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오**
어린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조제프 주버트-
조금 놀라실 텐데…, 저는 고향이 북한이에요. 누가 물어보면 사실은 이래요, 말했을 텐데. 내가 먼저 말하기도 그렇고요. 안 물어봐 줘서 고마운 것도 있어요. 한국에 들어올 때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서 왔어요.
베트남에 있을 때예요.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열댓 명이 다 같이 한 방에 있었거든요. 그중에 열두 살짜리 여자애가 할머니들한테 막 쌍욕을 하는 거예요. 우린 숨어 있었고 만약 베트남 군인들한테 잡히면 모두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아이가 할머니들한테 쌍욕을 하는데…. 막 씨발년 이런 욕까지 하더라고요. 제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때려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적으로 아픈 아이였어요. 당시엔 그걸 몰랐으니까 버릇없고 기가 찼죠. 어떻게든 조용히 있다가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꾸 분란을 일으키니까 긴장되고 걱정되고 그랬죠.
한 번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수군했어요. 그 애가 피를 토하고 있대요. 급하게 가봤죠. 조그만 게 응가하는 자세로 땅에 앉아 있는데 숨 쉴 때마다 입이랑 코에서 피가 쿨럭쿨럭 나오더라고요. 뛰어가서 안았어요. 안고 받쳐줬어요. 내 가슴이랑 팔에도 피가 다 묻었죠. 계속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두드려주고 찬물 적셔주고 밤새 간호하다가 아침에 병원에 데려갔어요.
내가 때린 아이잖아요. 그 정도로 미웠는데 피 흘리고 아파하는 걸 보니까 바로 안게 되더라고요. 사람들도 다 아이를 봤거든요. 그런데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병원에 가서도 대소변 처리 해주고, 몸 닦아주고, 퇴원할 때까지 그렇게 같이 있었어요. 입원할 때 같이 갔다가 퇴원할 때 같이 나왔네요.
그 후에도 여자 한 분이 아팠어요. 수술해야 하는데 “병간호는 누가 하냐” 서로 또 말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갔죠. 베트남은 남자 여자 수십 명이 같은 병실에 있었어요. 낯선 데서 간호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퇴원할 때까지 같이 있다가 같이 나왔어요. 이상하게도 저는 아픈 사람을 보면 외면하질 못 하겠어요.
캄보디아에선,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한국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누가 모기에 물려서 열병에 걸린 거예요. 한 사람이 걸리니까 전염이 됐고요. 일부는 걸린 줄도 모르고 한국에 들어가서 입국이 중단되기까지 했어요. 꼼짝없이 거기 다 갇혀 있었어요. 90%는 다 걸렸어요.
입이 써서 먹지도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진짜 처참했어요. 밤에 열이 나고 가쁜 숨을 쉬면서 힘들어했어요. 저는 그 상황에서도 안 걸려서 밤새 사람들 냉찜질해주고 팔다리 마사지 해줬죠.
방 중앙에 빨랫줄 같은 걸 치고 거기에 링거를 걸고 맞았어요. 아픈 사람들이 쭉 누워서 맞고, 나은 사람은 일어나고 또 증상이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누워서 맞았어요. 대게 4~5일쯤 아프다가 일어났어요. 전염병이라는 게 참 무섭더라고요.
돌아가면서 한 4주 정도 아팠고. 그즈음 다시 한국에 들어가는 길이 열렸어요. 어린이, 노약자가 먼저 들어갔어요. 같은 날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며칠, 몇 주 간격으로 나눠서 들어갔어요. 저도 가기 전날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는데 지난 시간이 영화처럼 스치더라고요.
'가정위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에 와서)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 아이의 사연 때문이에요. 베트남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이는 아빠하고 살고 있다고 했어요. 아빠가 일을 해서 방 얻을 돈이라도 구해야 한다고. 그동안 돌봐줄 위탁 부모를 애타게 기다린다고 했어요.
마지막에 ‘애타게 기다린다.’는 그 말이 떨쳐지지가 않았어요. 저도 그때가 제일 힘든 시기였거든요. 남편이 위암 수술하고 병원에 있을 때였으니까. 위암 수술하고, 갑상선암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는다고 거의 1년을 병원에서 살고 있었어요.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1년 동안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죠. 먹고살긴 해야겠고. 참 답답하고 힘든 시기였어요.
2014년이네요. 우울증도 오고, 대인기피증도 왔어요. 담당 교수님이 열흘 정도 바람 쐬고 와서 다시 치료하자 해서 잠깐 집에 왔었어요. 피 나오는 줄 같은 거 다 달고. 제가 그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한 달 정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신랑 컨디션이 돌아오더라고요.
다시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고 좀 좋아진 다음에 남편한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어요. 위탁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남편은 내가 힘들 거라는 거예요. 저는 무조건 내가 돌봐야 한다. 나는 죽더라도 하고 싶다고, 강하게 설득했죠.
애들이 학대를 당하거나, 한쪽 부모가 없거나, 엄마가 집 나가고 아빠가 혼자 아이 데리고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키울 수가 있겠냐. 이걸 어떻게 그냥 두고 보냐. 어떻게 내가 힘들다고 외면할 수 있겠냐?
나중엔 남편이 마지못해 위탁센터에 같이 갔어요. 거기서 교육받고, 상담받고, 경찰서에 가서 서류 떼고, 보건소에 가서 건강검진받고, 위탁부모 신청 서류 준비하는 절차를 말없이 다 해줬어요. 말로는 힘들다, 못한다 하면서도.
그렇게 해놓고 (위탁아이를 만나기까지) 3년을 기다렸네요. 저보다 앞에 신청한 엄마들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배치가 됐나 봐요. 중간에 아이들 소식이 몇 번 있긴 했어요. 다섯 살 되는 남자애가 온다 해서 기다렸는데 친부모가 키우겠다 했고요. 또 (보호가 필요한) 아기가 있다, 했는데 보육원으로 간다고 했고요. 그러다가 네 번째로 우리 소연이가 온 거예요.
오래 기다리면서 사실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위탁센터) 담당자도 1년에 한 번씩 바뀌었고요. 바뀔 때마다 가정방문 해서,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저축은 얼마고, 어떻게 사는지, 다 물어보셨어요. 아무에게나 아이를 맡길 순 없으니까 그러셨겠죠.
그때 왔던 담당자가 남편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가정방문 서류에 그렇게 썼대요. 그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에요. 남편은 아이 낳지 말고 입양해서 키우자, 했거든요. 나중에 돈 좀 벌면 입양해서 키우자고. 그런데 입양도 어렵더라고요.
입양을 하려고 보니까 어느 한쪽이 불임이라는 진단이 있어야 된대요. 저는 자궁경부암 수술을 했지만 아이를 못 낳는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유산이 잘 되기는 하지만 임신을 못 하는 건 아니다. 진단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어요.
저는 검사를 받으면 되는데, 남편은 검사를 하려면 정자 채취를…, 해서 한대요. 남편이 막 기절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입양 진행을 못 했어요. 또 제가 자궁경부암 수술을 했으니까 5년 지나서 완치 판정을 받아야 된다고 했는데, 제가 완치 판정을 받은 해에 남편이 또 수술을 했어요. 5년, 5년, 벌써 10년이죠. 저는 40대 후반이지만 남편은 50이 넘어가고. 그래서 입양을 못 했어요. 입양, 어렵더라고요.
그렇게 있다가 가정위탁에 대한 사연을 라디오에서 들은 거예요. 그때는 막연하게 아이를 위해 봉사하는 건 줄 알았어요. 아이가 수급자가 되고, 위탁부모가 그걸 일일이 관리해야 되는 건 줄은 몰랐죠.
2017년 1월 30일 저녁 6시. 위탁 센터에서 전화가 왔어요. “어머님, 내일 김소연 아동이 어머님 댁에 갑니다.” 하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하더라고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기가 온다고 하니까 설레서 집안 치우고, 다음 날 아침부터 기다렸어요.
오전 11시쯤 왔어요. 119에 구조돼서 긴급하게 우리 집에 온 거였어요. 그러니까 미리 연락할 새도 없었던 거죠. 저는 이미 교육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바로 올 수 있었고요. 우리 소연이를 처음 보고 품에 안았는데 작아도 너무 작았어요. 막연하게 아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안는 순간 너무 작은 아기였어요. 예쁜 것도 모르겠고 불쌍한 것도 모르겠고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떨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쫘악 퍼지더라고요.
소연이는 웃지도 않고 무뚝뚝한 표정이었어요. 머리칼은 거의 없었고요. 피부는 굉장히 하얬어요. 기저귀를 가는데 엉덩이가 빨갛게 된 정도가 아니라 살이 안으로 파고 들어갔더라고요. 눈 주변에는 습진이 있었는데 얼마나 울었으면 눈가에 습진이 생겼을까. 안쓰럽고 끔찍했죠.
위탁센터 선생님들은 아기 데려다주고 가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멀리 가기도 전에 아기가 막 뒤로 넘어지면서 우는 거예요. 배를 내밀고, 악을 쓰고, 눈물을 줄줄줄 흘리면서. 감당이 안 되니까 이거 도와달라고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다. 우리 이 시기를 넘겨보자, 하고 전화 안 했죠.
애를 안고 달래는데 등에 겨드랑이에 땀이 줄줄 흘렀어요. 팔은 끊어질 것처럼 아프지. 흔들어도 안 돼. 분유를 먹여도 안 돼. 눕혀도 안 돼…. 아기 요람에 눕혀놓고 흔드니까 조금 그치더라고요.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5분도 안 돼서 깼어요. 또 우는 거예요. 애를 안고 흔들고 혼자서 땀 흘리고 있는데, 남편이 일찍 퇴근해서 들어오더라고요. 남편이 아기를 받더니 흔들흔들해 줬어요. 소연이가 눈물범벅인 얼굴을 남편 가슴에 폭 묻고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남편은 아직도 그걸 못 잊겠대요.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잠든 얼굴을.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는 안 울었어요. 또 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후부터는 잘 지냈어요. 그게 첫날이네요.
소연이 재우고 짐을 풀어봤어요. 너무나 어설프더라고요.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요. 짐 속에 쪽지가 하나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쓴 손편지였어요. 소연이는 8시~ 9시 사이에 자고, 분유는 어떤 거 먹고, 양은 몇 ml 먹고…. 모두 소연이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너무 죄송하고, 고맙다고. 그래도 부모는 부모구나 싶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남편한테 약국 가서 아기 연고 사 오라고 했어요. 가서 제일 좋은 거 사 오라고. 모르면 제일 비싼 거 사 오라고. 그 연고가 하나에 2만 몇천 원인가? 그걸 사 왔더라고요. 소연이 엉덩이에 수시로 발라줬는데 다음 날 아침 되니까 눈에 띄게 아물었어요. 한 3일 되니까 다 나았고요.
눈가랑 목 짓무른 건 몇 달 갔던 것 같아요. 저도 물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 고통을 잘 알아요. 그래서 좋은 거, 더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어요. 지금도 소연이한테는 제일 좋은 것만 사 줘요. 예쁜 아이한테 아무거나 못 사주겠는 거예요.
소연이 짐에 아기띠에 까만 줄이 막 달린 게 있었는데 제가 쓸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계속 안고 다녔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둘 다 외투를 입었으니 부했죠. 잠시 안아주는 건 괜찮았지만 주민센터라도 갔다 와야 되는 날은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유모차도 없었거든요.
소연이 오고 나서 두꺼운 옷 싹 다 벗어놓고 얇은 티를 사 입었어요. 소연이 때문에 제가 티를 처음 입어봤네요. 맨날 블라우스, 원피스, 이런 거만 입고 다녔는데 소연이 키우면서 평생 입을 티랑 바지는 다 입어봤어요.
위탁센터에서 또 오셨더라고요. 아기용품 뭐가 필요하냐 물어보셨어요. 초기 지원금이 나왔는데 현금으로는 줄 수가 없고 물건으로 사야 된대요. 그래서 아기 띠부터 사겠다고 했어요. 어디서 사는지도 몰라서 검색해서 근처 아가방으로 갔어요. 거기서도 제일 좋은 걸로 골랐어요. 워머도 사고요.
아기용품을 사고 거기서 아기 업는 법도 배웠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업으려니까 잘 안 되는 거예요. 남편하고 둘이 하다 하다 끝내 못했어요. 다시 찾아갔어요. 다시 알려달라고. 그래서 몇 번을 연습하고 끼울 거 다 끼우고 집에 와서 업어봤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내 몸무게가 45kg쯤 나갔거든요. 방법도 방법이지만 내 체력이 안 따라줬던 것도 있어요.
북한에서는 아기띠가 없었어요. 좀 쉽게 아기 업는 게 있는데 여긴 그런 게 또 없잖아요. 사고 싶어도 없더라고요. 한국 엄마들은 계속 아기띠를 썼으니까 자연스러운데 나는 안 써 봤으니까 어려웠죠.
한 번은 위탁센터 팀장님이 “어머님 지금은 뭐가 힘드세요?” 물어보셨어요. 이제 다 알겠는데 기저귀를 갈아주고 나서 동그랗게 똘똘 마는 걸 모르겠다 하니까.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그건 한 번만 해도 바로 되던데요? 하하하. 말아서 던지면 똘똘 굴러가요. 신기했어요.
그 외에 목욕시키고 하는 건 다 했죠. 그런데 분유 통에 분유 먹이는 걸 또 안 해봤던 거예요. 그래서 젖병을 이렇게 (눕혀서) 먹이니까, “어머니 분유는 이렇게 해보세요.” 하면서 탁 쳐들더라고요. 쳐드니까 그냥 입에 바로 빨게끔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온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안쓰러워했어요. “그 힘든 거 왜 해? 이제 그만해!” 말리기도 하고요. 이제 보내도 되니까 그만하라고. 그때 제가 얘기했어요.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런데 내가 여기서 아이를 잘 키우면 누군가가 (북한에 있는) 내 아들한테도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을까?” 그 말에는 다들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친구들도 북한에 자식이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이 제 안에 있었고요. 또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얼마나 예뻐요. 아이 때문에 웃고, 아이 때문에 깨닫고, 반성하고, 또 배우잖아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우리 소연이 때문이에요. 힘들지만, 보람이 더 크니까요.
며칠 전에도 위탁센터 선생님한테 우리 소연이 예쁜 사진을 보냈어요. 어쩜 이렇게 예쁘냐고 센터 선생님들이 다들 칭찬했대요. 그리고, 좀 있다가 전화가 왔어요.
“어머님 그런데 이 사진은 어머님 가게에서만 사용해야 됩니다.” 하는 거예요.
(한숨) 위탁아이들은 얼굴에 탈을 씌우고 평생 우물에서만 살아야 되는 건가요? 얼굴도 가리고, 이름도 김 00이라고 하고…. 보호종료까지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 키워요?
난 친가정에 허락도 다 받았어요. 친가정에서도 괜찮다. 이름도 얼굴도 공개하고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했어요. 친가정에서는 오히려 저를 ‘소연이 엄마’라고 불러요. 허락을 다 받고 키우는데 센터에선 그렇게 얘기해요. 이해가 되면서도 내 삶이니까 자꾸 걸리네요. 공개입양처럼 위탁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소연이는 두 돌 전까지 낳아주신 부모님을 세 번 만났어요. 소연이가 이상 행동이 나타나서 그때부터 안 만나고 있죠. 소연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요. 소연이는 몸에 조금이라도 도드라진 게 있으면 그걸 계속 만져요. 만지면서 느끼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는 것 같아요.
모기에 물린 곳도 만지고, 그러다가 뜯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으면 또 만지고, 뜯고 피가 나요. 자꾸 만져서 그게 커지는 거예요. 원래 날 때부터 왼쪽 눈썹 끝 쪽에 (사마귀처럼) 피부보다 약간 붉은, 손톱만 한 넓이로 도드라져 있었어요. 종이 한 장 두께? 그 정도였는데 만지고 또 만져서 점점 커진 거예요. 그래서 레이저 세 번 했는데 그 뒤로도 계속 만져서 또 불어나고 있어요.
제가 투명한 거(이지덤) 붙여놓으면 그 위로 만져요. 목욕하고 나서는 찌지도 만지고. 자기 살보다 쪼끔이라도 나온 건 무조건 만져요. 가끔 틱도 있거든요. 계속 있는 건 아니고. 있다 없다 해요. 심할 때는 숨 쉬듯이 계속하고. 쉰 소리가 숨 쉬듯이 나오는 거예요. “엄마 이거는,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저절로 나와.” 그러더라고요.
지금은 귀 만지고, 이마 수술한 거 만지고, 또 아랫입술을 젖 빨듯이 계속 빨아요. 그것 때문에 혼도 내고, 어르고, 달래도 안 돼요. 속상해요. 이런 부분들이 지치고 힘들어요.
전에 소연이가 말 안 들어서 힘들다, 했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그 힘든 거 왜 하냐, 보내라” 해서 그 후로는 남들 있는 데서 절대 내색 안 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갈까 봐 신경 쓰죠.
얼마 전엔 법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우편물만 계속 왔었거든요. 법정 후견인이라는 확인서 같은 거요. 오연정을 김소연 보호자로 한다는 내용이고요. 석 달에 한 번씩 우편으로 왔어요. 그렇게 법원에서 자동으로 계속 판결이 난대요.
소연이는 119를 거쳐서 왔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학대라 하더라도 아이들마다 다 다른가 봐요. 우리는 119가 데리고 온 상태니까 바로 법원에 갔고, 제가 곧바로 법정 후견인이 됐어요.
한 번은 등기가 오는 걸 못 받았어요. 법원 등기는 딱 본인한테 전해주는데. 못 받으니까 법원으로 돌아갔어요.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돌아간 게 와야 되는데 안 오고 6개월 지난, 요 며칠 전에야 전화가 온 거예요.
재판을 또 해야 판결이 난다면서 쭉 물어보는데 너무 자상하더라고요. 그런 전화를 처음 받아봤어요. 제가 그 자상함에 물어보는 대로 다 대답을 했어요. 요즘에는 애가 어디 아프다. 수술한 거, 아픈 걸 알더라고요. 수술은 또 어떻게 했냐 그래서 있는 대로 다 말을 했죠.
소연이 수술했는데 혹의 뿌리가 많대요.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이 많은가 봐요. 그래서 제거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남아 있을 수 있고 또 자란대요. 그땐 바로 병원에 오라고 했어요. 그 법원 담당자가 ‘힘든 게 뭐가 있냐?’ 또 묻더라고요. ‘애가 아픈가?’, ‘요즘에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나?’
내가 말이 많나 싶어서 조금 주춤하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좋은 일 하시는데, 우리가 어머니 힘든 거 다 안다, 하면서 위로해 주셨어요. 그분 말에 지금까지 힘들었던 게 다 보상받는 것 같았어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거든요. 법원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되는데 말이에요. 위탁 엄마가 뭘 바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는 위탁도 공개입양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은 너무 쉬쉬하는 거예요. 애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요. 그래서 나는 총알받이가 되더라도 앞서 걸어갈 거예요. 그런데요, 가정위탁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면 이해하겠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공격해요. 공개위탁, 그건 너를 위해서 하는 거 아니냐고. 애한테 물어보고 하라고.
입양도 공개하는 집이 있는가 하면 비밀로 하는 집이 있잖아요. 비밀로 하는 건 아이가 결정한 건가요? 그것도 어른의 일방적인 결정이죠. 비밀보다는 아이가 자신의 출생을 알고 그걸 받아들일 때 더 건강하게 자란다고 생각해요. 위탁부모는 어느 날 갑자기 아기 엄마가 되잖아요? 그걸 어떻게 주변에 숨겨요?
소연이는 8개월 때 친부모를 만났거든요. 위탁센터 담당자가 어느 교회를 빌려서 거기서 만났어요. 저는 소연이 챙겨서 기저귀, 분유, 물, 먹을 거 다 챙기고 따뜻하게 딱 담아서 소연이 안겨주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거예요. 낳아 준 엄마 만나는 건데요.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서 그날 점심도 못 먹었어요.
지인이 “소연이는?” 묻더라고요. 엄마 만나러 갔다 하면서 또 펑펑 울었어요.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도 그런데 내 아이는 오죽했겠어요. 우리 아들은 여섯 살 때 헤어졌어요. 그땐 나도 어렸고 울면서…, 죽지 못해 살았죠. 20년도 더 지났네요.
내 아이를 못 보니까 더 모성애가 생겼나 봐요. 남의 자식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돌봐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내가 이성적으론 생각해 보질 않았는데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내 아이를 돌보지 못한 죄책감도 있고, 자책하는 마음도 있고,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서는 것 같아요. (북한에 있는) 아들도 성인이 됐을 텐데 그건 생각이 안 나고요. 여섯 살 때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려요. 길 지나가다가 또래 아이만 보면 정신없이 쳐다보다가 돌아서면서 울었어요. 아이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은 평생 가네죠.
아들도 잘살고 있겠지요. 나는 여기서 소연이 키우면서 이렇게 살고 있고요. 아,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요. 그러고 보면 가족이란 혈연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다 가족이죠.
내가 소연이 울음소리만 들어도 배고픈 울음, 졸린 울음 다 아는 것처럼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가족 아닐까요? 우리처럼 이런 위탁가족도 가족이고요. 같이 살면 닮는지 소연이는 저하고 가면 엄마 닮았다 하는데, 아빠하고 가면 또 아빠 닮았다고 해요.
“애가 꼭 할아버지 닮았네!”.
남편도 빙긋이 웃어요. 남편은 우리 소연이가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키우고 싶대요. 저도 그래요. 친부모한테 가는 날까지 예쁘게, 부족한 거 없이 그렇게 키우고 싶어요. 요즘은 지인들이 소연이 너무 예쁘다, 잘 키웠다 하면 그동안 힘들었던 게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뭐 있어요? 아이 잘 크는 거, 그거 하나죠. 내 품에서 예쁘게 건강하게 잘 크는 거. 그게 행복이잖아요.
간혹 나보고 애를 유별나게 키운다고 하는데, 내가 속으로 그래요. ‘내 새끼 내 스타일대로 키우지, 니 스타일대로 키울까 봐?’ 내 아이 최고로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다 같아요. 위탁아이라고 대충 입히고 대충 해주진 않아요. 우린 또 소연이 하나예요. 더 좋은 거 못 해줘서 속상한 걸요. 같이 사는 동안 소연이는 우리 아이고, 난 소연이 엄마예요. 이게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일이고 잘한 일이에요. 엄마일 수 있어서 감사하죠.
엄마가 돼 보니까 엄마라는 이름엔 감사와 감격, 아픔과 기대가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큰 이름인 거죠.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