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79일째에 썼던 글을 마지막으로 다시 무기력증에 빠져 브런치를 계속 놓고 있었다. 거진 10개월 만이다. 내 글을 읽어주셨던 분들은 금주 79일 이후 멈춰진 글 목록을 보고 금주가 실패했겠거니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의외로 난 금주에 성공했다. (원래 한다고 마음먹고 시작하면 완벽하게 해야만 하는 성격인데.. 그렇기 때문에 시작 자체를 평생 미루는 그런 스타일의 종자다)
오늘로 금주 365일 하고도 이틀이 더 지났다. 금주 100일쯤부터는 무알코올 맥주도 마시지 않게 되었고,150일쯤부터는 무알코올 맥주 대신 마시던 탄산수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금주 300일쯤부터는 금주 1000일로 목표를 상향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1년 목표를 채웠다고 바로 금주를 그만두기에는 그동안의 노력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년의 시간 가지고는 20년 동안 이어왔던 폭음의 굴레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나 자신이 제일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D+365일을 찍자마자 술 생각이 났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참치회에 화이트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집 선반에는 이날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좋아하는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블랑이 같은 자리에 1년 넘게 방치되어 있고, 소고기에 마실 브래드 앤 버터의 피노누아도 그 옆에 있다. 그저 아무 안주 없이 글렌피딕 싱글몰트도 한잔하고 싶다. 애써 이런 생각들을 외면하려고 평소 먹지도 않는 아이스크림에 집착해 몇 십만 원치나 소비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과 하나 달라진 점은 #미치도록 은 아니라는 거. #죽을만큼 은 아니라는 거. 그래서 1000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500일 이후까지는 계속 금주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금주 1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떠올렸던 생각은
금주가 성공했다고 인생에서 나아진 건 없다
였다.
금주를 하는 동안 이 생각 때문에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간혹, 좌절의 포인트로 다가오긴 했었다. 금주만 성공해도 인생이 많이 바뀔 거라 기대했었는데.. 더 긍정적으로 바뀌긴커녕 크게 부정적으로 바뀌었던 점도 많았다.우울 때문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더 우울해진다는 점을 1년 내내 온몸과 온마음으로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술을 마실 때는 그래도 알코올의 힘으로, 알코올에 의지해 몸과 마음이 움직였던 거였구나 깨닫기도 했다. 심각한 알코올중독자라 하면 술이 없으면 손을 벌벌 떠는 극단적인 모습만 떠올렸지.. 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게 될 줄은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앞의 글들에도 밝혔었지만 살기 위해 일은 쉬지 않고 꾸준히 했다. 기존 쓰리잡 중 두 개의 직업도 그만두고 한 직장에서 일주일에 6일, 하루 6시간만 딱 일하는 변화는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시간은 그냥 누워서만 지냈다. 하루 16시간을 계속 누워있는 건 기본이고 자다 지쳐서 깨면 유튜브를 보고 다시 잠들고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그 방대한 유튜브의 세계에서 내가 안 본 영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내 알고리즘에 한해서겠지만)
우울하거나 화가 난다. -> 술을 진탕 마신다. -> 자괴감에 빠지고 우울해지며 스스로에게 또 화가 난다. -> 술을 또 진탕 마신다.
우울해서 술을 마시면 더 우울해지고 우울하니깐 또 술을 마시고.. 이런 알코올의존증의 굴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금주를 결심했던 거였지만.. 막상 금주를 하는 동안 어딘가 병이 난 것 같았다. ('아, 나 진짜 뭔가 크게 잘못된 거 같아' 싶었다)
어딘가가 크게 고장이 난 것처럼.. 몸과 마음에 큰 구멍이 뻥!!하고 뚫린 기분.
금주를 한다고 인생이 바로 찬란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는 잔혹동화 같은 결말. 그렇게 10개월 넘는 시간 동안 무기력증에 빠져 누워만 있었다는 얘기를 참 길게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며 계속 의지를 다졌다. 20년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는데.. 겨우 1년 가지고 징징거리면 안 되지 않을까. 예전에 연인이 헤어질 경우 헤어짐에 걸리는 시간은 만남을 가진 시간에 2배가 걸린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나에겐 술도 마찬가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술도, 술에 대한 사랑도, 술에 대한 증오도, 술에 대한 미련도, 술로 인한 상처도 다 마찬가지 아닐까. 난 잘 안다. 죽을 때까지 술에 대한 사랑, 미련 모두 절대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잊고 지낼 뿐이라는걸. 20년의 2배. 40년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할 수도 있는 기간이지만.. 적어도 1년 만에 쉽게 잊힐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결론.
그리고 술을 끊는 행위는 (나는 술을 잊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금은 어둡고 사방이 막혀있지만 언젠가는 환한 빛이 보일 터널의 출구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술에 계속 중독되는 행위는 출구 없는 지옥을 향해 절벽에서 떨어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지금 나는 터널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금주는 다시 시작됐다. 언젠가는 끝이 있다. 막혀있는 터널이 아니니깐.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찬란한 인생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찬란할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지금의 우울은.. 20년 동안 술로 가려졌던 망가진 인생을 점점 맨정신으로 똑바로 마주하게 되면서 느끼는 현실적인 자책, 그로 인한 긍정적인 우울이란 생각도 든다.
뭐든 깨달아야 비로소 인지하고 인지해야 변화가 시작된다. 난 이제 막 인지했을 뿐이다. 천천히 걸어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