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뭐든 지르고 봐야한다.
생각이 많아봐야 인생은 바뀌질 않는다.
모의국회 경험은 김상현을 고무시켰다.
웅변을 제대로 해봐야겠단 결심이 섰다.
새벽마다 남산에 올라 발성 연습을 했다.
대한웅변협회 학생부장이란 감투도 썼다.
협회 산하 동양웅변전문학원도 등록해 다녔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김대중을 만나게 됐다.
김대중은 낙선하고 정치 낭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 학원의 부원장으로 왔다.
부원장 취임 축하 회식은 북창동의 중국음식점에서 조촐히 열렸다.
김상현이 11살 위였던 김대중과 가까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같은 전라도 출신에 같은 김해 김씨라며 김상현은 형님, 형님하며 따랐다.
김해 김씨만 전국에 445만명이다.
호남 출신 김해 김씨라도 수십 만 명일텐데 형님 소리는 찰지게 나왔다.
그 시절 김대중은 형편이 안 좋았다.
대현동에 셋방을 얻어 모친과 여동생과 살았다.
김상현도 김대중도 바닥이었던 시절이었다.
김대중 모친은 김상현을 자식처럼 예뻐했다.
김대중의 여동생 김부자는 이화여대 국문과 1학년이었다.
폐결핵을 앓다 죽었다.
김상현은 장례에서 관을 들었다.
첫 만남 이래로 김상현은 김대중을 탁월한 지도자감이라 믿었다.
김대중의 1971년 대선도 김상현에서 비롯됐다.
김상현이 김대중에게 경선 참여를 재촉하지 않았다면 없던 일이 될 뻔했다.
김대중은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
서자 출신이었고, 기반 없이 자수성가했다.
출신 지역에서도 소속 정파에서도 언제나 소수파였다.
논리를 앞세워야 했고 행동을 일치시켜야 했다.
김대중이 대선에 뛰어드는 데 주저했던 건 당연했다.
김상현은 김대중과 달랐다.
가진 거 없는 건 비슷해도
김상현은 언제나 낫씽 투 루즈 였다.
둘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최상의 조합이었다.
김상현은 경선에서 김대중을 지지한 유일한 원내 의원이었다.
본선에선 후보 비서실장으로 선거를 지휘했다.
경선은 해보나 마나 분위기였다.
김영삼 대세론이었다.
유진산을 비롯한 당내 원로들도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다.
김상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였다.
매일 새벽 김상현의 집에 참모들을 모이게 했다.
몇 달간 함께 아침밥을 먹으며 회의했다.
의도적으로 연고를 바꿔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신안 출신 한화갑도 부산으로 보냈다.
연고 지역을 맡으면 지인 위주로 적당히 관리할 거란 김상현의 생각이었다.
투표를 앞두고 대의원 한 명마다 공을 들여 숙소를 찾아 돌았단 건 기본이었다.
김영삼은 경선에서 역전패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골초였던 김영삼은 담배를 끊었다.
김영삼은 패인을 고민했다.
김상현처럼 자신만을 위해 손발이 되어줄 참모가 없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때 김영삼에게 발탁된 인물이 김덕룡이었다.
김덕룡은 전북 익산 출신이었다.
경남 거제 출신인 김영삼과 정치적 상성이 좋았다.
남성중을 나왔지만 남성고나 전주고가 아닌 경복고를 졸업했다.
김영삼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자였다.
제도권 진입이 빨랐다.
거꾸로 말하면 재야와의 접점이 취약했단 뜻이기도 했다.
김덕룡은 6.3 항쟁 때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구속, 제적돼 상징성이 있었다.
김덕룡은 상도동계의 비서실장으로 발돋움한다.
김상현이 김대중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랐다.
유진산 같은 거물급 정치인도 면전에서 거침없이 비판을 날렸다.
김상현은 술 한 잔 걸치고 집에서 쉬다가도
김영삼한테 전화가 오면 “예, 총재님” 하며 편히 누운 채로 전화 받았다.
김대중한테 전화가 오면 “예, 형님” 하고 일어나 반듯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동교동 가신들이 김상현을 키우고 다니면 안된다 공공연히 떠들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김상현은 김대중을 절대로 욕하면 안된다 주변에 당부했다.
김상현을 오래 봐온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마저 신기해했다.
“김상현 의원은 딴 사람에게는 다 말대꾸 하는데 DJ한테는 전혀 말대꾸를 안해요. 형님 형님 하면서 완전히 오야붕 대하듯 했어요. 유일하게 죽는게 DJ 앞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