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정치체제는 3가지였다.
군정, 민정, 유신이었다.
군정을 지탱하던 두 개의 기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였다.
김종필은 5.16의 설계자였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김종필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악역을 자처했다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였다.
중앙정보부는 국회 별관(현 파이낸스센터)에 사무실을 열었다.
중앙정보부의 콘셉트는 미국 CIA였음은 물론이다.
김종필은 정보장교 출신이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가 문관으로 지내며 인생에서 바닥을 보내던 때였다.
둘은 5.16계획에 정보기관 창설을 포함시켰다.
5.16으로 정권은 수립됐지만 탄탄하지 못했다.
주도 세력은 병력 포함 3500여 명에 불과했다.
군 내에서도 소수였다.
내부든 외부든 반기가 언제 있을지 몰랐다.
북한의 위협에도 대비해야 했다.
5.16 당일 김일성은 흥남 비료공장에 현지지도를 갔다가 정변 소식에 급히 평양에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처리해야할 현안들도 산적했다.
기반을 다져둬야 했다.
국정 운영은 운전과 같았다.
논두렁길 위의 운전과 아스팔트 위의 운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숨은 채로 정권을 뒷받침해야 했다.
밖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성과여야 했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부훈을 지었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이 부훈 때문에 70년대 축구전설 이회택이 양지팀이란 이름으로 공을 찰 줄을 누구도 상상 못했다.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 창설식을 가졌다.
정보부 조직은 2명의 차장과 4개국 체제로 구성했다.
믿을 건 동기였다.
행정관리차장은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은 서정순, 제1국장 강창진, 제2국장 석정선, 제3국장 고제훈, 제4국장 최영택 전원 육사 8기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이 육사 8기 중에서 30명을 엄선했던 청정회였다.
이들이 중앙정보부의 핵심이 될 줄도 누구도 상상 못했다.
정보요원 선발엔 경험이 우선이었다.
2차 대전 때 일본군 소속으로 미군 암호를 해석했던 통신요원을 채용하기도 했다.
5.16 혁명공약 제6호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였다.
김종필이 마지막으로 공약을 정리할 때 박정희가 갑자기 넣은 공약이었다.
김종필은 내심 불만이었다.
거사만 성공하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없을 거란 희망으로 버텼다.
하지만 이 조항은 박정희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었다.
1961년 8월 박정희는 특별성명을 냈다.
1963년 3월 전에 새 헌법을 공포하고 5월에 총선을 하기로 했다.
여름까지 정권을 민간에 넘긴다는 계획이었다.
김종필은 구 정치인들을 믿지 않았다.
민정이양은 형식이었다.
결국 5.16 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했다.
신당을 만들어야 했다.
이른바 ‘8.15 계획’이었다.
5.16 직후 일체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창당도 금지됐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전국 단위의 강력한 정당이 필요했다.
김종필은 신당 창당에 매달렸다.
1961년 12월 김종필은 박정희를 찾아갔다.
‘8.15 계획’을 보고했다.
애초 박정희는 정치에 자신이 없었다.
당을 만들어야 한단 생각도 없었다.
“그걸 어떻게 벌써 만드냐”
박정희는 반문했다.
김종필은 다급했다.
“벌써가 아니라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모르는 걸로 하십시오.”
박정희는 승낙했다.
김종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들에겐 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