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박**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조지 맥도날드 -
우리 진수는 베이비박스 아기예요. 생모가 산부인과 퇴원하면서 베이비박스에 놓고 갔대요. 이름이나 신상에 대한 쪽지는 없었고요. 배꼽에 빨간 집게를 달고 있었어요. 생후 3일 된 아기였어요. 당시 구청장의 성이 ‘유’ 씨라 진수도 유진수가 됐죠. 그 후에 제가 자원봉사를 하던 **원(보육원)에 입소 됐어요.
저는 진수가 입소되는 것부터 다 봤죠. 같은 날 신생아 세 명이 입소했는데, 아기들 중에 진수가 제일 잘 먹고, 잘 잤어요. 그때부터 진수를 키웠고 지금도 진수를 키우고 있죠. 내 생에 엄마라는 이름은 다시없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 아기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가슴이 너무 허하고 시렸어요. 다시 아기를 안아보고 싶었어요. 넋을 놓고 집에만 있으니까 식구들이 걱정했죠.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성당의 교우들이 보육원으로 자원봉사를 나갈 때 어렵게 어렵게 한번 따라나섰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처음엔 그냥 청소 봉사였거든요. 첫날은 창문 열어놓고 멍하게 밖을 보다가 울고, 그냥 돌아왔어요.
보육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손이 부족하거든요. 청소 봉사를 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 아기들까지 돌보게 됐어요. 여기서 울고 저기서 울고, 기저귀 갈고 재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2015년도엔 유독 베이비박스 아기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아기들이 많으니까 봉사자들이 하나는 안고, 하나는 업고, 또 바운스 밀고 그러면서 키웠어요. 1월생 아기들은 뛰어다니고 10월생 아기들은 누워있고요. 커서 유치원 가고, 초등학교 가고, 그걸 지켜보는 게 너무 행복한 거예요.
웃을 일이 없었는데 보육원만 가면 웃었어요. 아기들 먹는 게 너무 예쁘고, 같이 노는 게 좋고, 그래서 매일 갔어요. 직원처럼. 아이들이 저만 보면 뛰어와서 인사하고, 안기고 그랬거든요. 제가 아이들한테서 되려 받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진수가 안 보였어요. 물어보니까 병원에 입원했대요. 봉사자가 손톱을 자르다가 살을 살짝 잘랐는데 지혈이 안 돼서 소아과를 갔고, 소아과 선생님이 손가락을 꽉 묶어주셨는데, 언제 풀어주라는 소리도 못 들었고, 다들 바쁘게 그냥 지나간 거죠. 진수 손가락에 괴사가 생긴 거예요.
큰 병원 가서 손가락 두 마디를 잘랐어요. 그때가 12월쯤? 아기들 유아세례 준다고 대부를 막 정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저도 대부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수가 딱 생각이 났어요.
“선생님 진수는 세례 받을 때쯤 돌아온대요?”, “진수는 누가 대부 서요?” 아무도 없대요.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생후 20일쯤 수술을 하고 왔는데 선생님이 또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여기 봉사자들이 신생아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달라고. 진수 손가락이 어떻게 됐나 들어가서 자꾸 들춰본대요. 참…. 제가 그것까지 지켰어요.
진수가 6개월쯤, 보육원에 수두가 돌았어요. 그때는 돌 지나야 수두 예방접종을 했거든요. 돌 전이니까 미접종 상태였고, 아기들이 되게 심하게 앓았어요. 안 걸린 아기들을 격리시키는 게 빠르다고 할 정도로.
다행히 진수는 괜찮았어요. 제가 가정체험으로 진수를 데리고 왔어요. 집에서 2주 동안 지냈는데 열이 한번 났거든요. 열 패치를 붙여줬는데 그러고도 너무 잘 노는 거예요. 웃으면서.
가정체험 2주 지나고 다시 보육원에 데려다주면서 진수 손가락에 대해 물어봤어요. “선생님 혹시 수술 후에 병원에 한번 갔다 오셨어요?” 못 갔대요. 저보고 데려가래요. 제가 데리고 갔죠.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이 아이는 일반 아이들이랑 달라서 옆에서 계속 이해시켜 주고 괜찮다고 해줘야 된다고. 그 말이 가슴에 남았어요.
집에 오는데 ‘누가 얘를 계속 돌봐주지?’ 보육원 선생님들도 바뀌고 관리하는 수녀님들도 2~3년에 한 번씩 인사이동이 있는데 꾸준히 봐줄 사람이 없는데, 이 아이는 어떡하지? 진수가 성장할 때 옆에서 돌봐주면서 계속 괜찮다고 해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라고 얘기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누가 해주지? 걱정이 됐어요. 그러면서 보육원에 매일 찾아갔죠.
진수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어요. 제가 매일 가니까 저를 알아보고, 다른 애들 밀치면서 저한테 막 기어 오고요. 저는 주말마다 가정체험으로 진수를 데리고 나왔고, 주중에는 외출을 허락받고 놀러 다니기도 했어요.
거기 같이 자원봉사 하던 분이 먼저 ‘가정위탁’을 하셨어요. 그래서 ‘가정위탁제도’를 알게 됐어요. 그때 은수 엄마도 있었고요. 위탁을 하신다고 저한테도 얘기를 해주셨어요. 어떤 분은 진수 예쁘고 잘 따르고 하니까 위탁해 보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보육원 수녀님한테 물어보니까 안 될 것 같다는 거예요. 나중에 들었는데 제가 너무 힘들어 보였대요. 아기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보였대요.
우리 아기 떠나보내고 1년도 안 됐을 때니까요. 난 내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한테 카톡을 보내려고 하는데 ‘엄마’라는 단어를 어떻게 써야 될지 몰라서 못 쓰고 있는 거예요. 그때 알았어요. 내가 큰일을 겪었다는 걸.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 도움이 컸죠.
진수랑은 점점 친해졌어요. 6개월 때 가정체험을 시작해서 주말마다 외출하고, 놀러 다녔어요. 그러는 중에 보육원이 건물을 허물고 재건축을 하게 됐어요. 자원봉사하던 엄마들 입에서 ‘가정위탁’ 얘기가 나왔죠. 보육원이 빌라 하나를 빌려서 이사를 했는데 방 두 개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살았거든요. 그전엔 운동장이 있어서 밖에서 뛰어놀 수 있었는데. 이사를 하니까 놀 곳이 없어진 거예요. 주차장에서 놀더라고요.
몇몇 엄마들은 유독 정이 가는 아이들이 생겼을 때고요. 가정체험을 하고 보육원에 데려다줄 땐 엄마도 울고 아이도 울었어요. 엄마들 일곱 명이 경기 가정위탁센터에 가서 위탁부모 의무 교육을 받았어요.
위탁은 가족들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 되잖아요. 남편한테 얘기를 했죠. 진수랑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다. 더는 못할 것 같다. 위탁을 하든 봉사를 그만두든 해야겠다. 더 정이 들면 안 될 것 같다. 애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내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면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결정을 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시간을 좀 달래요.
“부모님한테도 버림받았는데 우리한테까지 버림받으면 안 될 것 같아.”
남편의 말에 위탁을 시작했어요. 제 평생에 엄마라는 단어는 없을 줄 알았는데. 호칭이 늘 ‘대부님’, ‘대모님’이었는데. 그때부턴 ‘엄마’가 해줄게, ‘아빠’가 해 줄 게로 바뀌었어요.
그전에 대부 섰던 아이가 묻더라고요. “진수는 왜 엄마라고 부르고 나는 대모님이라고 불러요?” 너무 미안했어요. 제가 둘을 데리고 올 순 없었어요. 나중에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대모님은 진수 엄마고, 내 엄마는 수녀님이에요.”
보육원에 15년생 아이들이 열 명 넘게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아이들은 한 여섯 명 정도밖에 안 돼요. 많이 갔어요. 위탁도 가고 입양도 가고. 저랑 같이 자원봉사 다니던 분도 위탁을 했어요. 우린 이웃에 살아서 아이들끼리 학교도 같이 다니고 태권도, 미술학원도 같이 가고, 여행도 같이 가요.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아이들도 편하고, 저도 편하죠. 다른 엄마랑 얘기 못 하는 것들도 둘이선 하니까요. 되게 감사해요.
시댁에서의 반대는 없었어요. 오히려 왜 입양 안 하냐고 하셨어요. 그때 입양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어서 어쨌든 빨리 데려와야 될 것 같은 생각에 위탁으로 진행했거든요. 제일 빨리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위탁이었으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면 저희 아이가 ‘사망’으로 나와 있어서. 그 밑에 누군가를 넣는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진수 오고 후견인 신청을 했는데요. 그 후견인 신청하는 과정이 입양 과정이랑 비슷하대요. 판사님이 물었어요. 왜 입양 안 하고 후견인 신청을 하냐고. 언제 입양할 거냐고.
사실, 내가 예뻐서 데려왔지만 나중에 진수한테도 뭔가 선택권을 줘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가 늙어서 싫어, 부담돼서 싫어, 할 수도 있잖아요. 진수가 성인이 되면 같이 이야기하고 입양하려고요. 둘이 가서 신고하면 일주일이면 된대요. 늙어도 엄마가 필요하고, 젊어도 엄마 필요하잖아요. 부모는 언제나 필요한데 그때 가서 같이 하자, 그러고 있어요.
위탁가정 중에 서로 성이 달라서 힘들어하는 집들이 많잖아요. 정말 운 좋게 성이 같으면 여기는 진짜 대박이다. 혈액형까지 같으면 운명이다. 그러면서 있는데 우리는 베이비박스 아기고 법원에 문의했을 때 성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한번 해보세요. 근데 안 될 수도 있어요.”라고 하셨어요.
후견인 하고, 성 바꾸고, 그러면서 법원에 서류 제출하고. 법원에서 이게 언제 오나 몇 날 며칠 기다리고 있는데 성남시에서는 이런 사례가 처음이었던 거예요. 저는 변호사 쓰지 않고 혼자 했어요. 진수가 학교 들어가기 전에 성을 바꾸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우리를 보고 베이비박스 아기 키우시는 분들이 희망을 갖기 시작했대요. “성이 바뀌었대!” 그러면서요. 저희는 후견인 한 것도, 성을 바꾼 것도 베이비박스 아기여서 더 쉬웠어요. 친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없으니까요. 진수 후견인이 되고 나니까 5년짜리 여권도 만들 수 있고, 훨씬 안정적이 됐죠.
진수가 여섯 살 때쯤, “엄마가 날 낳았어?” 물어봤어요. “진수야! 사람들은 다 엄마가 낳는 거야” 그냥 뭉뚱그려서 얘기해 줬거든요. 근데 7살 때 또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발로 많이 찼어?” 물어보는 거예요. 기회가 왔구나, 싶어서 이야기를 했어요.
진수를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어. 그리고 그 엄마가 사정이 생겨서 진수를 못 키운다고 보육원에 맡겼어. 그래서 엄마를 만나게 된 거야.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생각을 정리하면서 계속 꼬치꼬치 묻더라고요.
“그 엄마는 어디 있어?” “무슨 사정이 있는 거야?” 글쎄 그 엄마가 많이 아픈 걸 수도 있고, 너무 힘들어서 키울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건 잘 모르겠어. 진수가 크면 한 번 찾아보자. 이렇게 얘기를 하고 일곱 살 지나서 정리가 될 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자기 전에도 얘기를 해줬거든요. 엄마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엄청 멋지고 좋은 선물을 주신다고 해서 가봤더니 상자에 예쁜 아기가 들어있었어. 엄마가 데리고 왔는데 그게 진수야.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이 너무 반짝거려서 엄마가 따왔거든. 보니까 그게 진수였어. 듣고 엄청 좋아했어요. 자기가 선물이냐면서. 얼마 전에는 엄마 생일인데 선물 없어? 하니까 자기가 선물이래요. 하하하.
7월엔 (먼저 떠나보낸 아이 때문에) 제가 좀 힘들어해요. 진수한테 미리 얘기해 줬어요. 진수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고. 형아가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래서 엄마가 너무 속상하고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진수도 막 울면서 자기를 낳아주신 엄마가 보고 싶대요.
그래 엄마가 보고 싶지. 못 만나니까. 그래도 엄마는 진수가 옆에 있어서 00이 형 보고 싶은 마음보다 진수를 더 잘 키우고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어. 진수도 엄마랑 행복하게 살면 그 엄마에 대한 마음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러면서.
그 후로도 가끔 한 번씩 폭풍 오열을 하면서 그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얘가 도대체 왜 저렇게 우나 관찰해 보니까 저한테 혼났거나, 화가 많이 났거나, 그럴 때 울더라고요. 일반 가정 아이들도 야단맞으면 친엄마 맞아? 하잖아요. 진수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거죠.
놀이치료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진수가 그랬대요. 낳아주신 엄마는 엄청 착하다고. 컵을 깨면 괜찮아 다시 사면 돼. 안 다쳤니? 물어본대요. 그 엄마는 자기를 엄청 사랑한대요.
한 번은 낳아주신 엄마가 보고 싶다고 또 울길래 얘기해 줬어요. 진수야! 너 지금 엄마한테 화가 나서 그 엄마가 보고 싶은 거 같은데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친절하고 착한 엄마도 이 엄마고, 네 앞에서 화낸 엄마도 이 엄마야. 그랬더니 가만히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곤 알겠대요. 신기하게도 그 엄마를 찾는 게 줄었어요.
한 번은 「모두 가족이에요」라는 그림책을 읽었어요. 입양 가족,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설명이 돼 있어요. 입양 가족은 원래 한 가족이 아니었는데 아이를 맞이하고 가족이 된다고 나와 있어요. 거기에서 진수가 갑자기 “아기를 버리는 건 아니지!” 하는 거예요. 신고할 거라고.
얘기를 하다가, 그럼 우리는 이 가족 중에 어떤 가족일까? 물었더니 입양 가족이래요. 근데 그 엄마가 자기를 버린 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버렸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친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어요. 그 엄마는 엄청 착하고 친절하다면서.
놀이치료 선생님이 그러는데, 제가 진수 생모에 대해 너무 착하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줬대요. 진수야 너를 사랑해서 너를 너무 소중히 여겨서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있다가 세상에 내놓은 거야. 그 엄마가 진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항상 얘기해 줬거든요.
아기 때 사진을 보여줬어요. 처음 (보육원) 들어왔을 때 그 토실토실했던 사진부터 요. 진수야 너 요만할 때부터 엄마가 돌봐줬다. 컵 깨지면 괜찮냐고 물어보고, 또 사면된다고 한 건 엄마야. 웃으면서 얘기했더니 끄덕끄덕 알겠대요.
사진이랑 동영상 보면서 이때도 엄마랑 같이 있었고, 이때도 엄마랑 같이 있었다고 그랬더니 알겠다고. 그러면서 낳아주신 엄마 찾는 게 확실히 줄었어요. 저도 좀 지치더라고요. 폭풍 오열을 하면서 엄마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더 해줘야 되나, 내 사랑이 부족한가. 모르겠는 거예요.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을 하려니 힘들고, 설명을 다 하고 나면 내가 너무 지치는 거예요. 미안하기도 하고요. 다른 아이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걸 진수는 겪어야 되잖아요. 처음 진수 데려올 때는 혼자서도 잘 사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아이를 떠나보낼 때 뼈저리게 느꼈어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산소 포화도가 뚝뚝 떨어지고 그 기계 소리가 막 나는데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진수는 내가 없어도 혼자서 잘 살 수 있게 해 줘야겠다, 생각했죠. 스스로 어떻게든 살 수 있게 해 줘야 될 것 같았어요.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사춘기 지나면 무기력해져요.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하고요. 내가 왜 여기서 살아야 하나 하고. 또 너무 풍족하니까 아껴서 쓰는 걸 모르기도 하고요.
저는 진수가 뭘 해달라고 하면 “해보고 못 하겠으면 얘기해!” 그래요. “진수가 할 수 없는 건 도와줄게. 할 수 있는 건 네가 해봐!” 제 성격도 혼자 이겨내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성격 검사에서도 혼자서 하려다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나오더라고요. 신기하게도 저랑 진수랑 기질이 되게 비슷해요.
우린 해 떨어질 때까지 놀아요. 같이 땅 파고, 안에 개미집 다 뿌셔 보고. 아파트 옆에 공원이 있거든요. 거기 개미집이 정말 많아요. 개미집에 물도 부어보고, 파보고, 돌도 얹어보고,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운동장에 앉아 그림 그리고, 돌탑 쌓고, 나뭇가지 모아서 집 만들고, 나무 위에 올라가고…, 그러고 놀아요.
진수는 비 오면 비 온다고 나가요. 우비 입고 비 맞으면서 첨벙첨벙 막 뛰어다녀요. 눈 오면 눈 온다고 나가요. 썰매 타고 놀아요. 너무 추워서 못 나갈 것 같은 날에도 얼마나 추운지 나가 봐야 된다고 나가요. 꽁꽁 싸매고 나갔다가 엄마 오늘은 너무 추워서 안 되겠다, 하면서 들어오죠.
신나게 놀고 오면 집에서는 좀 앉아 있어요. 보통 블록 갖고 놀아요. 진수는 길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기 때도 키즈 카페 가면 기찻길을 만들어서 놀았어요. 요즘은 길을 만들면 구슬이 길을 따라가면서 올라오고, 내려오고, 기둥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게 있는데, 그걸 잘 가지고 놀아요. 하도 길을 만드니까 “너 도로 공사 들어가면 되겠다.” 하는 말도 들었어요.
한 번은 진수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그랬는데 새끼손가락이 짧다 보니까 일반 학원을 못 보내겠는 거예요. 선생님들도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손가락 번호도 바꿔줘야 되고. 그러니까 일반 학원 말고 개인 레슨을 시켜야 하나 했죠.
그즈음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했는데 기타 치는 걸 보더니 “엄마 나도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고 싶어” 하길래 이때다 싶었죠. 바로 기타 학원을 알아봤어요. 진수 손가락이 기타 줄에 안 닿잖아요. 선생님이 우쿨렐레부터 시작하자고 해서 우쿨렐레를 시작하게 됐어요.
이번에 학교 발표회 때도 우쿨렐레 연주를 했거든요. 남방 입고 넥타이 매고, 카디건 입혀서 보냈어요. 갔다 와서는 “선생님이 멋지다고 그랬어. 옷도 차려고 왔다고” 진수도 뿌듯했나 봐요.
담임 선생님이랑 학기 초에 상담할 때 저희가 위탁가족인 걸 얘기했어요. 선생님이 일반 가정 아이들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 보면 티가 나는데 진수는 전혀 몰랐다고.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서 예쁘다고 하셨어요. 엄청 위로가 됐고요. 고마웠어요.
제가 표현을 잘 안 하는데…. 만약 내가 사고가 나서 없어지면 우리 진수는 어떡하지?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위탁이 걸리는 거예요. 그럼 입양을 해야 되나? 죽음이 두렵거나 그런 건 아닌데 남겨져 있는 아이가 걱정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남겨져 봐서 알잖아요. 진수가 남겨졌을 땐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전엔 일반 가정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낳아야지 가족인 줄 알았고요. 내 아이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했어요. 그런데 진수랑 살아보니까 낳아서 생긴 가족보다 만들어 가는 가족이 더 소중한 것 같아요.
진수한테 사랑을 쏟고 공을 들이고 세상에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내가 낳아서 키운 아이도 똑같을 거 아니에요. 어떤 날은 진수 학교 보내놓고 진수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생각하죠.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만들어 가는 가족이 소중한 것 같아요.
저는 제 아이가 너무 갖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아이를 떠나보내고 시험관을 해서, 유전자 검사를 다 하고 건강한 아이를 골라서 이식을 해서 낳으라는 말도 들었어요. 3개월 안에 검사를 하면 건강한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대요. 건강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 있대요. 휴, 너무 싫더라고요.
아픈 아이를 다시 보내는 건 도저히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아이’에 대해 포기했어요. 그 후에 보육원 아이들을 만났고, 그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만났어요.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데 갔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자기 아이 갖겠다고 노력하고 안 돼서 속상해하는 집에 한 명씩 안겨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만나도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진수가 오고 우리 집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제가 워터파크를 언제 가보겠어요. 남편이랑 둘이 있었으면 각자 방에 들어가서 한 사람은 책 보고, 한 사람은 TV 보고 했겠죠. 지금은 온 가족이 여행 가고 산책하면서 웃는걸요.
진수는 아침에 노래를 부르면서 일어나요. 어떻게 매일매일 행복하고 기쁠까 싶을 정도예요. 진수를 보고 있으면 저희도 덩달아 웃게 돼요. 이게 가족이죠. 남의 아이 데려다가 친가정 복귀하기 전까지 데리고 있는 게 ‘위탁’이라지만 이게 가족 아닌가요? 누가 남이라고 하겠어요? 우린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이렇게 사는걸요.
진수가 물어보더라고요. “낳아준 엄마가 나를 찾으러 오면 어떡해?” 진수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되물었더니 그 엄마한테 가고 싶대요. 그래, 엄마는 진수의 선택을 응원해, 했는데 생각할수록 속상한 거예요. 진수한테 다시 물었죠. 진짜 갈 거냐고. 그 엄마한테 안 간다고 하면 그 엄마가 속상해하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엄마는 진수 없이는 못 살아.” 하니까 “나도 엄마 없으면 못 살아.”하고 둘이 안고 폭풍 오열을 했어요.
우리는 위탁하기 전에 ‘가정체험’을 했으니까 어렵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뭘 안 해준다고 바닥에 누워서 3시간을 우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보육원에서는 울면 됐거든요. 진수는 목소리가 워낙 크니까 다른 애들 깰까 봐 막 해주는 거죠. 집에선 아무리 울어도 안 되잖아요.
지치면 쉬었다가 울고, 저 사람이 해주나 안 해주나 눈치 봐가면서 울고. 그렇게 3시간을 울더라고요. 저도 가만히 앉아서 진수 쳐다보면서 “울면 안 해주는 거야” 계속 얘기하는데. 와, 정말 지치더라고요.
진수는 또 야경증이 있어서 새벽 2~3시에 깨서 점프 점프하면서 울었어요. 안으면 안았다고 울고, 내려놓으면 내려놨다고 울고. 그때는 다치지 않게 하는 것 말고는 해 줄 게 없었어요. 이웃집에도 너무 미안했죠. 자주 떡을 돌렸어요. 아이가 야경증이 있어서요, 하면서. 만나면 죄송하다고 하고요. 그걸 2019년 5월까지 했어요.
진수 오고 한 2년 정도요. 낮에는 눈을 못 뜨고 다녔어요. 진수 보내놓고 잤어요. 밤에 못 자니까 몸이 여기저기 아프더라고요. 정신과 의사는 중간에 살짝 깨웠다 재우래요. 그런데 깨야 말이죠. 새벽 2~3시 되면 그렇게 울고요. 우리 집이 14층인데 (우는 애를 데리고) 어떻게 내려가요. 열려 있던 창문도 닫아가면서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열고…. 쟤 진짜 쉬운 애 아니었어요.
보육원에 있을 땐 자주 중이염에 걸려서 집에서도 그럴까 했는데 좀 덜 아파서 그나마 나은 편이었죠. 진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잔병치레는 없었어요. 한번 아프면 세게 아팠죠. 병원 약을 먹어도 안 될 정도로. 그렇게 한 번 넘어가면 또 한참 잘 지내고요.
진수가 손가락이 짧으니까 친구들이 물어보잖아요. 표현이 서툴 때는 재미없어, 손가락 얘기하면 재미없어, 싫어, 안 할래, 했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속상해,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화가 나, 속상해, 하면서 예민해졌어요. 저도 고민하다가 놀이 치료를 시작했어요.
일부러 새끼손가락으로 핸드폰 터치도 해보고, 손가락 씨름도 하고, 엄청 귀여운 새끼손가락이라고 얘기해 주고…. 지금은 진수가 “아기 때 다쳤어” 하면서 설명하거든요.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친구들 중에서도 좀 빠른 애들 있잖아요. 그런 애들이 놀렸어요. 손가락 접는 게임 하면서 손가락 짧은 사람 접어, 하고. 진수가 너무 예민해져서 그 얘기조차 하질 못하고 그냥 피하더라고요. 싫은 거죠.
유치원 여름방학 끝나고 개학을 했는데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떤 친구가 화가 났는지 “야, 이 손가락 짧은 녀석. 가!” 소리를 버럭 지른 거예요. 자기 엄마한테 손가락을 접고 흉내 내면서 “손가락이 왜 저렇게 생겼어?” 그러는 거예요. 그 엄마는 성인이니까 설명을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별 대응을 안 하더라고요.
진수는 그날 일찍 들어가겠다고 해서 그냥 들어왔어요. 제가 물었죠. “아까 그 친구가 너한테 하는 얘기 들었어?” 처음엔 못 들었대요. 엄마는 들었는데 엄청 속상했어. 그랬더니 “나도 화가 났어” 하더라고요. 다 들은 거예요. 그 얘길 하기 싫으니까 피한 거죠.
담임 선생님이랑도 얘기했어요. 선생님이 그 친구한테 사과를 받아주겠다고 하셨어요. 진수가 사과받고 많이 풀렸어요. 손가락이 괜찮다고 생각되다가도 친구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되게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한 번은 물어보더라고 “엄마 이 손가락은 언제 자라?” 진수야 이 손가락은 자라지 않아. 그냥 이렇게 있는 거야. 그래도 엄청 귀여워. 진수는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하고, 손가락이 짧다고 못 하는 게 없잖아?
며칠 전에 자판 연습을 하는데 세끼 손가락이 자꾸 엉뚱한 데 누르니까 이 손가락이 잘 안 돼, 하는 거예요. 진수야 네 번째 손가락으로 해볼까 했더니. “하니까 돼” 그러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새끼손가락을 대신할 방법을 찾고, 해보고, 그랬죠. 산 넘으면 산이구나 하면서 살았어요. 하나 넘어가면 또 하나 나오고. 아휴. 그걸 어떻게 다 말하겠어요.
진수가 행복한 걸 찾아서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어요. 진수가 행복한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죠. 괜히 위탁했다가 아이 망쳐놓는 거 아닌가, 솔직히 부담도 있었는데 진수가 주는 에너지가 워낙 컸어요.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에너지를 얻잖아요. 진수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내 인생을 바꾼 아들이에요. 이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 좋아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