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좀 물어보세요
우리는 왜 사람을 분류하고 싶어 할까
"당신은 뭐예요?"
요즘 이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다. MBTI 16가지 중 하나. 주변 사람들이 하도 물어보는 통에 나는 그냥 외우고 다닌다. "INFJ요." 마치 주민등록번호처럼.
사실 정확히 언제 검사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아이냐 티냐" 자꾸만 물어봐서 한 번 해보긴 했는데, INFJ가 나왔던 것 같다고, 남의 이야기처럼 대답한다. 자세한 내용? 나도 잘 모른다. 솔직히 관심도 별로 없다.
이게 사람을 딱 16개 종류로 구분해서, 이 사람은 이런 성격이고 저 사람은 저런 성격이라고 정하는 것 같은데... 글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건성건성, 별로 믿지를 않는다.
옛날에는 혈액형으로 그랬다.
"A형은 꼼꼼하고 소심해", "B형은 자기 위주라니까", "O형은 대충대충", "AB형은... 뭐 좀 이상해."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90년대만 해도 이게 진짜 대화의 주제였다. 소개팅 나가면 첫 질문이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였다.
그때는 그래도 학문적 접근이라기보다 그냥 재미 삼아하던 거였다. 가벼운 농담 정도. 그런데 요즘 MBTI는 다들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채용 면접에서도 물어보고, 팀 빌딩에도 활용하고, 심지어 연애 상담에서도 "그 사람 MBTI가 뭔데요?"가 기본 질문이 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보다 더 전에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남자는 원래 그래", "여자는 다 그렇지 뭐."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폭력적인 이분법. 내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그랬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런데 이런 분류 욕구가 비단 현대의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64괘가 있었다. 주역에서는 우주와 인간사의 변화를 음(陰)과 양(陽)으로 표현했고, 이 기호들을 결합해서 만든 것을 괘(卦)라고 불렀다. 64 괘는 우주의 변화 원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체계이며, 주역 이론의 핵심을 이룬다.
재미있는 건, 그들도 결국 세상을 '분류'하고 싶었다는 거다. 다만 방식이 달랐을 뿐. 혈액형 4가지보다는 복잡하고, MBTI 16가지보다는 더 세밀하게, 64가지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이 주역의 괘를 뽑으며 스스로 길흉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칠천량 해전을 앞두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 순간, 조선 최고의 명장은 시초를 놓고 괘를 뽑는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계속 묻는다.
우리는 생각한다. 위대한 영웅도 결국에는 한 명의 고독한 인간일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고독한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하는구나.
우라가 패턴을 찾는 이유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낯선 사건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무작위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인간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그냥 일어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보다, "이런 이유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별자리를 보고 운명을 점쳤고, 하늘을 보고 씨를 뿌렸던 것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패턴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서 질서를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
MBTI도, 혈액형도, 64 괘도, 결국은 같은 욕구에서 나온 거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빠른 답을 원하는 거다. 복잡한 인간을 간단한 카테고리로 정리해서, 이해한 것처럼 느끼고 싶은 거다.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니다. 때로는 유용하기도 하다. 다만 위험한 건, 그 틀에 너무 의존하는 순간이다. "저 사람은 INFJ니까 이럴 거야", "A형은 원래 저래"라며 실제 그 사람을 보지 않는 것. 패턴이 사람을 대신해 버리는 순간.
마케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고객을 분류한다. 페르소나를 만들고, 세그먼트를 나누고, 타깃을 정한다. "2030 여성", "4050 남성", "MZ세대", "액티브 시니어"... 그렇게 사람들을 박스에 넣는다.
왜?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수십만, 수백만 명의 개별 고객을 하나하나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패턴을 찾고, 특징을 추출하고, 대표 유형을 만든다.
그리고 광고를 만든다. "2030 여성은 이런 걸 좋아할 거야", "MZ세대는 진정성을 원해."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리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한다.
문제는 역시 그다음이다. 우리가 만든 분류가 실제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할 때. "2030 여성용 제품"이라는 레이블이 정작 2030 여성들을 획일화시킬 때. 우리가 정의한 'MZ세대'에 실제 MZ세대가 갇혀버릴 때.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혼돈의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세상을 단순화하려는 시도가, 결국은 더 큰 혼란을 만든다. 사람을 16가지로 나누면서 정작 그 사람을 놓치고, 고객을 세그먼트로 나누면서 정작 고객이 원하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답은 '균형'일 것이다. 패턴을 찾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 분류를 하되, 그 틀을 수시로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리고 가끔은, 혼돈을 혼돈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갖는 것.
나는 여전히 INFJ가 뭔지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물으면, INFJ보다 더 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