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치매 1. 우리 남편이 안 그랬거든요
동생이 맞고 오면, 누가 내 동생 때렸냐. 맏이 들은 나서 주기 마련이다. 동생들은 그런 '빽'이 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말했다. 언니 오빠는'부모 맞잽이'라고.
나는 지금도 언니한테 잘 이른다.
"언니 저기 떡집 좀 혼내줘."
" 왜?"
"아니 내가 동부 들어있는 송편 맞냐고 물었다. 맞대. 그래서 두 개나 샀는데 와보니까 아닌 거 있지."
"어디. 가보자."
언니가 앞장섰다.
언니가 내 말을 전했다. 아저씨는 이건 확실하다고 했다. 언니는 송편을 네 팩이나 샀다.
"언니가 아저씨 혼내준 거네? '돈쭐'내준 거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오는 것 같아도,
환갑 언니가 아직도 혼내주러 다닌다.
사람은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전적으로 오로지 내편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남편한테 그러지 못했다. 전적으로 믿어서 물 위를 걷자는 것도 아닌데, 혹시... 했었다.
주민센터 귀퉁이에 작은 무인 스마트도서관 부스가 있다. 도서관 사이트에 신청하면 책 대출 기계에 넣어 놓는다. 늘 빌리다 보니 회원번호 무려 14자리 숫자를 남편은 기억한다. 헬스장에서 신발을 못 찾겠다고 전화하던 사람인데. 빌린 책 중 하나인 버트런트 러셀의 『로지코믹스』를 마저 읽고 감상문까지 썼다. 일일기록 공책에 반납시간까지 적어놨다. 한 달 후 책반납이 안 됐다고 도서관서 전화가 왔다.
한 달 동안 나는 나대로 이상하긴 했다. 도서관 사이트에 『로지코믹스』는 반납이 안 됐다고 떠 있었다. 나는 타 도서관 반납이라 시간이 걸리겠지. 또는 사이트가 뭐 오류인가 보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을 하고 전화를 했어야 했다. 아뿔싸.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것이다. 모든 비밀은 내 입에서 처음 나가는 법. 다 내 탓이다.
남편이 분명히 반납한다며 책을 가지고 나가는 걸 봤으니까. 내가 따라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늘 하던 대출과 대여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설마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안일했다. 저지레 하는 건 순식간이다. 예의주시를 한 시라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였다. 똑같은 책을 사서 택배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CCTV를 돌려보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궁금했다.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처럼 '눈이 돌아' "우리 애가 안 그랬거든요"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남편은 반납했거든요" 말하지 못했다.
나부터도 의심의 여지가 발동되기 시작하니 자신이 없어졌다. 분명히 남편은 책을 가지고 나갔고 빈 손으로 왔다. 집에서 가까워서 금방 돌아왔다. CCTV 돌려보고 맞으면, 거보라 하고. 아니면 미안하게 됐다 하면 되겠지만. '장애'라는 게 그랬다. 괜히 기가 죽어 우리 쪽 실수겠지 접고 들어가게 되더란 말이다. 돈 많은 사람은 백화점 가서 아이쇼핑만 해도 거리낄 게 없다는데. 가난한 사람은 괜히 입어보면 꼭 사야 되는 줄 안 다고 하더니. 괜히 주눅이 들었다.
심리적 주눅은, 자존감이 낮아진다. 사회적 약자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내 상황을 취약하다고 느낀다. 위축되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실제로 가난하면 뇌도 작아진다는 다큐를 봤다. 그건 맞는 것 같다. 부자로 사는 언니는 꿈에서조차 귀부인 사모님이라고 했다. 반대로 나는 꿈에서 조차 돈 한 푼이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땡전 한 푼 없다니. 가난은 무의식조차 잠식하는가 보다. 넉 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cctv를 확인하고 싶다.
반납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 후 반납하고 반납확인증까지 출력하고 사진도 찍었다.
마치 증거를 모으듯이. 한 번만 더 그러면 아주 그냥. 때를 기다리듯이.
남편이 치매가 되고 나서 어째서 이렇게 증거니 증명이니 입증해야 될 일이 많아지는 걸까.
그러다 뜻밖에 그 '때'가 왔다. 나아가 남편이 해결까지 했다.
남편이 나갈 시간이다.
"알지? 책반납 먼저 하고 피아노 갔다가 헬스 갔다가 그러고 오면 돼. 알지?"
남편은 다 안다며 알츠하이머 책,『길 위의 뇌』를 옆구리에 끼고 나갔다.
헬스장에 있을 시간이다. 잘 있나 싶어서 위치추적 앱을 눌렀다. 남편이 길에 있다.
아니 왜 나와 있지?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통화 중이다. 몇 번을 해도 통화 중이다.
이상하네. 한 참 후에 전화했다. 남편이 받았다.
"왜 그렇게 통화 중이야?"
남편이 스마트 도서관 책 수거하는 사람과 통화했다고 했다.
책이 기계 두 곳 모두 반납이 안 돼서 수동 수거함에 넣었다고 했다. 확인하고 싶어서 수거함 스티커를 보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마침 책을 수거하는 중이라 해서, 얼른 스마트도서관 부스로 갔다고 한다. 거기서 책 반납 확인하고 기계에 찍었다고 한다. 반납 영수증은 용지가 떨어져서 안 나왔다고 했다. 도서관 사이트에 가보니 반납이 되었다. 그런데도 왠지 믿을 수 없어서 도서관에 전화했다. 반납이 되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지난번 그 '로지코믹스' 사건에 대해 말했다. 분명히 반납했는데 그때도 안 됐다고 해서 새 책을 사서 택배로 보내주지 않았냐고. 기계는 절대 실수가 없다면서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우리 실수라고 할 수 있나? 나는 기계는 아니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도서관 최다 대출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우리 부부다. 칭찬을 해 줘도 모자랄 판이다. 나야말로 책 대출 인생에, 한 번의 오 점이 찍힌 것 같았다. 다 못 읽으면 일단 반납하고 다시 빌리면 빌렸지, 반납 연기는 말도 안 된다. 내 성격 자체가 그렇다. 그래야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책을 한 권 사서 보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된 건지 그 한 장면이 통째로 삭제되어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러니 치매 남편의 일상은 얼마나 답답할까.
남편은 남편대로, 치매라 해도 그 일이 어렴풋이 뒤죽박죽 찜찜하게 기억되고 있었나 보다. 무엇보다 내가 그 일로 너무 찝찝해했다. 치매임에도 남편도 벼르고 있었나 보다. 전화하고 확인하고 현장까지 다시 가서 확인했다니.
치매 전의 남편은 꼼꼼했다. 내가 이해를 못 하면, 납득이 될 때까지 이해시켜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석사 자격시험 볼 때. 나는 버트란트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원서를 3번이나 필사했다.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나한테, 남편은 기초부터 가르쳐 주었다. 자기가 대학 때 논리학은 A플러스받았고, 고등학교 때는 수학경시대회 도맡아 나갔다면서. 논리는 껌이라고 했다. 실제로 철학과 논리학 교재 오류를 발견해서 알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치매는 '왕년의 금송아지'가 안 통한다. 바로 이 지점이 스피노자의 질문이다. "기억을 잃은 스페인 시인을 여전히 살았다고 볼 수 있는가" 시인의 본질은 사라지고 육체라는 양태만 남았다. '신체가 시체가 되어도 남는 영원한 어떤 것'을 추구하던 스피노자. 그에게 '치매'는 '좀비'였을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그런 실존철학적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치매는, 선택의 주체로서 본질을 구성해 나갈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딱 그것이 치매 환자의 과거일 뿐이다.
'Logic'도 'Comics'도 없었지만, 나는 남편의 반납 해결건으로 조금은 속이 풀렸다. 그 순간만큼은 남편 치매가 나은 듯 기뻤다. 오로지 내 편인 사람. 잠시라도 <내가 알던 그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끝내지는 않았다. 나는 의부증 환자처럼 남편의 스마트폰 녹음파일까지 확인했다. 남편의 통화내용을 들어봤다. 남편은 생각처럼 횡설수설하지 않았다. 그제야 마지막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권정생 선생의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이 생각났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서 싫어요!"라고 했다던 도모꼬를 생각하면,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가 갈린다"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권정생은 그 일을 그토록 정겹고 귀여운 시로 승화시켰는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은, 다시는 설렁탕집주인을 욕하지 않기로 선언한 것이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가.
스마트도서관을 나오면서, 치매 앞에 논리는 맥을 못 추고 이나 갈고 있었다니.
그래도, <어셔가의 몰락>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것에 대해 쓸 생각으로 챕터를 넘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