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에게 묻다.
현실이라는 장막 속에 살아가며,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내면의 아우성이 들릴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 동안의 시간이 아까워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장막 바깥의 세상이 두려워서, 어쩌면 내가 있는 이곳이 제일 안전한 장소라는 믿고 싶은 사실에 '지금도 괜찮아'라고 마음에 위안을 삼진 않으신가요.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겠죠. 해질녘 까마귀 떼처럼 내 주위를 서성이는 불안함에 둘러싸여 힘겨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찾아 떠난 길의 끝엔 그토록 원했던 기쁨과 환희가 가득할 수도, 후회와 미련만이 남을지 그 누구도 모르기에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어렵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열일곱부터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용의 길을 걸었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길 위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이끌리듯 걸어간 원준의 이야기입니다. 전업 무용수로 활동한 이후 갑작스레 찾아온 번아웃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의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뎌 얻어낸 그의 삶의 근육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그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내 주위, 삶의 근육을 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GREW-UP. 열다섯 번째 에피소드. 원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원준님!
매니저님 반갑습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최근에 아픈 곳이 생겨서요. 회사를 잠깐 쉬고 있는 상황이에요.
신경 쓰실 일들이 많으셨나 봐요.
돌발성 난청이 생겼거든요.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뇌압이 올라가면 난청이 생길 수도 있다 하더라고요.
최근까지 근무하시던 곳이 광고 프로덕션이셨죠.
맞아요. 올해 초 모션그래픽을 배워 신입으로 입사했어요.
신입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네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모션그래픽 일을 하면서 무용을 했을 때의 재미와 즐거움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막상 입사를 하고 일을 하니 생각 외로 디자인 역량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스스로 노력했지만 한계에 부딪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입사를 한다면 모션그래픽보다는 3D모델링 쪽으로 포지션을 바꿔보려 생각 중입니다.
모션그래픽과 모델링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업하는 건 같아요. 모션그래픽은 사진이나 그림의 움직임을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라면, 모델링은 표현하고 싶은 시각 아이디어를 3D로 묘사하는 기술이에요. 영화 속 우주선 같은 CG 작업이 3D모델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3D모델링 산업이 영화 제작 쪽으로 많이 특화되어 있고요. 반대로 모션그래픽 경우엔 임팩트 있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기업 홍보영상이나 광고에 많이 쓰여요.
광고 프로덕션에서 일하며 생각의 변화가 있으셨군요.
소비를 일으키는 상업적인 영상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일상적으로 다가가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기는 작업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방금 전에도 말씀하셨다 싶이, 오래전부터 무용을 하셨지요.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셨나요?
처음부터 무용을 시작하진 않았어요. 중학교 땐 유도를 오래 했어요. 유도를 처음 배울 때만 해도 흥미가 있었는데, 계속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승패를 겨뤄야 하는 상황들이 제 성향과 맞지 않아 그만두게 됐죠. 이후엔 뮤지컬에 관심이 생겼어요. 당시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뮤지컬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게 재밌어 보였거든요. 꼭 놀이처럼요. 그래서 뮤지컬 학원에 다니며 연기와 노래 그리고 춤을 배웠는데, 그중 춤을 출 때 가장 즐거웠어요.
춤과 가까워진 계기가 뮤지컬이셨군요.
맞아요. 사실 그때만 해도 개그맨들이 무용수 흉내를 내는 개그를 자주 해서 그랬는지, 남성 무용수라고 하면 타이즈를 입고 민망하게 춤을 추는 사람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고에 진학하고 나서 우연히 무용과 선배들의 연습을 본 후엔 생각이 바뀌게 됐죠. 정-말 멋졌거든요! 한눈에 반했죠. 다이나믹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선배들의 춤선에 몸의 감각과 품격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현대무용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엔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죠. 선배 셋이 달라붙어 일자로 펴지지 않는 다리를 찢은 채로 한 시간 동안 있기도 했고..
윽. 말만 들어도 다리를 찢는 고통이 느껴져요.
정말 무식하게 찢었어요.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여만 하더라고요. 그래야 몸을 쓸 때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거든요. 영어단어를 많이 외울수록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많아지는 것처럼, 몸의 언어를 말하는 무용은 몸을 트레이닝할수록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고통스럽지만 해야만 하는 과정이네요.(웃음) 그럼 고등학교 시절 무용을 배운 이후, 대학에도 무용학과로 진학하게 된거군요.
맞아요.
사회과학부를 전공한 저로서는 무용과에선 어떤 커리큘럼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지 항상 궁금하더라고요.
학교마다 커리큘럼이 달라요. 예술적인 역량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두는 학교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는 학교도 있죠.
대학에선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한데요.
저한테 빠져있었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하고 싶었던 '춤'에 푹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선 아웃사이더였어요. 그래서인지 대학시절의 추억이 별로 없어요. 항상 학교 밖에서 돌아다녔거든요. 서울에서 공연을 하거나 수업을 빠지고 해외 안무가 워크숍에서 춤을 배웠어요. 그런데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지내지 않을 것 같아요.
하고 싶었던 것에 몰입하며 지냈던 시간들에 대해 후회가 없었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대학교 시절의 추억이 없어거든요. 너무나 전투적으로 지냈던 시간들이었어요. 그때 시절을 떠올리면 새벽녘에 연습실을 혼자 오고 갔던 기억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의 낭만을 남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있어요.
그래도 몰입이 남기고 간 자리의 단단함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학교 밖에 다양한 활동과 훈련을 하면서 기능적으로 좋아진 건 사실이에요. 덕분에 표현의 스펙트럼도 넓어졌고요.
그럼 졸업 이후에도 무용수로 계속 활동을 이어 나가신 거군요.
그렇죠. 6년 전만 해도 전업 무용수로 공연을 계속했어요. <류장현과 친구들>이라는 극단에 소속되어 2년 동안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후에는 국립극단에 들어가 큰 공연들도 함께 했었죠.
우연히 무용과 선배들의 연습을 보고 무용을 시작하게 됐어요. 다이나믹한 움직임은 아니였지만, 선배들의 춤선에 몸의 감각과 품격이 느껴졌거든요.
전업 무용수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무용씬에서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D모션그래퍼로 전향하게 된 터닝포인트는 무엇이었나요?
무용수에서 바로 모션그래퍼로 직업을 바꾼 건 아니고요. 중간에 딴짓을 좀 했죠. (웃음)
하하. 딴짓이요?
언제부턴가 공연 이후 매번 회의감이 들었어요. 공연은 막이 내리면 끝이라는 생각에요. 실황을 기록한다 해도, 공연의 생생함과 활기를 그대로 담지 못하니까요.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문득, 나에게 남는 건 뭘까 싶은 생각이들더라고요. 그러던 와중, 삶과 일 사이의 균형이 깨졌고 그렇게 번아웃이 찾아왔어요. 번아웃이 찾아오고 나서는 무용이 아닌 다른 예술 활동을 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어느날, 친구의 추천으로 마르셸 뒤샹 전시회에 가게 됐어요.
마르셸 뒤샹이라면 <샘>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진 현대미술의 상징과 같은 존재잖아요.
당시에는 유명한 작가인지도 모르고 따라갔어요. 작품을 봤는데도 그렇게 와닿는 건 없었죠. 그런데 그 작가가 부러웠어요.
작가의 어떤 면이 부러웠을까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부러웠어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죠. '아. 작품이 보존되어 있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인정 받을 수 있었구나' 라고요. 그 자체가 부러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생각은 전시회를 보고 난 후 집에 가는 길 내내 이어질 정도로 저에게 자국을 남겼어요.
무용수로서의 회의감을 느꼈던 부분과 연결되는 지점이었네요.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수십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지만,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는 팸플릿만 남았어요. 그런데 미술 작가는 모든 작업들이 자연스레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죠.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원을 다니기도 했지만, 대부분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죠.
그림을 배우셨군요.
어느 날은 미술 독학 영상을 찾다 광고에 나오는 도형의 움직임에 유독 눈길이 가는거에요. 그리고 그 순간 '아! 영상을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탁-하고 떠올랐죠.
정말 우연한 계기로 모션그래픽을 배우게 된 거네요.
무턱대로 찾아간 학원에 운이 좋게 선생님을 잘 만나 국비지원으로 그 다음날부터 수업을 듣게 됐어요. 그제야 한 눈에 꽂힌 영상이 모션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것도 알게 됐고요. 그렇게 수업을 들으면서 난생처음 일러스트, 프리미어 프로와 같은 디자인 툴과 영상 제작 툴을 만져본거죠.
한 가지 프로그램만으로 만들어지는 작업이 아니라서 처음 배울 때 막막하셨을 것 같아요.
어려운 것도 어려운 건데, 저는 단순한 도형을 만드는 작업이 제일 힘들더라고요. 처음엔 피카츄 만들어보기 이런 걸 했었거든요. (웃음) 아무래도 처음부터 역동적인 트랜지션을 기대했던 저에겐 그게 제일 참기 힘든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정말 때려치울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배우고 싶은 것들을 차츰차츰 알려주더라고요. 그제야 '조금 더 해볼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곤 어느 순간 영상제작에 몰입하는 저를 발견한거에요.
정말 푹 빠지셨네요.
모션그래픽 작업을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건 머릿속에 표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구현하데에 있어 제한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점이 3D모션그래퍼로 전향하게 된 가장 큰 터닝포인트 같아요.
무용수로 무대에 오르다 모션그래퍼로 작업 하는 것이 완전히 정반대의 삶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제가 품은 창작욕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수단만 다를 뿐이죠. 그때의 저도, 지금의 저도 같은 사람이에요.
무용수로서의 일상과 직장인 3D모션그래퍼로서의 일상엔 차이가 클 것 같은데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전업 무용수의 생활은 정말 바빠요. 소속이 있건, 프리랜서로 활동하건 정말 많이 움직여야 하거든요.
움직여야 한다는 건 연습의 양을 말하는 걸까요?
여러 방면에서 바쁜 움직임인 것 같아요. 매일 같은 장소에서 연습을 하지 않아요. 어느 날은 서초에서, 어느 날은 방배에서 연습을 하죠. 시간도 불규칙적이에요. 새벽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연습을 할 때도 있고,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짧게 연습을 끝마칠 때도 있죠. 또, 극단에 소속된다 해도 공연 자체로 생활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생계를 위해 강사 아르바이트를 해요. 요가 강사, 필라테스, 무용 학원 강사 등 다양하죠. 그래서 빈틈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무용수의 삶과 개인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어요.
3D모션그래퍼의 일상은 어떤가요.
바쁘게 뛰어나녀야 하는 일상이 무용수의 삶이라면, 모션그래퍼는 엉덩이를 무겁게 앉아야 하는 진득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매일 집-회사 두 곳을 오고 가며 일을 하다 보니 이전의 일상보다는 단조로운 생활이긴 했어요.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됐어요.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을 내기 힘들었을 텐데 같은 직장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웃음)
원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로운 영역에 뛰어드려는 면모가 돋보여요. 무용, 그림, 모션그래퍼, 영화 프로듀서 등 창작의 욕구를 다양한 영역에서 표현하고 싶은 시도들이 엿보이고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제 안의 이야기들을 표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편이에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는 것에 있어 원동력을 딱히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제 안의 것들을 잘 다듬어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 아닐까요? 무용, 그림, 영상의 영역이 제각각 달라 보여도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나를 표현한다는 한 가지 수단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세상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특히나 요즘 많이 느끼고 있고요.
어떤 계기로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나요?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넌지시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최근에 생긴 돌발성 난청을 계기로 느끼는 게 많았어요. 어느 날부터 깊은 수영장 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왼쪽 귀에 소리가 물을 먹은 듯 먹먹하게 들리더라고요. 병원에 가면 치료받을 수 있는 가벼운 증상인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돌발성 난청이 왜 생겨나는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정확한 치료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나 발전된 의학에서도 무엇 하나 단정 지을 수 없는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에 각자만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준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결국엔 귀가 나을 거란 믿음?(웃음) 귀가 완치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귀가 괜찮아질거란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청력을 잃고 난 후에 내가 하는 것들에 스스로 확신을 가져야겠다는, 조금 더 나를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을 현실로 옮기기에 때론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도 있어요. 때론 안정적인 생활에 타협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런 순간들이 있죠. 회사를 다니면서도 '다니자', '아니야 그만두자.' 사이에서 수백 번이 마음이 오고 갔어요. 그런데 몸이 아프니 반사적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고요.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아요. 회사를 그만두며 안정감은 잃긴 했지만, 세상에 돈 벌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해요. 패기와 열정을 받쳐 줄 튼튼한 신체도 있잖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청력을 잃고 난 후에 내가 하는 것들에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조금 더 나를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준은 먼 훗날,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이 삶이 작가의 길이라면, 처절하게 살다 먼 훗날 명성을 얻는 삶보다 지금을 잘 사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원준에게 잘 사는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소신을 잃지 않고, 창작 활동을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고, 생존을 위한 일도 놓치지 않는, 삶의 균형이 알맞게 이뤄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품 한 점에도 삶의 진정성과 진솔함이 묻어나는 사람으로, 가족에게 충실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일생을 지탱하는 부분 중 가족이 큰 부분을 차지하시는군요.
맞아요.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어요.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때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무용은 외줄 타기에서 살아남는 싸움인데, 항상 상처투성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가 마음을 많이 아파하셨어요. 그래서 회사에 입사한 것도 있어요. 아직까지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지만 언젠가 어머니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몇 개월 후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아홉수이시죠. (웃음)
맞아요.
또 다른 전환의 기로에서, 어떤 생각과 다짐으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고 싶으신가요.
2년 전, 무용을 그만뒀어요. 그때부터 서른이 온다는 생각에 한시도 스스로를 가만히 있지 못했죠. 그런 조급함이 저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것 같아요. 언젠가는 주변 지인들을 찾아가 물어봤어요. "서른이 되면 어때요?"라고. 서른이 되면 정말 몸의 기운이 빠지는지, 의욕이 뚝하고 떨어지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서른이었는데,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웃음) 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이십대를 겪어낸 것처럼 결국엔 스스로 체험해야 할 서른이기에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요. 십대에서 이십대가 될 때의 설렘처럼 서른도 기대되고, 들뜬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어요.
마음의 소리를 지나치지 않고 귀 기울였던 이십대처럼, 삼십대에도 자신만의 보폭으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서른을 맞이 하시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아홉수의 인생을 살고 있고, 창작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이원준입니다. (웃음)
먼 훗날 명성을 얻는 작가의 삶 보다는, 지금에 충실히 살며
작품 한 점에도 삶의 진정성과 진솔함이 묻어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