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 - 에피소드 1

by EunJoo Shin

독신의 불편함 - 파스 붙이기


지난주부터 목과 양쪽 어깨가 많이 무겁고 아프다. 전에 지어다 놓은 약을 다 찾아 먹었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마도 요즘 좀 무리를 했는지, 목 디스크 통증이 다시 시작된 것 같다. 병원은 설 연휴 휴진이라서 핫 팩 찜질로 견디다가 지난해 아는 동생이 일본에서 사온 파스가 생각났다. 일본에 여행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전 파스’라면서 자주 사오는 파스다. 그동안은 어깨도 등도 아프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고 잘 두었는데, 어제 그 파스를 처음 붙여보게 되었다.


이 파스 포장지에는 아픈 곳에 따라 어느 부위에 붙여야 하는지 친절한 그림 설명이 있었다. 나의 증상은 첫 번째 그림처럼 목에서 어깨 쪽으로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이 파스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둥근 모양의 작은 크기다. 그림에 따라 정확한 부위에 파스를 붙이면 효과가 좋겠지만 혼자서 그 작은 파스를 정확한 부분에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붙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이웃에게 파스를 들고 가서 부탁하는 것은 번거롭고, 타인의 손을 빌릴 만큼 절박하지도 않았다. 앞집 권사님께 부탁하면 아마도 오셔서 친절하게 잘 붙여주고 가셨겠지만, 부탁하고 오시고 담소를 나누며 차라도 한 잔 드려야 하는 이런 저런 일이 귀찮았다. 그래서 혼자서 거울을 보며 근접한 부위에 파스를 붙였다. 그리고 그 이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쉬었다. 파스를 붙인 부위가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해서 불편했지만 통증보다는 견디기가 나았다.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목을 돌리기도 좀 편하고 어깨를 짓누른 것 같은 무거움도 사라지고 통증도 훨씬 덜했다. 그래서 어제 붙였던 것을 떼고 새로 붙였다. 이번에도 정확한 자리에 붙이지 못했다. 나름대로 스트레칭 습관을 들이고 걷기, 스쿼트 등 맨손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몸의 유연성은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몸의 뒤편 어느 부위에 정확하게 파스를 붙이기는 역부족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혹시 혼인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 살아오는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불편한 점을 물어오면 나는 진담을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 내가 결정한 것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인생에 남성을 끼어들지 못하게 한 것,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혹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혼자서 남자 없이 살면서 불편할 때는 "등 쪽에 지퍼가 있는 옷을 입을 때, 벽에 못을 박을 때나 그림을 걸 때,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제 오늘 혼자 살면서 불편한 한 가지가 더 생겼다. 비교적 넓은 크기의 우리나라 파스는 대충 붙여도 통증 부위가 잘 덮인다. 이 일본 파스는 작아서 통증 부위에 정확하게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알아보니 대충 근처에 붙여도 효과는 동일하다고들 한다. 다행이다.


파스 붙이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남편과 자식이 함께 살아도 자기가 직접 벽에 못도 박고, 뒷 지퍼가 있는 옷도 혼자서 입고, 파스도 혼자서 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가족이란 울타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래한 일을 해달라고 말하기가 귀찮아 그냥 혼자서 해버린다는 것이다. 정 안되는 일은 요구하면 해주겠지만, 서로 눈치보고, 아니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게 사실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 일인가. 그래야 그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유지된다니. 그러면 그 울타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보호? 소속감? 내 편이라는 증표? 결혼이든 동거이든 그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살면서 그 울타리가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울타리를 부셔버리고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드는 일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의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즐겁게들 하고 있는지 오래 동안 보아왔다. 그 의미 가치가 무엇인지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확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울타리 내에서만이 자기 존재의 의미 가치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가족들 사이에 있어야 자기 존재의 당위성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장해서 늙어가고 있는 자식들 또는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잘 살아가는 자녀들, 이미 충분히 독립해서 잘 살고 있는 자녀들을 대상으로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의 돌봄이나 도움의 울타리를 넓혀가며 일을 만들어 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반찬을 해서 들나르는 것, 문만 열고 나가며 10분 이내의 거리에 온갖 맛집이 여기 저기 있는데, 퇴직하고 집에 있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나이든 여성들에게 가족은 울타리 그 이상, '존재할 이유'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 남편, 아내, 자식들 모두 가족 중 누구 하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기 존재를 규정하고 살아갈 이유를 애써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개인, 개체로서의 인간 아무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고, 개체,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아니 생각하기조차 싫어한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가정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저냥 살아간다. 남편과 아내, 자녀들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해주면 살아간다. 말로는 '고맙다'고 하지만 정말로 고마운 것인지 부담스러운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그런 삶이 나쁜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날 '최고 최선의 공동체로 인정 받는 가족제도'가 이어지고 있고 그 가족이 사회의 안전망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가족 이기주의와 가족 구성원 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내는 갈등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하다. 어쩌면 그런 가족 이기주의와 가족 내의 불만이 이 사회의 대분분의 불법과 위법의 이유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가족이라는 구성원의 관계성은 사실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것 같다. 애써서 지키는 것일 뿐이다. 가족이 최후의 안전망이라는 신화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가족 이외에 내가 굳이 또 다른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가족 속에서 나의 정체를 확인하며 그 속에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라는 개체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결혼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린 이유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하는 그 모든 것이 버거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버거움을 기꺼이 견디고 즐기며 보람으로 여기며 살지만, 온 인류가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족, 지역공동체, 국가 등으로 울타리를 치고 서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경쟁하고 빼앗고 빼앗기는 이 무한 반복되는 폭력의 근거가 어쩌면 가족,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가족제도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대부분의 거대담론이 그러하듯이 실현 불가능한 탁상공론이다.


개인이 독신으로 사는 이유는 많은 것 같지만 별거 아닌 이유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 별거 아닌 이유가 사람에 따라 그 중요성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이유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0가지의 중요하고도 좋은 이유가 있지만 아주 사소한 불편이 자주 반복되면 10가지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그 사소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9가지의 좋은 점을 버리고 아주 단순게 편의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요즘 "나는 이제 강아지나 고양이 심지어는 식물과도 같이 못 살 것 같다."라는 말을 종종한다. 귀찮아서다! 하나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수 많은 책임과 귀찮음을 견딜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극강의 이기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산는 것은 한 개체가 누릴 수 있는 정말로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그 누군가에게 간섭을 받거나 그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삶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꼭 그렇게 살고 싶은 그 어떤 것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강렬한 삶의 목적이 있어도 결혼을 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낼 만한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외롭고 고독하게 사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로 바보짓이라고 생각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지하는 것은 소설 <테스>에서 나오는 ‘프라이팬이 뜨거워 튀어나왔더니 숯불 속이었다.’라는 말과 같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숯불을 견디며 살아온 많은 사람들은 ‘가정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을 마치 대단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겪어야 했던 위험과 고난을 참아낸 모험처럼 이야기한다. 그 고생이나 모험의 대부분은 가족 내의 인간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사고 등을 겪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다. 평범하기 위해 자초한 일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결혼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설날 연휴가 끝나면, 사람들은 일상에서 겪은 갈등과 어려움을 과대 포장하고 미화시키며 보잘 것도 없고 들늘 것도 없는 그저그런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것은 혼자서 사는 내가 어제 오늘 겪었던 일본 동전파스 붙이기와 같은 어려움일 뿐이다. 삶에서 만나는 사소한 불편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관계를 맺거나 끊어버릴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못 박기, 무거운 것 옮기기, 혼자서 뒤 지퍼 옷 입기, 등에 파스 붙이기(누군가 이걸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주면 좋겠다!) 등등이 어렵고 힘들어 누군가와 같이 살기로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일까? 사소한 불편과 혼자라는 불안이 그 보다 더 중요한 가족이라는 가치와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삶의 방식을 흔들고 깨버리는 일 또한 신중하지 못한 바보짓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서 살아간다. 가정을 이루거나 독신으로 살아가거나 자기만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다만 타자(가족포함)에게 의존하는 자기 존재의 삶인가 아니면 주체로서의 삶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정 내의 삶 속에서도 주체적인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침에 동전 파스를 다시 붙이고 어깨가 가벼워져서 동생이 준 통영 굴을 넣고 ‘굴 떡국’을 끓여서 설날 떡국을 미리 먹으며, 혼자 살아도 다른 사람들 덕에 살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삶은 충분히 보호 받고 있다는 관계망은 가족보다 더 든든한 소속감을 준다. 내 편이라는 문서는 없지만 내 식탁에, 내 몸으로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며, 이렇게 사납게 눈보라 치는 설 연휴를 혼자서도 푸근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도 더 늙으면 벽에 못질도 하고, 무거운 것들을 옮겨주고, 뒷 지퍼를 올려주고, 파스도 붙여주고, 간단한 심부름을 할 수 있는 AI로봇이나 하나 사야겠다. 아마도 그가 나를 많이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다. 어쩌면, 혼자 살아가도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나만의 조용한 시간, 나만이 즐기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제한된 자유를 좀 더 많이, 좀 더 자주 누리고 있을 뿐이다. (202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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