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하다는 건

꽃뱀은 화사하지 않다

by 채송화

올봄, 삼월인데도 날이 따뜻했다. 뱀이 벌써 나왔다.
앞서 걷던 남자가 호객을 하듯 초면인 우리한테 어서 오라 손짓했다. 남자는 뱀이 도망가기 전 빨리 보여 주고 싶다는 듯 재촉했다. 우리가 다가가자 남자는 저기 봐요, 저기 있어요. 큰 뽕나무와 고욤나무가 있는 덤불숲을 가리켰다. 붉은 줄이 선명한 ‘유혈목이’, 일명 ‘꽃뱀’이었다.

남자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옆에 있던 남편도 괜히 따라 사진을 찍는다.

남자는 남편의 최신형 스마트폰을 힐끗 보더니, “어디 봐봐요.” 하며 뱀사진을 본다.


“헉!”

남자가 스마트폰을 홱 밀어냈다.

고화소 스마트폰이 포착한 뱀의 붉은 무늬. 실물보다 더 선명하게 확대한 이미지에 질겁한 것이다.

'꽃뱀'은 '화사'하지 않았다.

적나라하다는 건 그런 것이다.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것. 아이즈 와이드 샷.


가장 보기 싫은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배설물, 즉 똥이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박해미가 볼일을 봤는데 변기가 막혔다. 급한 일이 있어 그냥 외출한다. 나문희가 발견한다.
며느리를 망신 주고 싶던 나문희는 이민용을 불러 변기를 보게 한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
형수와 시동생이 소동 끝에 SD카드를 버렸지만, 누군가 그것을 주워서 결국 봐버린다.
그것도 하필 식사 시간에. 경악과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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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켰을 때, 갑자기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이 물이 없어 죽어 간다는 후원 광고가 나온다.
그럴 때 회피하며 채널을 돌린다. 마음이 불편해서다. 마음이 불편하면 피하고 싶어진다.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구조.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보기 싫으면 외면하고, 외면하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면 욕하게 된다.
가난은 그런 수순으로 욕먹는다.


아름다워 보이는 보름달도 확대해 보면 분화구는 징그럽다.
그런데 아무리 확대해도 징그럽지 않은 게 있다. 꽃이다. 목련꽃 안, 나팔꽃 속. 그 깊고 아늑한 세계.

나는 여름이면 나팔꽃을 찾아 나선다. 나팔꽃을 눈에 바짝 갖다 대고 들여다본다. 하늘색이든 보라색이든 분홍색이든, 그 안은 부드럽고 은은한 빛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 들어가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지공주는 참 좋겠다 싶다. 아주 가까이서,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

형광빛 도는 나팔꽃 속은 아무리 확대해도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들여다볼 때 혐오하고, 어떤 존재를 확대할 때 환대할까?

나는 적나라함의 한 복판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존재가 사라지는 현장을 날마다 목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은 모두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돌보는 걸까.


내가 이십 대에 본 그 적나라한 장면. 젊은 새댁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편의 성기를 정성껏 닦아 주고 있는 그 모습. 아내는 남편이 하나도 징그럽지 않았을 것이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기 싫은' 모습일지라도, 가족에게는 '사랑하기에 기꺼이' 한 발 더 다가선다.


치매 카페 게시판을 처음 봤을 때, 나도 고개를 돌렸었다. 너무나 적나라한 그 현장.

생지옥 아비규환의 세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세계였다.

목련꽃 속으로 들어가 앉은 듯 따뜻하고 아늑한 치매 돌봄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 적나라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숭고함과 존엄이 있었다.

치매를 돌보는 모든 가족들은 어쩌면 꽃 속 깊숙이 들어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적나라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들의 병적인 모습 너머에 여전히 소중한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족의 고통은 아무리 적나라 해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기꺼이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이다.

40년을 함께 한 부부. 치매 아내는 남편이 낯선 남자라며 무서워한다. 남편은 아직 아내와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를 위해 '낯선 남자'가 없는 요양원으로 아내를 보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해야 한다.

그곳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내는 존중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별의 아름다움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