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치매 2. 발등에 떨어진 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내 짝은 어디에 있는가. 이빨 빠진 동그라미가 짝을 찾아 떠난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다 맞춰봐도 짝이 아니다. 그렇게 찾아다니다가 딱 만났다. 그런데 너무 잘 맞아서 너무 꽉 낀다. 빼도 박도 못하게 꽉 맞는다. 너무 꽉 맞으니 이것도 짝이 아니지 싶다. 빼 내버리고 다시 찾아 나선다.
셸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내용이다.
나야말로 어떤 말을 찾아다니는 것이었을까?
평생 모은 말들의 모음이 거실을 꽉 채우지 않았나. 그 많은 책을 홧김에 다 버릴 정도로 남편의 알츠하이머병 진단은 충격이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조언을 찾아다니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급하다는 것.
그러다 아수라장을 봤다. 아비규환 생지옥의 현장을. 치매 게시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제목이 곧 절규였다. 당장 급하다는 건 그런 것이다. 모두가 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케이티였다.
푸드뱅크에서 받은 캔을 그 자리에서 바로 따서 먹으며 우는 장면에서 나는 같이 오열했다. 당장 급하다는 건 그런 거다. 질병과 가난과 복지 사각지대. 이 한데 엉킨 무질서. 그 현장을 보고 싶으면 치매 카페 게시판을 보면 된다.
간병지옥.
요양원이냐, 요양병원이냐, 집이냐.
자식이냐, 부모냐.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그야말로 <소피의 선택> 같은 딜레마에 봉착한 사람들.
그 앞에서 나는, 조언도 정보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문제는 '심정'이었다.
처한 상황의 괴로움으로 인한 죽고 싶은 심정. 병의 깊이에 따라 더.
치매를 곁에서 보다 보니, 옛날 보고 들었던 것들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스피노자 말했다 하니, 대부분 학생들은 왜 없죠? 물었다. 선생은, 갑자기 급할 때 용변을 못 참잖아요.라고 했다. 그런가? 수긍하는 것 같다. 대안이 있다는 듯 선생은 다시, 자유의지는 없지만 자기 결정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급할 때는 자기 결정도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오히려 적나라해지는 걸지도.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인가? 감옥영화의 진수라고 한때 유명했던 영화가 있었다. 여자가, 수감된 남자한테 면회를 가서 유리 칸막이 앞에서 가슴을 보여주는 장면이 생각난다. 어릴 때는 그 장면이 참 생뚱맞다고 생각했는데, 급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영화가, 급하면 살인도 탈옥도 닥치는 대로 하는 영화였나?
남편이 치매가 아니었을 때, 남편은 나를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 때가 있었다. 내가 <들장미 소녀 캔디>를 좋아해서 캔디를 찾아다녔었다. 그러다 나 같은 아내를 위해 캔디를 찾으러 다니는 남편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렇게 캔디 전편을 찾아서 시디에 구워 주던 때가 었었다.
지금은 내가 남편의 초로기치매 정보를 찾으러 사방으로 떠돈다. 급하니까 사방에 조언을 간청하고 구걸하게 된다. 급하니까 급하게 지금의 상황을 까발리게 된다. 이게 그렇게 쉽게 까발릴 상황인가 싶다가도 병은 알릴수록 어쩌고 하는 말에 의지하며. 그러다 보면 동병상련들을 만난다. 모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치매 간병 입문자일수록 더 그렇다. 혹시라도 좋아진 사람이 있는지, 혹시라도 어떤 비법이라도 있는지. 치매는 '혹시'다. '혹시'에 기대는 것이 치매다.
심정을 얘기하고 어떻게 견디고 있냐고 안부를 묻는다. 일면식도 없지만 서로 정보를 나눈다. 장기요양등급에 대해서, 식단에 대해서, 인지 강화 활동에 대해서, 치매 정도에 대해서. 누구는 정도가 심하지 않다며 그 와중에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팁을 구하기도 한다. 털어놓지 못할 사정을 나는 여기저기 마구 털어놔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가난을 털어놓고 심사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절박하게 되었을까.
그럼에도 내가 살고 있는 건 그나마 쓸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까지 쓰지는 않아도 되겠지만, 오롯이 나는 여기 기대고 있는 것이다. 글이 나를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구는지도 모른다.
좀 더 적나라하게 써도 된다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 고. <유혹하는 글쓰기>의 늪에 빠지라고.
그러다 문득, 헤밍웨이는 왜 그랬을까 싶었다. 글쓰기는 구원이 아니었나? 헤밍웨이는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질병은 속수무책이다. 들뢰즈도 결국 뛰어내렸다. 그들은 존엄을 위해 생의 마지막 용기를 낸 걸까?
질병 앞에 그 누가 무력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철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왜 붙잡고 있을까? 이 와중에도 나 또한 왜 읽고 쓰고 이 동네를 뜨지 못하는 걸까.
들뢰즈나 헤밍웨이까지는 아니어도 남편은 지적인 남자였다. 결혼한 남성이. 그것도 직장인 남성이 취미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번역을 한다. 그런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남편이 좋았다.
남편도 나도 서로를 위해 닥치면 하게 된다. 남편은 기꺼이. 나는 어쩔 수 없이.
배운 적도 없지만 허공을 밟으며 줄을 쳐 나가는 거미처럼. 부부는 그런 건가.
구렁덩덩 신선비의 아내처럼 모험하고 활약해서 결국 잃어버린 남편을 다시 찾아 잘 살았다는 전래동화 버전이라면 더 좋겠지. 엄마의 옛날 얘기를 내가 좋아한 건 어쩌면 해피엔딩이라서 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이렇게 끝냈다. "자알 살다가 어제그저께 죽었단다. 내가 거 상세집에 가서 잘 얻어먹고 왔잖나." 잘 살았다는 마무리. 엄마의 옛날얘기는.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에 대한 기가 막힌 대답이다.
<크리톤>한테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유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거였네요. 그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이 철학사가 되었겠지. 저마다의 답변이 있겠지만, 잘 살다가 어제그저께 죽은 것만 한 답변은 없을 듯싶다.
"사방에 조언을 구걸하지 말라고? 수동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흥!"
스피노자가 뭘 알아. 결혼도 안 해봤으면서. 치매도 안 걸려봤으면서.
그러면서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야말로 이빨 빠진 동그라미인지도 모른다.
종국에 맞닥뜨린 내 처지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다시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