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11월 30일 정치활동 규제 인사들에 대한 3차 해금 발표했다.
1983년 2월 1차 해금,
1984년 2월 2차 해금에 이은 세 번째 조치였다.
3차 해금에서 15명의 정치인은 제외됐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김상현, 김덕룡, 이후락 등 이었다.
198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야권 분열을 의도했다.
해금된 정치인들이 신당을 창당하면 민한당에 이은 제3당이 되리란 계산이었다.
전망은 학계도 언론도 비슷했다.
민주화 진영은 총선 자체를 부정했다.
5공 정권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준다고 판단했다.
민추협 내부에서도 총선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다.
김상현은 현실주의자였다.
선거 참여도 신당 창당도 필수라 생각했다.
어차피 민한당은 어용이었다.
신당만 만들면 지지도가 높으리라 판단했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신당에 반대했다.
투옥과 망명으로 국내 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다.
김영삼도 신당에 미적지근했다.
돈 문제엔 어지간했던 김영삼마저 자금 마련이 버거운 눈치였다.
김상현은 재야와 김영삼을 오가며 양쪽을 설득했다.
김대중 측근 편으로 미국의 김대중도 설득했다.
결국 김영삼은 비민추협의 대표격인 이철승을 만나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
신당이 가시화되자 민한당 의원들도 동요했다.
홍사덕, 서석재, 박관용, 김현규 등 1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신당 참여를 선언했다.
신당 창당을 앞두고 김영삼은 민추협과 비민추협의 비율을 7대3으로 하려했다.
비민추협은 반발했다.
김상현이 나서 김영삼을 설득했다.
민추협과 비민추협의 5대5 지분 타결이 이뤄졌다.
어차피 민추협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7대3이든 5대5든 숫자놀음은 실질적 의미가 없단 게 김상현의 판단이었다.
민추협을 이끄는 김상현에게 비민추협도 의지하는 형국이었다.
김상현이 가장 빛나던 장면 중 하나였다.
신당 대표를 누구로 할지 정리가 안 됐다.
김영삼 측은 이민우 총재안을 밀었다.
비민추협은 이민주 총재안에 반발했다.
김상현은 이민우 총재안을 받아들이되, 이민우 종로 출마가 필요하다고 봤다.
김영삼은 난색을 표했다.
이민우는 전국구 1번으로 정리된 상황이었다.
김상현은 김영삼을 또 다시 설득했다.
종로 출마만이 이민우를 총재로 밀어줄 명분도, 신당 효과도 생길 수 있다고 봤다.
매 순간 설득하는 김상현도 대단했고, 매 순간 설득에 따르는 김영삼도 대단했다.
신당은 조직도, 자금도 부족했다.
당도, 후보도 인지도가 낮았다.
심지어 이민우는 충청도 기반 정치인이었다.
정치는 명줄과 권력을 맞바꾸는 모험이라지만 아무도 겪어본 적 없는 모험도 처음이었다.
신당 효과엔 젊은 층의 지지가 필수였다.
운동권 출신 20여 명 공천을 계획했으나 재야의 정치결벽증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설훈을 설득했지만 주변 운동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인천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이호웅을 설득했지만 지역 운동가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김상현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을 만났다.
이철은 극구 사양했다,
이철은 출소 후 서점을 운영해왔다.
손익분기점을 갓 넘긴 시점이었다.
하지만 김상현 특유의 얼버무리기 수법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돌아온 사형수’
2.12 총선 돌풍의 진원지 성북구 공천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공천 과정에서 김영삼은 김상현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해줬다.
애시당초 김영삼은 김상현이란 인간 자체를 좋아했다.
12대 총선을 4일 앞둔 2월 8일 김대중은 미국에서 2년 만에 귀국했다.
정권은 김대중에게 재수감하겠다 엄포를 놨다.
그럼에도 김대중이 귀국을 강행한 데는 복잡한 사정이 컸다.
공백이 길었다.
2.12 총선에서 김대중은 존재감을 부각시켜야만 했다.
김영삼이 민추협과 신민당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김상현이 김대중의 대리인이라지만 볼륨도 커져갔다.
김상현은 김대중의 귀국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정치는 돈이 50 정보가 50이라는 김대중의 정치철학이 있었다.
달리 말해, 사람은 쉽게 믿지 않는단 얘기기도 했다.
김상현은 김대중에게 불필요한 의구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지도력을 복원시켜야했다.
민추협과 신민당 내 동교동계의 세력 복원을 이루고 싶었다.
김대중의 귀국으로 신민당의 선명성은 높아졌다.
민심의 향배가 결정지어졌다.
신민당은 돌풍이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창당 25일만에 민한당을 누르고 제1야당이 되었다.
민한당 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하며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