그 벌을 받고 있어요. 하하하. 


 왜냐하면 자기 안에는 모든 것이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간 걸로 각인이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입양으로 다시 집에 와서도 처음엔 불안해했고 엄마가 모르는 이모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면 “저 이모들은 누구야?” 하면서 계속 확인했어요. 


 엄마가 전에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또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깔려있는 거죠. 엄마가 끝까지 나를 지키지 않았다는 마음. 또 저에 대한 분노도 있었고요. 애착을 넘어선 집착이 지금도 안 끝났어요. 은희는 여전히 분리가 어려워요. 


 그 기억이 은희한테는 트라우마예요. 엄마하고 분리됐던 순간. 아이는 세상을 잃어버린 거죠. 저한테도 그게 깊이 남아 있지만 저는 어른이고, 아이한테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고 나서부턴 은희가 집착을 보일 때마다 “이건 내 죄지, 내 죄야” 하면서 다뤄주려고 해요. 


 은희가 가끔 그래요. 친구들은 태권도장 가서 캠프한다고 하루 자고 오고 그래도 엄마 보고 싶다고도 안 하는데. 심지어 동생 준희도 가끔 엄마랑 떨어져서 다른 방에서 형아랑 같이 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데. “엄마 왜 나는 이게 이렇게 안 돼?” “이게 나한테는 왜 이렇게 어려워?” “나도 준이처럼 저렇게 되고 싶어. 친구들처럼 저렇게 되고 싶어.” 


 그래서 제가 “그 마음은 은희가 영이 엄마하고 헤어지면서 마음속에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너무 큰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엄마하고 갑자기 떨어지는 순간, 진짜 헤어지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게 건드려지고 또 건드려지는 거지. 은희가 그거를 억지로 고치려고 애쓰거나 노력하기보다는 이 마음이 거기서 온 거구나. 이해하면 돼.”


 이제 아이가 좀 힘이 생기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걸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거를 좀 딛고 다른 아이들처럼. 그냥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처럼 진짜 해보고 싶고 한 발 나가보고 싶은 거죠. 




 은희는 다섯 살 2월에 생모에게 돌아갔어요. 그리고 5월에 집으로 다시 왔어요. 3개월 정도 떨어져 있었어요. 영이가 은희 동영상이며 둘이서 맛있는 거 먹고, 요즘 아이들처럼 예쁘게 꾸며서 사진 찍어서 보냈어요. 그거 보면서 잘 지내고 있네, 하면서 진짜 안심했었거든요. 


 근데 한 달 좀 지나니까 사진이 뜸했어요. 좀 바쁠 수 있지. 좀 기다리다가…, 너무 연락이 없어서 위탁센터에 물어봤죠. 그랬더니 센터에서 좀 머뭇거리셨어요. 그다음에 다시 문의했을 때 센터에서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은희가 지금 그룹홈에 가 있다고. 


 그룹홈 원장님한테 들은 건데, 생모는 은희를 데려가기 전부터 그룹홈에 문의를 했대요. 은희 오면 바로 보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얘기를 안 해서 눈치도 못 채고 있었죠. 제가 그룹홈 원장님하고 영이하고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걸었어요. 그때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큰 죄를 지어서 벌벌벌 떨고 있는 것처럼. 다다다다 손도 떨리고. 그 상태로 계속 전화를 했어요. 


 은희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서 불안하고 두려웠어요. 그때 그룹홈 원장님이 얘기하시더라고요. 업무를 못 할 정도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니까. "어머니 그럼 입양을 하시는 건 어때요?"

 
  입양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지금은 위탁하시는 분들이 입양하고 싶다, 얘기하시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영이한테 다시 은희 데리고 와라. 위탁센터에 은희 다시 위탁하게 해 주세요. 관장님 만나서도 다시 위탁하게 해 주세요. 계속 얘기했죠.


 내가 진짜 바란 건 생모가 힘들어도 은희랑 그 시간을 견뎌가면서 은희를 잘 키우는 건데 잘못됐다. 아무런 힘도 없고 권한도 없는 위탁엄마가 (아이만 보고) 내 시나리오대로 이걸 다 조정하고 싶었던 거예요. 근데 이게 위탁 부모님들 마음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법적인 권한도 전혀 없는데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위탁 부모님들 마음이더라고요. 위탁부모 자리가 어렵다는 거 그때 절감했죠.



 

 은희를 다시 위탁하려고 몸부림을 쳤어요. 생모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요. 위탁센터만 해주시면 되는 거였어요. 센터에서 안 해주시겠대요. 전문가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어차피 위탁엄마가 장기로 키울 상황이 안 되거나, 생모가 데리고 가면, 결국 이 상황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생모도 아이를 그룹홈에 맡겨놓은 게 자기가 안 키우려고 맡겨놓은 게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맡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방임으로 볼 수도 없고 그러면 이 상황은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위탁을 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였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 더 위탁을 했다가 돌려보냈어도 생모가 잘 키울 수 없었을 거예요. 전문가들의 말처럼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은희가 전혀 다른 상황이 돼버렸잖아요. 이 아이의 삶이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는 건데요.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내면 바뀌는 게 있는 거죠.     


 제가 생모에게 물었어요. 

영아, 내가 은희를 입양을 하는 건 어떨까?


조금만 시간을 달래요. 항상 키우려는 의지는 있었거든요. 저희 신랑도 영이한테 “우리가 은희를 훌륭하게,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는 없지만 ‘내 아이’로 키울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은희 행복하게 키울게.” 했고요.


 자기가 진짜 원하는 건 은희가 행복하게 되는 거라고. 은희가 행복해지려면 언니랑 살아야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은희한테도 물어봤대요. 누구랑 어떻게 살면 제일 좋겠냐고. 저하고 살고 싶다고 했대요. 그룹홈에서도 힘들었죠. 


 그룹홈 원장님도 은희가 언니들 텃세도 있고 힘들어한다고. 당시에 은희는 여기저기 다 편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생모가 그렇게 얘기해 주고, 입양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저희도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생모랑 얘기를 많이 했어요. 


“친권 포기 각서도 쓰고, 입양 보내는 상담도 받아야 한대.”


 저는 창원에, 영이는 ㄱ시에 살았거든요. 창원에도 ㄱ시에도 입양 기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부산에서 서로 맞췄죠. 부산이 가기가 쉬워서요. 부산에 있는 기관에선 생모가 와서 상담하고 친권포기 각서 쓰고, 저도 상담하고 서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그룹홈으로 갔죠. 어차피 입양할 거니까. 그룹홈에서는 그러든지 말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일단 이 아이부터 원가정 복귀시키는 걸로, 종료시키는 걸로 사인해라 해서 영이가 사인하고 제가 데리고 왔어요. 


 그때는 위탁도 아니었고 그냥 남의 아이를 훔쳐 온 거예요. 그룹홈에서는 원가정에 보냈다고 생모 보고 사인하라고 해서 사인했고, 은희는 우리가 데리고 왔으니까요. 그룹홈엔 석 달 좀 넘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영이가 입양 상담하는 동안 저희는 서류를 준비했어요. 서류가 많았어요. 심리검사 하고, 경찰서 가서 서류 떼고…, 애는 지금 와 있는데 우린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것부터 좀 겁이 나더라고요. 신랑이 적극적으로 해줬죠. 


 서류 준비해서 법원에 올렸어요. 한두 달 좀 넘게 걸리더라고요. 은희는 여섯 살이 다 돼가는데 아무 데도 못 가고 있었어요. 제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없잖아요. 안 되겠어서 구청에 찾아갔죠. 구청 아동복지과 가서 얘기했어요. 우리 상황이 이렇다. 위탁 엄마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도 보육은 우리나라 국민이면 다 받을 수 있는 거 아니냐. 이거 하게끔 빨리 해줘라. 알아보고는 해 주셨어요. 보육비를 그 어린이집으로 해주시고, 카드도 만들어 주시고, 다 해주셨어요. 



 

 법원에서 판결받는 날. 둘이서 갔거든요. 서류엔 동거인이 아니라 ‘자’로 돼 있고요. 성도 바뀌었고요. 원래 은희 이름이 양**이거든요. 김**으로 바뀌었어요. 성본이 바뀌는 거예요. 아빠 성본으로. 


 우리가 “은희야 우리 이름 바꾸자. 첫째는 찬희고, 셋째는 준희고 하니까, 희자로 해서 이름 바꾸자.” 하고 이름 몇 개를 뽑아서 보여줬어요. 은희가 은희 이름을 골랐어요. 처음에는 계속 **이라고 불렀죠. 이름이 (입에) 안 붙어가지고 **아, **아. 


 친정 엄마도 이름 바꾼 줄 모르고 계속 **이로 불렀죠. 그러다가 제가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얘기했어요. (입양 후)은희로 이름을 바꿔서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잘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아이들 있는 데서 얘기를 하셨고. 아이들도 “**아” 불렀다가 “아! 은희지?” 이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 갔어요. 아이들은 금방 받아들이더라고요. 어른들처럼 이름을 왜 바꿨니, 이런 거 안 물어보고. 


 은희한테도 계속 얘기했죠. 엄마하고 아빠가 은희를 입양했어. 입양이라는 건 우리가 이제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이제 엄마가 ‘은희 엄마’가 된 거야. 은희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여기서 사는 거야. 은희한테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중요했거든요. 계속 얘기해 줬어요. 우린 가족이고 끝까지 은희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은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죠. 그게 2017년 일이네요.      


 저는 가정위탁이랑 입양을 다 경험해 봤잖아요. 우리나라 행정은 친부모에게서 멀어질수록 지원이 더 많아지는 게 아쉬워요. 친부모가 키울 수 있게 애초에 지원을 해줬더라면 그룹홈이나 위탁을 보내지 않고 키울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쉽죠.


 친가정에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가정위탁으로 보내면 아이는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죠. 지원을 받잖아요. 만약 보육원으로 가면 지원금은 훨씬 많아지죠. 그런데요, 입양을 하면 다시 확 줄어요. (2023년 기준 입양 양육 수당은 20만 원) 


 친부모에서 멀어질수록 지원을 더 많이 해준다는 게 아이러니해요. 친부모가 키울 수 있게 지원해 줬다면 어땠을까요. 행정적인 부분에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친가정도 보호할 수 있고요.


위탁부모도 자원하는 분이 소수잖아요. 행정도 영수증이니 뭐니 어렵게 하고요. 위탁부모로 더 지원하고 해 나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이 가정보다는 보육원으로 가게 되고요. 관리가 더 편하긴 하겠죠. 아이들을 위한 게 뭔지 어른들이 살피고 고민해야 하는데…. 참 안타까워요.


 아이들이 시설보다는 가정에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셋째 키우고, 별님이(위탁아기)를 또 키우는 거죠. 별님이는 일시위탁이라 언제 돌아갈지 몰라요. 일시위탁은 길어야 6개월인데. 있는 동안 잘 지내야죠. 그녀는 또 푸근히 웃었다.     

 

 매일 씻기고, 먹이고, 안고, 재우고, 눈 맞추고, 비비던 별님이는 6개월의 일시위탁 기간을 마치고 그녀의 품을 떠났다. 보내는 마음이 어땠을까? 감히 짐작도 못 하겠지만 그녀는 또 자신의 품이 필요한 아이를 만나면 두 팔을 벌려 맞아들일 것이다. 


 세 아이의 엄마, 평범하고도 특별한 정임 씨! 당신의 삶은 보석보다 아름답네요.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낳지 않았지만, 엄마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