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농 김상현: 비정한 정치와 2인자의 선택

by 변우현의 인물당

#대리인

총선이 끝나고 3월 2일자로 김대중은 연금이 풀렸다.


당일 새벽 6시, 김상현은 창천동 집에서 길 건너였던 김대중의 동교동 집으로 찾아갔다.


김대중은 김상현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나는 신당이 한 두세 명 당선될 줄 알았네”


2.12 총선 이후 김상현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김대중의 대리인 역할이 끝났다.

김대중과의 애매한 관계가 누적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김대중은 야권의 지도자로 위계질서를 확립해야했다.

비워뒀던 자리가 컸다.


김대중의 위상이 올라간다는 건 김상현의 위상이 낮아진다는 걸 뜻했다.


김상현은 독자적 기반을 만들어보려 했다.

여의도에 ‘민주대학’을 설립했다.


1985년 6월 8일 김대중은 김상현의 민주대학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 당직자, 민추협 등 200여 명을 앞두고 ‘김상현 후계자론’을 언급했다.

예상 밖이었다.


일파만파였다.


김대중의 칭찬을 받은 김상현은 한껏 고무됐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조연하의 국회부의장 파동이 생겼다.


조연하는 이철승의 참모로 출발했지만 김대중과 동교동계를 위해 일해왔다.

김대중은 국회부의장가 되려는 조연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용희를 밀어줬다.

조연하는 반발했다.


김상현은 조연하의 입장을 두둔했다.

노골적으로 김대중과 동교동계의 눈 밖에 나게 됐다.


김상현은 평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연하 파동에서 평정심을 잃었다.


김상현은 말했다.

“일종의 배신감 때문에 불평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다 지난 일입니다. 나는 김대중 의장에게 영원히 도전할 수 없는 운명적 관계입니다.”


동교동계는 김상현을 꺾어놔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김대중은 1986년 4월 11일 공덕동에 민주인권연구회 사무실을 열었다.


이 사무실에 많은 야권 정치인들을 불려갔다.

김대중과 김상현 중 하나를 택하라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었다.


김상현의 ‘민주대학’은 자금줄이 끊겼다.

여의도를 떠나 종로구에 작은 사무실로 옮겨졌다.


#콤플렉스

87년 6월 항쟁까지 정치적인 고비들은 많았다.

정치인으로선 체급을 올릴 기회였다.


하지만 김상현은 소외된 존재였다.


민추협과 신민당의 성공은 김대중에게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민추협도 신민당도 김대중이 반대했던 것들이었다.

김대중의 의중을 모른 체 하며 김상현이 해낸 것들이었다.


김대중은 두 조직의 성공 위에 얹힌 형국이었다.

불편한 성공이었다.


성공의 결과는 남겨져도 과정은 지워져야 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연인 김대중을 원망할 순 있어도 정치인 김대중을 원망할 순 없었다.


정치는 비정하지만 정치의 목적이 좋은 인간의 완성은 아니었다.


김상현은 김대중과의 관계 모순을 힘들어 했다.


김대중을 위해 몸 바쳐 일하고

김대중의 재기 발판을 만들었다 자부했지만 돌아온 건 견제와 배제였다.


김상현의 아내 정희원은 말했다.

“2.12 총선 이후 자기는 한다고 했는데 동교동계에서 알아주지 않으니까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한 2년 동안 밤마다 술에 만취해 집에 와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그래서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붓고 그랬어요.”


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분열됐다.


김상현은 양김의 분열 막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100만명 서명운동도 벌였다.


결국 김상현은 김영삼을 택했다.


김상현 집 전화는 불난 듯 했다.

“왜 김대중을 배신했으냐”

항의 전화만 전국에서 1000통 넘게 쏟아졌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단 김상현의 논리도 있었다.


세상사에 논리가 맞냐 틀리냐는 그리 중요치 않단 걸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을 두고 성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김대중과의 누적된 감정이 한 몫 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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