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김영삼의 단식이 시작됐다
단식은 보도되지 않았다.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문제’ 정도로만 기사화됐다.
단식은 길어졌다.
김영삼의 체중은 14kg 빠졌다.
정권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경찰을 투입해 김영삼을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김영삼은 치료 행위 일체를 거부했다.
윤보선, 김수환, 강원용, 문익환 등 재야 원로들의 간곡한 호소가 이어졌다.
단식은 중단됐다.
김영삼의 단식을 계기로 민주화 투쟁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오래잖아 김영삼은 건강을 되찾았다.
상도동계도 민주산악회도 건재했다.
반면 김대중은 투옥과 망명의 시간이 길어졌다.
동교동계는 구심점을 잃었다.
일단 김상현을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김상현은 김영삼을 간판으로 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이 미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였다.
소수였다.
곧 죽어도 김영삼을 믿지 못하겠단 사람들도 있었다.
김대중의 사형선고와 광주항쟁에 김영삼이 침묵했단 이유였다.
다수였다.
미국에서 김대중이 김영삼과 합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양김의 발표에도 동교동계 내부 의견은 분분했다.
‘민주국민회의’는 상도동계가 주축이었다.
김영삼은 이 조직을 투쟁의 구심점으로 삼고 싶었다.
김상현은 김영삼에게 따져 물었다.
‘여전히 동교동계 사람들은 김영삼을 안 믿는다. 굳이 민주국민회의로 추진해야겠나?’
김영삼은 김상현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였다.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했다.
동교동계에서도 김영삼이 믿을만하단 얘기가 슬슬 나왔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조직의 명칭을 지어야했다.
김영삼은 ‘구국’ 이나 ‘동지’ 같은 강렬한 워딩이 꼭 들어가길 바랬다.
김상현은 투쟁은 확실히 하되 대외노선은 온건해야 한다고 김영삼을 설득했다.
김상현은 ‘민주화추진간담회’ ‘민주화추진협의회’ 제안했다.
‘민주화추진간담회’는 약해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다.
차 한 잔 앞에 두고 담소 나누는 느낌이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로 확정했다.
민추협은 1984년 5월 1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졌다.
구성원 대다수는 다음 총선을 염두에 둔 정치인들이었다.
김영삼은 김대중과의 공동의장제를 원했다.
하지만 김대중 없는 공동의장제란 의미가 없었다.
동교동계 입장에선 김영삼의 독주를 뜻했다.
김상현은 계파간 균형이 깨지면 갈등이 불거질 상황을 우려했다.
결국 김대중을 고문으로, 김영삼을 공동의장으로,
김상현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기로 했다.
민추협은 관철동 대왕빌딩 13층에 비밀리 계약했다.
세입자가 민추협으로 들통 나자 건물주는 해약을 통보했다.
민추협은 두 계파의 합의 정신에 따라 업무를 처리했다.
기자회견도 회의도 김영삼과 김상현이 번갈아 주재했다.
김영삼이 마뜩해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불편했던 김상현은 김영삼에게 양보했다.
김상현에 대한 김영삼의 평가를 후할 수밖에 없었다.
김덕룡은 말했다.
“1971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 YS는 후농을 가리키며 저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쪽 사람들은 죄다 정치만 하려 한다. 조직이나 참모를 할 생각은 안 하고 모두 지도자만 하려고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