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 딴짓하기

재미 찾아 곁길로

by EunJoo Shin


글쓰기를 시작하며


예술가로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죽기 전에 책 3권은 꼭 쓰고 싶다. 딱 3권!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수년을 보낸 것 같다. 준비가 길어지니 용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완벽한 작품 구상은 불가능하다. 글쓰기 또한 그럴 것이다. 최근 유영만 교수님의 여러 책들을 읽으며 '지금'이 바로 시작할 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용기를 내서 하고 싶은 3개의 이야기 중 그 첫 번째를 시작한다. 완벽한 준비는 아마도 시작 이후에 가능한 것이라 믿으며.


재미 찾아 곁길로


초등(국민) 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날마다 학교에 가야만 하는 것에 불만이 생겼다. 사회를 향한 최초의 불만이었다. “누가 학교를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라고 투덜거리며 학교 가기를 종종 거부했다.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고 하고, 어느 날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고, 어느 날은 그냥 힘들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또래보다 키도 작고, 밤마다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리는 여리여리 어리바리 한 여덟(지금 7살) 살의 어린 여자 아이가 40분 이상 걸리는 들길과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정말 고되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선생님들의 근거 있는 차별과 변덕은 학교를 더 싫어하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동네 친구들이 나를 가엽게 여겨 잘 데리고 다녔다. 책가방도 들어주고, 손도 잡아 도랑을 건너주고, 들꽃을 꺾어 건네주기도 하는 아이들 덕분에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것 같다.


학교 말고도 세상에는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논둑 밭둑길을 걸어가면 온갖 모양의 작은 들꽃이 눈길을 붙잡는다. 풀벌레 소리를 따라 다가 가면 소리를 죽이고 숨어버리는 풀 벌레를 찾아보곤 했었다. 그 조그만 몸에서 쏟아내는 그 큰 소리가 신기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언제나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꽤나 재미가 있었다. 그 버거운 길을 견디게 하는 또 다른 즐거움은 친구들, 아이들이었다. 이말 저말 하면서 떠들고 뛰고 장난을 치다가 이내 싸우고 울고불고 야단을 맞으며 놀던 친구들이 학교 선생님보다 교과서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날마다 반복되니 심드렁해졌다. 그래서 나는 늘 아이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곁길로 빠져서 혼자만의 딴 짓거리, 어제와는 다른 놀이를 즐기곤 했다. 멀리서 "은주야 어딨어?"라는 친구들의 외침을 귓전으로 흘리며. 돌이켜보면 나는 이제까지 "뭐 했어?"라는 질문에 "놀았어!"라는 성의 없는, 그러나 사실에 근거한 대답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예측 가능한 것은 흥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반복되는 일상은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아마도 그 어린 시절에 몸으로 알게 되었다.


전대미답(前代未踏)이란 ‘아무도 밟지 않은 땅’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뜻한다. 눈이 내려 소복하게 쌓인 새벽길을 처음 걸을 때, 파도가 사람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모래사장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길 때, 그때의 설렘이 바로 '전대미답의 즐거움'이다. 전대미답의 핵심은 ‘먼저’다.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나 자신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존재는 전대미답을 밟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새로운 길이 무엇인가 대단히 훌륭하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눈 내린 오솔길에 발자국 남기기와 같은 것이면 좋다. 모든 인간 개체가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태어나서 각기 다른 새로운 길,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각자가 느끼는 재미가 다르고 즐기는 방법이 다르다. 다만 그 많은 '다름'이 다른 사람의 무수한 발자국 속에 묻혀버릴 뿐이다.


그러나 '다름' 속에도 상당한 유사성이 있고,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나는 애써 그 유사성을 거부했고 동일성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뻔히 아는 것,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평탄한 포장도로를 벗어나 풀이 무성한 흙을 밟아야 하는 불편함과 고독을 즐겼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몰려가는 포장도로의 군중들은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들꽃의 미소가 있었고, 정신을 맑게 하는 풀내음이 있었고, 생명의 참모습을 가르쳐주는 풀벌레의 처절한 외침이 있었고, 성찰이라는 단비가 내리고 있는 곁길을 걸었다. 무엇보다도 친구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 깔깔대며 웃는 소리, 욕하고 싸우는 소리를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들으며 ‘생명이 만들어내는 삶의 경이’를 느끼는 그 호젓함을 즐겼다.


곁길에서 즐기는 딴 짓거리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쩌면 ‘성찰’이라는 단어보다는 덜 거창한 그저 나의 언행을 돌아보며 내가 어떤 인간인지 가늠해 보는 반성이었고,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을 보다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내는 거울의 시간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무지'에서 갈등과 폭력이 태어나고 폭력은 단절이라는 악으로 성장한다. 그 악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그런 사람은 되지 않으려 했고, 나와 같이 길을 걸으려 손을 잡아준 어릴 적 친구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 곁길에서 즐기던 딴짓이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따라 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나를 만들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겼다. 누군가에 의해 세상으로 던져진 존재인 '나', 그렇지만 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편안한 길을 따라 살아가며 그 누군가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되는 나 만의 길'을 찾아 걷는 것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군중은 편안함을 사랑하지만, 창조자는 고독에서 새로운 세계를 낳는다. 군중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키에르케코르의 말이 어느 정도 나에게도 적용되었던 것도 같다. 어린 시절 힘들고 어려운 등굣길에서, 남들을 따라가지 않고 굳이 곁길을 찾아 나만의 딴짓을 찾아서 즐기기를 선택했던 것은 아마도 비슷비슷한 것, 유사한 것에 대한 지루함, 재미없음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재미있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도 힘들고 지치고 다치기도 하고 때로는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운동을 더 열심히 한다. 진짜 진짜 그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곁길에서의 딴짓도 그랬다. 힘들고 외롭지만, 그 길만이 나에게는 진짜 기쁨이었고 삶의 의미 었다.


군중 속에 섞여 사는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어떤 길에서도 고독과 좌절은 피할 수 없다. 오히려 더 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돌아다보니, 남들이 밟아서 평탄해진 땅,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느라 넓어진 길, 전통과 관습에 순종하는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 곁길을 걸으며 즐겼던 딴 짓거리가 꽤 다채롭고 흥미진진했고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창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미와 보람을 안겨주기도 했던 곁길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려 한다. 누구도 밟지 않은 길 위에서 내가 발견한, 나만의 소소한 전대미답(前代未踏)의 기록을. 그 누군가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