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

by 변우현의 인물당

#창당

창당 작업은 비밀리에 추진됐다.

1962년 1월 종로2가에 ‘동양화학주식회사’ 간판으로 사무실을 냈다.


김종필-이영근-강성원으로 이어지는 지휘 라인이었다.


중앙정보부 이영근 차장과 강성원 행정관 중심으로 인물들을 포섭했다.

90년대 프리미엄우유로 불렸던 강성원우유의 강성원이었다.


김종필은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을 많이 영입하려 했다.

김대중 영입에 공을 들였지만 실패했다.


예춘호 동아대 강사, 황성모 서울대 교수, 서인석 <뉴욕타임즈> 서울특파원, 윤주영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도 합류했다.


중앙정보부엔 정보부장 자문기관 성격의 정책연구실이 있었다.

당대 최고급 인물들로 23명의 연구위원을 구성했다.


관료로는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맡게 되는 최규하, 경제기획원 부총리를 맡게 되는 김학렬,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게 되는 김정렬 등이 있었고,

학계에선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맡게 되는 고려대 교수 윤천주, 서울대 교수 김성희, 서울대 행정대학원 창설 멤버 김운태 등이 있었다.


낙원동 요정 춘추장에서 창당 요원들을 교육시켰다.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의 윤천주, 김성희 교수는 5.16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정당론과 근대화론을 강의했다.

제3세계에서 쿠데타가 도미노처럼 연이어지던 때였다.

민족주의와 근대화론이 이론에서도 현실에서도 전 세계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창당 준비 현장 방문을 몇 차례 권했다.

박정희는 가질 않았다.


박정희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왔다.

의심이 많은 건 당연했다.


창당 작업이 막바지였던 1962년 8월에야 박정희는 첫 방문을 했다.

그제서야 박정희도 신뢰를 가졌다.


1963년 1월 1일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됐다.

김종필은 박정희를 찾아가 중앙정보부장 사직서를 냈다.


김종필은 말했다.

“각하께서 대통령이 되시느냐, 안 되시는냐 모든 것은 당에 걸려 있습니다.”


김종필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1년 6개월의 중앙정보부장도 관뒀다.


#신당

당초 신당 명칭은 ‘재건당’이었다.


‘재건’이란 워딩이 인기였던 시절이었다.

김종필은 죽기 직전까지도 ‘재건복’을 즐겨 입었다.


결국 ‘민주공화당’으로 결정했다.


김종필의 아이디어였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름을 모두 따다 썼다.


당의 상징은 소였다.

미국 민주당은 당나귀, 공화당은 코끼리인 점에 착안했다.


소는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

소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겠단 의지를 담았다.


공교롭게도 김종필이 소띠이기도 했다.


민주공화당은 기존에 없던 정당 시스템이었다.


사무국과 원내를 나눈 이원조직이었다.

사무국이 당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했다.


당료 선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료들의 발언권도 세졌다.


공화당 공채 출신들의 자부심은 높았다.

훗날 보수 정당 계보에서 당료들을 국회 등원시키는 문화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공산당 조직을 베꼈다는 공격도 받았다.

당 사무국은 공산당 서기국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늘 그렇듯 사실 진위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활동 전력이 있었다.

김종필도 좌익 전력에 의구심이 있었다.


그저 불만이 잠잠해지길 기다려야 했다.

작가의 이전글김종필: 5.16의 설계자와 중앙정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