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일기2: 경찰청 인권영화제 소재공모전 수상작

제 눈이 되어 주세요

by 글 쓰는 경찰관

제 눈이 되어 주세요



이하늘이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연세 종합병원 에스컬레이터 옆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다친 손을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댔다.


"저, 저기요!"


이하늘은 흠칫하고는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마에 땀 구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귀여운 여자가 서 있었다. 이하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굳이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하늘은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작은 키와 주눅 들어 보이는 축 처진 어깨가 콤플렉스였다. 그뿐만 아니라 못생긴 외모와 말더듬증까지 있어 사람들이 본인을 기피한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녀가 옅은 미소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마치 당신의 추레한 겉모습 따윈 상관없다고, 당신도 여느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들에겐 일상의 작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일종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믿기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이하늘이 살던 삶은 그런 삶이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타인이 이하늘에게 미소를 지어준 지가. 이하늘이 대답했다.


"무, 무슨 일이시죠?“


“죄송한데 제가 눈이 이래서……. 바쁘지 않으시면 정신과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하늘이 그녀를 훑어보니, 그녀의 두 눈은 허공을 응시했고 시각장애인용 스틱을 바닥에 두들기고 있었다.


'아…….'


그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이하늘은 어찌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한평생 남이 본인에게 도움을 청한 적도 없고 도와준 적도 없는지라 이런 작은 부탁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평소라면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이하늘은 달랐다. 이하늘은 그녀를 도왔다.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안내표지판을 따라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가는 도중 잠깐의 시간 동안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이하늘의 떨리는 목소리는 말 두 마디를 못 넘고 더듬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좀처럼 웃지 않는 이하늘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 이하늘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를 데려다주면서 이하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구나’


이하늘은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초점 없는 눈,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덜떨어져 보이는 자신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앞이 보이는 사람들은 편협한 겉모습으로 자신을 판단해왔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을 봐 줄 것 같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우린 행복할 텐데’


순수하게 들었던 생각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면 이야기는 로맨스로 흘러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상대방의 의사를 고려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선에 닿지 못했다. 이하늘은 헤어진 뒤, 몰래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신호등을 건널 때도, 택시를 탈 때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도. 이하늘은 뒤에 있었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현대아트빌라 A동 401호. 이하늘은 핸드폰에 그녀의 집 주소를 적었다. 우편함의 우편에서 그녀의 이름도 알아냈다. 김가을. 예쁜 이름이었다. 이하늘은 밤늦게까지 불 꺼진 김가을의 집 창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짓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5월의 어느 날. 그날에 심어진 일방적인 사랑의 씨앗은, 양면적인 불행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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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이 김가을을 스토킹한 지 6개월째. 김가을은 범행을 어렴풋이 느껴왔다. 현관문 고리엔 선물이 담긴 비닐봉지가 종종 걸려있었고 비슷한 인기척이 주변에서 몇 시간이나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스토킹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대체 누구일까?'


핸드폰에 112 번호를 여러 번 누르고 지웠다. 신고하고 도움받고 싶었지만, 정신병 경력이 있어, 자신을 믿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유일한 혈육인 노쇠한 할머니는 시골에 계셨다. 할머니의 결사반대를 겨우 설득해서 온 거라 말씀드리진 못했다. 말씀드린다면 당장 돌아오라고 호통치실 게 뻔했다. 상경한 지 고작 1년 차라 주변에 도움을 청할 이도 마땅치 않았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보육교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보호자도 없이 정글 같은 서울에 입성한 그녀.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웠다. 신변상 위험이 생길까 두려웠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와 배려 따윈 없는 학원 강의만으로 김가을은 버거웠다.


'그래, 참자. 나한테 해코지한 것도 아니니까.'


보육교사 자격증 시험이 2달밖에 남지 않았다. 스토킹을 신고하고 경찰이 조사하고 재판에 출석하다 보면 소중한 공부시간을 거기에 뺏길 게 뻔했다. 게다가 여윳돈도 많지 않아 이번 보육교사 시험에 떨어진다면 다시 시골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반년 동안 괜찮았으니 두 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보육교사가 되는 일은 그만큼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차일피일 신고를 미뤘다. 지옥 같을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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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이른 아침. 여느 때처럼 김가을은 학원에 가기 위해 집 현관문을 나섰다. 계단 손잡이를 꽉 부여잡고 아슬아슬하게 내려와 미리 부른 택시에 탑승했다. 그 모습은 맞은편 상가 창문에서 머리를 내밀고 지켜보던 이하늘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는 택시가 떠나가는 걸 끝까지 확인했다. 저번엔 점자책을 깜빡한 바람에 택시를 돌려 집에 돌아왔었다. 오늘은 쭉 직진하는 걸 보니 두고 간 물건은 없는 모양이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택시의 꽁무니는 완전히 사라져 이하늘의 눈에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하늘은 상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태연하게 김가을이 거주하는 빌라 공동현관을 지나 그녀의 집인 401호실 앞에 섰다. 복도 천장에는 이하늘이 설치해놓은 CCTV 렌즈가 반짝였다. 그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링"


도어락 잠금이 풀렸다. 이하늘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자기야, 나 왔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 꺼진 어두컴컴한 거실만이 그를 맞이했다. 이하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직 내 것이 아니니까’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른손에는 무언가가 가득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이하늘은 봉투에서 당근, 콩, 달걀, 콩나물 같은 식자재를 하나둘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더니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요리하기 시작했다. 김치찜, 콩나물무침, 계란말이, 콩자반. 이하늘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메뉴였다. 온 집안이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맛있게 만들어진 반찬을 반찬통에 나눠 넣었다. 통 뚜껑 위에 반찬 이름이 적힌 점자 쪽지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 이하늘은 만족한 얼굴을 짓고는, 들고 온 또 다른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엇이고 하니, 사진과 편지다. 그녀를 위해 며칠 밤을 지새워 준비한 선물. 사진에는 김가을과 이하늘이 팔짱을 끼고 벤치에 앉아 하얀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었다. 편지에는 이하늘에게 보내는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이 늘어놓아 져 있었다. 김가을의 글씨체로 말이다.


그것만 보면 김가을과 이하늘, 둘의 사이는 영락없는 잉꼬 커플이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녔다. 이하늘이 실제 연인처럼 보이도록 합성한 가짜 사진과 김가을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위조한 가짜 연애편지였다. 그들 사이가 연인 사이임을 증명할 가짜 증거들. 하나같이 시각장애인인 그녀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잘 보이도록 집안 곳곳에 선물을 설치해두었다. 이하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행복한 미래가 절로 그려진 모양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하늘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빌라 현관이 잘 보이는 카페 의자에 앉아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눈물의 프러포즈가 될 거야'

'부디 그녀가 내 사랑을 알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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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 택시 한 대가 빌라 앞으로 도착했다. 내린 사람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김가을이었다. 그녀는 지쳤는지 축 처진 어깨로 빌라 공동현관을 통과했다. 계단은 왜 이리 높은 것인지 입에선 끙끙거리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까 이하늘이 섰던 그곳, 401호 현관문 앞에 그녀가 섰다. 여전히 천장의 CCTV 렌즈는 반짝거렸다. 김가을은 평소처럼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도어락이 '띠링' 소리를 내며 잠금을 풀었다. 반사적으로 손잡이 위로 손이 올라갔다. 그대로 손잡이를 돌리려는 그때, 뒤에서 싸한 인기척이 그녀의 등을 적셨다. 센서등이 켜질 때 나는 미세한 딸깍 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사람의 숨소리.


'누군가 내 뒤에 있어.'


하지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웃이었다면 인사를 건네거나 자기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등 뒤의 사람은 쥐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 사람이다….'


몇 개월째 본인을 스토킹하던 그 사람.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생존본능을 느끼게 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자는 그 사람밖에 없었다. 스토킹범. 딱 그 한 사람. 김가을의 손에서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 숨까지 막혀왔다. 긴장감에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어깨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넘어왔다.


"자기야, 오늘도 수고 많았어."


애틋한 연인 같은 속삭임. 그 속삭임이 귀에 닿자 소름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댔다.


"꺄아아아악!"


김가을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몸을 던지듯이 집어넣었다.


'우당탕탕’


신발장과 현관문을 쉴새 없이 박아댔다. 온몸은 난타당한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쓰러진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문을 닫고 잠갔다.


"엄마…. 엄마…."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핸드폰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을 손으로 허겁지겁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핸드폰 모서리가 닿았다. 그녀는 또 떨어지지 않게 핸드폰을 양손으로 힘껏 부여잡고, 통화 단축키를 눌렀다.


"1...1...7...6...4"


시각장애용으로 세팅한 터라 누른 번호의 숫자가 불러졌다. 112를 누르고 싶었지만, 자꾸만 잘못 눌러져 엉뚱한 번호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몇 번을 쓰고 지웠을까. 마침내 숫자를 완성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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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상황실의 발 빠른 처리로 신고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사이 스토킹범이 억지로 문을 열려는 등의 위협은 없었다. 김가을은 현관문에 기대어 경찰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김가을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사이렌 소리가 커질수록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김가을 씨! 경찰입니다. 문 열어주세요!"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조력자였다. 천만이 거주하는 서울이지만 그녀를 도와줄 존재는 그들밖에 없었다.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이 찾아온 것처럼 김가을은 서둘러 문을 열어 경찰을 맞이했다.


"괜찮으십니까? 이제 안전합니다."


김경진 경사와 박강원 순경이 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위로했다. 그 소리에 김가을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몇 분 동안 이어진 긴장이 풀린 것이다. 참아왔던 숨도 깊게 내쉬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긴장을 푼 탓일까.


'안돼, 안돼….'


김가을은 갑자기 호흡이 가빠졌고 누가 심장을 꽉 쥐는 것 같은 가슴 통증을 느꼈다. 사방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쓰러지는 김가을을 김경진 경사가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구급차 불러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제, 제가…… 공황장애……. 그 남자… 그 남자…!"


김가을은 숨을 헐떡이면서 가냘픈 손을 휘저었다. 그녀에겐 병원보다 그 남자가 중요했다. 이대로 실려 간다면 그 남자를 놓칠지도 모른다. 김경진 경사가 말했다.


"정말 병원 안 가셔도 괜찮겠어요? 남자는 밖에 있습니다. 저희가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휴식을 취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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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메뉴얼대로 움직였다. 둘을 분리해, 박강원 순경이 집 안에서 김가을의 진술을 듣기로 했고, 돌발행동 가능성이 있는 이하늘은 선임인 김경진 경사가 집 밖에서 진술을 청취하기로 했다. 김경진 경사가 말했다.


"피해자 심리가 지금 불안정하니까 각별히 주의해서 진술 청취해야 해. 알았지?"


"네, 걱정하지 마십쇼."


김경진 경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박 순경을 바라봤다. 신임이라 경험이 부족한 박 순경에게 불안정한 피해자를 부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피혐의자를 맡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도 경찰이었다. 걱정되지만 그를 믿어야 했다.

김 경사는 무거워진 발걸음을 이겨내고 이하늘을 데리고 빌라 밖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이하늘을 훑어봤다. 스토킹범으로 신고받은 사람치고는 침착해 보였다. 마치 조사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김 경사는 이하늘에게 여자와의 관계를 물었다.


"남자친구입니다. 평소처럼 집에 들어왔는데 절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정말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이하늘은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전형적인 애처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논리적이었고 진짜 연인인 것처럼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었다. 눈빛엔 걱정이 가득해 보였는데 종국에는 여자친구가 안타까운지 닭똥 같은 눈물이 양 두 뺨으로 사이좋게 흘러내렸다. '진짜 스토킹범이냐'고 묻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소 억척스러운 모습에 김 경사는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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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롭게 진행되는 김 경사와는 다르게 김가을을 조사하는 박 순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 스토킹…. 스토킹…."


충분한 휴식에도 그녀의 증세는 더 심각해졌다. 그녀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조사가 어려워 박 순경이 병원부터 가자고 했지만, 김가을은 한사코 거절했다. 김가을의 머릿속은 오로지 스토킹범 뿐인 듯 보였다. 박 순경은 답답한지 입술이 바싹 말라갔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인 건 알겠는데, 언제부터 그랬냐고요."


박 순경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피해 사실, 피해 시기, 스토킹처벌법의 처벌 요건인 지속성과 반복성 등. 물어볼 게 산더미였지만 뭐 하나 시원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몰라… 몰라요… 스토킹… 스토킹…."


박 순경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신임순경다운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걱정하지 말라고 외쳤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런 소득 없이 피해자 진술 청취를 끝낸다면 무능하다는 딱지가 붙여질 게 분명했다. 그 생각에 박 순경의 머리가 하얘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박 순경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정신과 약봉지와 벽에 걸린 액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액자 안 사진에는 김가을과 이하늘이 팔짱을 낀 채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김가을은 그 남자를 모른다고 했는데'


책상에는 김가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연애편지 수십 장도 쌓여있었다. 박 순경이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출동하면서 이하늘을 복도에서 처음 조우했을때 그는 본인이 신고자의 남친이며 여자친구가 정신병 때문에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주장했었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일단 알았다 하고 넘겼지만, 이 증거들은 남자의 말에 신빙성을 높여주었다. 박 순경은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는 김가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피해자가 맞긴 한 거야?'


결국, 박 순경은 여자가 거짓말 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혹시 정신병은 공황장애만 있으신 겁니까?"


박 순경의 말투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네…?"

"또 다른 정신병 있냐고요."


며칠 전 박 순경은 피해망상 여자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강도범이 자기 집에 숨어있다며 생난리를 피워댔다. 관할 내 경찰 수십이 투입되어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강도범은 그 여자의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 지랄 맞았던 피해망상증 여자. 그 여자의 얼굴이 김가을에게 오버랩됐다.


"공황장애…. 뿐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이 사진은 뭡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면서요."

"무, 무슨 사진…? 저, 전 몰라요."

"모른다고요? 이거 안 보이세요? 둘이 함께 사진 찍으셨잖습니까. 애인처럼!"

공기가 바뀌었다. 박 순경은 액자를 떼서 김가을의 눈앞에 갖다 댔다. 경찰의 어조는 악질 형사처럼 고압적이었다. 김가을은 마치 취조당하는 범인처럼 말을 더듬었다.


"아, 안보여요…. 저, 전… 안 보여…."


김가을은 뒷걸음질 쳤다. 칼로 위협당하는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었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경찰의 입에서 나온, 보이지도 않는 사진의 존재. 그리고 노골적인 정신병자 취급. 김가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사진이라니…. 그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김가을의 마지막 이성 교제는 3년 전이었다.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현재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분명 없어…. 없다고…. 진짜 없는데…. 기억에 없는데…. 기억에 없다…? 기억에 없는 건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혹시 있었나…? 있었는데 기억을 못 하나…? 미쳐서? 미쳐서 내가 잊어버린 건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에 당연한 사실조차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가을은 몸이 돌처럼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남친하고 싸웠죠?"


박 순경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짝다리를 짚고 여유로운 표정마저 지었다. 박 순경은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주장이 맞았다. 파헤쳐봤더니, 오히려 남자는 무고죄 피해자고 여자가 가해자였다. 실체적 진실을 찾았다고 생각한 박 순경은 작은 희열마저 느껴졌다. 이제 그는 가해자를 풀었다 조이면서 자백만 받아내면 될 것이었다.


"괜찮아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이제라도 자백하면 현장 종결할 수도 있어요."

여전히 김가을의 입은 조개처럼 꾹 닫혀있었다. 오히려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오해받는 이 상황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저지른 범죄가 들통난 범죄자처럼 김가을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머리를 푹 숙였다. 안타깝게도 그 모습은 여자가 스토킹법을 악용한다는 박 순경의 희미했던 심증을 단단히 굳히고 말았다.


'이 사람이 진짜…….'


박 순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뻔뻔하게 서 있었다. 박 순경은 아무래도 이 여자한테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다. 곱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선량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이걸 악용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따끔하게 혼내줘야 할 것이다. 박 순경의 머리엔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김가을 씨. 잘 들으세요."


박 순경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처음엔 무고죄를 들먹였고, 요즘은 무고죄를 중범죄로 본다느니 징역을 살 수 있다느니 같은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마지막에는 급기야 남친한테 미안하지도 않냐며 김가을의 인성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남친한테 아주 큰 잘못을 하고 계신 거라고요. 싸움 한번 했다고 병수발 다 들어주는 남친을 전과자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김가을은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훈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녀의 머리는 익은 벼처럼 점점 땅으로 숙였고, 더는 숙일 공간이 없자,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 대로변에 던져진 것 같았다. 수치스러웠다. 억울했다.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김가을은 미친 사람처럼 울기 시작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목놓아 울어댔다. 갑작스럽게 복받쳐 터져버린 김가을의 울음에 강경하던 박 순경의 두 눈이 흔들렸다.


"왜… 왜 울고 그래요."

박 순경이 쩔쩔매던 그때 김경진 경사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문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들어와서 보니,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보이는 김가을과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는 박 순경의 모습이 김 경사의 눈에 들어왔다. 김 경사는 박강원 순경을 급히 밖으로 물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 경사는 김가을에게 머리를 숙였다.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박 순경에게 대충 상황은 들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진 것이다.


'내가 좀 더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김 경사는 그렇게 후회하며 한참 동안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닫혀버린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엎어진 말은 다시 쓸어 담을 수 없었다. 김가을은 김 경사의 눈도 맞추지 못한 채, "그만하고 가 달라"는 말만 되뇌었다.


김 경사는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보려고 갖은 방법을 썼다.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무전기에서는 신고가 밀려들어 오고 있으니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지구대의 재촉 무전이 빗발쳤다. 하지만 김가을은 거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울음은 그쳤으나 탈진한 듯 지쳐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괜찮으니 그냥 가 달라"는 말뿐이었다.


김 경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박 순경 말대로 둘은 연인 사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김가을 집에는 이하늘이 그녀와 연인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버젓이 존재했었고 이하늘은 그녀를 가족처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연인관계에서도 스토킹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스토킹 범죄가 되려면 스토킹 행위를 지속, 반복적으로 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현재 이하늘이 스토킹했다는 김가을의 초기 진술만 있었을 뿐, 도대체 몇 번이나 스토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토킹법의 한계였다. 이대로 김가을의 추가 진술이 없다면 이하늘에게는 경고만 주고 끝낼 수밖에 없었다. 김 경사가 말했다.


"김가을 씨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부 저희 잘못이에요. 하지만 이제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김가을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더욱 끌어당겨 웅크렸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경찰은 더는 조력자로 보이지 않은 듯했다.


"가세요…. 제발…."


차가운 말만 돌아왔다. 그녀는 경찰과 완전히 척을 진 듯 보였다. 김 경사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머리를 싸맸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골치 아픈 상황에도 지구대의 재촉 무전은 끝없이 쏟아졌다. 김 경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 순경이 말했다.


"김 경사님, 피해자 말에 따라 스토킹 신고 처리하시고 저희는 그만 해산하시죠. 지금 상황에는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틀린 말이 아녔다. 실제로 그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 경사가 이하늘에게서 느낀 위화감…. 김 경사는 문밖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이하늘을 바라보았다. 이하늘의 눈빛은 아픈 여자친구를 걱정하는, 영락없는 남자친구의 눈빛이었다. 어쩌면 경찰인 우리가 남자친구의 정당한 여자친구 간호를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찝찝하지만 결국 그는 밝혀진 사실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 했다.


김경진 경사는 이하늘에게 스토킹 재발 시 처벌될 수 있다는 스토킹법 상의 형식적인 경고 처분을 내렸다. 이하늘은 자신이 스토킹범이 아니라며 항변했지만 처벌하는 건 아니라는 말에 이내 순응했다. 머리를 숙이고 주저앉아 있는 김가을에게는 메뉴얼에 따라 스토킹 범죄 피해자 권리 안내서를 주었다.


"권리 안내서입니다. 이거 잘 읽어보시고. 아…."


글로 된 안내서. 여자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김 경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걸…."


김 경사는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뒤졌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형 안내문이 지구대에 보급된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김 경사의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멈춰 섰다. 김가을이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김 경사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안내서를 쥔 손은 잘게 떨렸다. 김 경사는 이 사태가 박 순경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피해자의 시각에서 진술을 듣지 못한 경험 없는 신임경찰의 실수라 믿었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박 순경만의 문제였을까? 김 경사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니, 경찰이라는 조직 전체가 그녀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고 그녀의 입을 닫게 했다. 대체 우린 누구를 위한 경찰이란 말인가. 김 경사는 허탈한 표정으로 김가을을 바라봤다. 김가을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경사는 말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장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중요한 부분은 반복해서 읊어주었다. 하지만 혼이 빠진 그녀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의 핸드폰에 설명을 따로 녹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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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서 규정된 절차가 모두 끝났다. 김경진 경사에게 주어진 임무는 종료됐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안내서도 그렇고 우악스러운 남자친구도 그렇고 찜찜한 것 투성이였다.


"순21, 빨리 복귀하라고! 거기서 놀고 있나?"


지구대장의 불호령이 전파를 타고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김 경사는 꺼림칙함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결국 문밖을 나서야 했다. 순찰차에 타면서도 그는 안쓰러운 눈으로 불 켜진 401호를 바라보며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때마침 들어온 또 다른 신고에 김경진 경사의 차는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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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 또 다른 사건을 마치고 지구대로 돌아가는 순찰차 안에서 김경진 경사는 박강원 순경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박 순경은 아직도 김가을을 허위신고자로 의심했다.


"그 여자 거짓말하는 거라니까요"


박 순경의 발언에 김경진 경사의 언성이 높아졌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모든 진술을 청취한 후에 판단했어야지. 본인 탓이라고 느껴지면 피해자는 입을 닫아버린단 말이야."


김경진 경사의 한숨이 땅이 꺼지듯 내려앉았다. 아까 빌라에서 박 순경의 상황설명을 간략하게 들었을 땐, 그저 박 순경이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했다는 정도의 뉘앙스였는데 그 실상은 생각보다 심각했었다. 어쩌면 경찰의 잘못 때문에 피해자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듣지 못하고 종결한 걸 수도 있었다.


'피해자가 말하지 못한 게 무엇일까?'


조수석에 탄 김 경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김경진 경사. 그는 은혜를 갚기 위해 경찰이 됐다. 그의 형은 2급 지적장애인이었다. 6세밖에 되지 않는 지능을 가진 형은 툭하면 집에서 사라졌다. 버스를 좋아해, 눈앞에 버스 한 대만 지나가면 정신을 못 차리고 따라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잠깐 한눈판 사이에 형은 실종되곤 했다. 그때마다 집 바로 옆 파출소의 경찰관분은 자기 일처럼 두 팔 걷고 형을 찾아다녔다. 실종 기간이 길어지는 날에는 퇴근한 이후에도 파출소에 나와서 어린 김경진의 손을 잡고 주변을 수색했다. 어린 김경진은 그 경찰이 매번 이렇게 도와주는 게 의아해서 한번은 왜 그렇게까지 우릴 도와주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와 부모님의 마음이 찢어질 테니까. 나도 이렇게 불안한데 너는 얼마나 걱정스럽겠니. 미안해하지 말아라. 이게 내 일이니까"


그 경찰관은 우리의 맘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셨다. 그날부터 어린 김경진은 경찰의 꿈을 꿨다. 그냥 경찰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이해하는 인권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받은 은혜를 되돌려주기 위해 김경진 경사는 노력했다. 인권에 관해 공부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지금은 나름 인권 전문가가 됐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오늘, 김 경사가 꿈꿔왔던 것과 정반대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피해자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는커녕 피해자의 입을 막아버렸다. 김경진 경사는 고개를 들어 조수석 창문 밖, 밝게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그때 나 같은 놈을 경찰로 만났더라면…. 그때 경찰이 진심으로 대하지 않아서 형이 잘못됐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난 경찰이 되지 못하고 방황했겠지. 만약 오늘 사건에 내가 아니라 그 경찰분이 오셨다면 피해자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까….'


김경진 경사의 눈에 참회의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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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경사는 지구대로 복귀하고 답답함에 여기저기 자문을 구해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박 순경과 똑같은 말이었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에이 잘했어, 누가 봐도 애인끼리 싸우다 허위 신고한 거잖아. 뭐 그런 일이 한둘이야?"


걱정스러운 마음에 김가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됐어요"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김경진 경사는 분명 인권 경찰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의 대처는 분명 미숙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난 무엇이 부족했으며, 무엇을 노력해야 했었을까.'


김경진 경사는 찾기 시작했다. 경찰이 지켜야 할 시각장애인을 어떻게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될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


그날 이후 김경진 경사는 짬이 날 때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걸어보고 눈을 감고 밥도 먹어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려고 했다. 시각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다. 불쌍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찝찝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몸이 불편한 그들도 우리가 지켜야 할 국민이니까. 경찰은 피해자 입을 막는 게 아니라 귀를 활짝 열고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야 할 존재니까. 다만 그들은,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좀 더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경찰이라면 그들을 잘 알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한다면 다음엔 더 잘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점자책을 샀다. 점자 강의도 들으러 다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서를 만들기 위해서. 점자프린터도 사비로 구매했다. 퇴근 이후에 쉬지 않고 점자 안내서를 만들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린 김경진의 손을 잡고 형을 찾던 그 경찰처럼,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오돌토돌 점자가 찍힌 최초의 스토킹 피해자 권리 점자 안내서가 김 경사의 손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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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날, 경찰차를 타고 순찰하던 김경진 경사는 완성된 점자 안내서를 건네주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띵동'


"계십니까? 김가을 씨, 경찰입니다."


집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안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몇 번 더 초인종을 누르며 신분을 밝혔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박 순경이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


직접 건네주고 싶었지만, 김 경사는 할 수 없이 점자 안내문을 현관문 손잡이에 붙여놓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김 경사는 건물 입구를 벗어나 경찰차에 탑승하려 차 문을 열었다.


'스륵'


순찰차를 빌라 벽면에 바짝 세워놓은 바람에 가로등 옆에 놓인 쓰레기 봉지들이 차 문 아래에 걸렸다. 김 경사는 걸린 쓰레기 봉지를 치우려고 제일 위에 있던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낯익은 물체가 쓰레기 봉지 안에 보였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쪽지 여러 장. 평소라면 지나쳤을 테지만 그건 그냥 쪽지가 아녔다. 점자가 찍힌 쪽지. 이하늘이 김가을의 반찬통에 붙여놓았던 그 점자 쪽지다. 김 경사가 그녀의 집을 수색할 때 식탁에서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수상했던 그 남자. 김경진 경사는 무의식적으로 쓰레기봉투를 풀기 시작했다.


"선배님 뭐하십니까? 그냥 가시죠. 저희 할 만큼 했습니다."

"기다려봐"


김 경사는 쪽지를 꺼내 손가락을 짚어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했다. 한장 한장 점자를 해독해갈수록 김 경사의 얼굴이 굳어갔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박 순경. 당장 지원 요청하고 테이저건 꺼내!"

"예? 무슨 일입니까? 선배님?"


김 경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순찰차 뒤편으로 뛰쳐나가 허겁지겁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트렁크 깊숙이 있던 빠루를 꺼내 들었다. 김 경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김가을이 사는 빌라로 뛰어 들어갔다. 박 순경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 경사 뒤를 따라갔다. 그가 이렇게 사색이 된 이유. 쪽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경찰이 널 도와줄 것 같아?]

[넌 못 벗어나]

[신고하면 죽여버린다.]


'캉!! 캉!!'


김 경사는 빠루를 문틀에 끼우고 손잡이 부분을 망치로 두들겼다. 지렛대 원리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요령이 부족한지 문은 꿈쩍하지를 않았다. 김 경사의 손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한 그때,


"선배님 비켜보십시오!"


박 순경이 김 경사 쪽으로 달려오다 부딪히기 직전 힘껏 날아올랐다. 날라차기 자세를 취했고 오른쪽 발바닥을 정확히 지렛대 손잡이에 꽂아버렸다.


'우드득!'


잠금장치 부분이 박살 나면서 꼼짝하지 않던 문이 열렸다. 김경진 경사와 박 순경은 거실로 뛰쳐들어갔다. 그곳에는 손발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있는 김가을과 그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이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하늘! 너를 납치 감금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는 이하늘. 이번에도 박 순경이 이하늘 향해 날아올랐다.


'으악!'


팔뚝에 날라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이하늘이 허공을 날아 철퍼덕 쓰러졌다. 박 순경은 서둘러 칼을 회수하고 엎어진 이하늘을 제압했다. 그사이 김 경사는 묶여있는 김가을에게 달려가 입을 봉인한 테이프를 뗐다.


"경찰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가을 씨."

"경찰관님…."


손에 묶인 테이프까지 잘라내자, 김가을은 김 경사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김 경사가 멈칫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김가을을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


바깥에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하나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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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있은 뒤로 두 달이 지났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김가을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며 서부지구대 입구에 들어섰다. 프런트에 앉은 여성 경찰관이 걸어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김경진 경사님께 감사 인사드리러 왔는데, 혹시 계신가요?"

“아, 그분은 승진하셔서 경찰청으로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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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경찰청 1층 프런트. 김경진 경위가 수화로 프런트 경찰직원과 대화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김경진 귀가 흰색 붕대로 꽉꽉 싸매져 있다. 그의 뒤에는 많은 직원이 분주히 움직였다. 무슨 일이고 하니, 출근하는 경찰청장이 정문을 통과 중이었다. 경찰청장과 마주친 직원들은 청장이 앞에 지나가자 절도있게 경례했다. 1층은 순식간에 충성 소리로 가득 찼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김 경위가 이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출근하던 경찰청장의 두 눈에 열심히 수화 중인 김 경위가 들어왔다.


"저 친구가 그 친구인가? 점자를 배워서 피해자 구조했다는?"

보좌관은 고개를 돌려 청장이 가리킨 자를 유심히 보고는 대답했다.


"아 맞습니다. 요즘 우리 경찰청 유명인사, 김경진 경위 맞네요.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그러더니 오늘도 뭔갈 하나 보네요."


경찰청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수화 삼매경 중인 김 경위 뒤로 다가갔다. 바로 뒤에 청장이 접근할 때까지 김 경위는 눈치채지 못했다. 같이 수화하던 프런트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보라며 눈치를 주자 그제야 김 경위를 뒤를 돌아봤다.


"아 오셨습니까? 청장님!"


귀를 막아놓은 바람에 김 경사의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처럼 커졌다. 청장은 귀가 아픈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래, 이번엔 청각장애에 대해 이해해보려는 건가?"

"예? 청장님 잘 안 들립니다!"


김 경위의 표정은 천진난만했다. 청장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온화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청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하게! 응원하겠네!!"

"예? 안 들립니다!!"


청장은 머쓱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변 보좌진들도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기 바빴다. 청장은 더 크게 말하려 움찔하더니 이내 포기하고 엄지를 척하고 들어 올렸다. 김 경사도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볼일을 마친 청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청장이 사라지자 그 많던 직원들도 사라져갔다. 그때, 직원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한 여자가 보인다. 김 경위의 눈에도 그녀가 들어왔다.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을 씨!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김 경위가 그녀를 향해 뛰었다. 끔찍했던 그 일이 겨우 두 달 전이었지만 김가을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김가을이 말했다.


"기쁜 소식 들려주러 왔죠. 저 이번에 보육교사 됐어요."


김 경위는 김가을의 입 모양에 집중했다. 좋은 소식을 전해줬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청각장애에 관해 연구 중이라 안 들려요. 잠시만요!"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김 경위는 주머니에 있던 펜과 종이를 꺼냈다. 말하는 내용을 상대방이 쓰는 방식으로, 김 경위가 자주 써왔던 방법이었다. 김 경위는 펜과 종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이내 본인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아…."


김가을은 펜과 종이에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경위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는지 그녀가 씩 웃었다. 김 경위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김가을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손가락으로 김 경위의 팔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김 경위는 그녀가 무엇을 쓰는 것인지 집중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도 씩 웃었다.


다섯 글자의 짧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진 경위는 그동안의 노력이 보답받은 느낌이었다. 승진도, 포상휴가도 이토록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아마 고단한 경찰이란 직업은 이 말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김경진 경위는 또다시 경찰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국민을 위해 멀쩡한 눈과 귀를 막아댈 것이다. 아마 다음은 팔과 다리를 묶고 다닐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이 다섯 글자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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