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었다

열 번 권하면 열 숟가락

by 채송화

춤에 몰입했다. 그 순간만큼은 남편의 치매 생각이 하나도 안 났다. 한 시간 동안 오직 뛰기만 했다.

그리고 40분을 걸어서 집에 왔다. 나눠준 포카리스웨트 한 병을 오면서 다 마셨다.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오직 연극이 좋아서, 대학로에 걸어서 갔다던, 본 적 없는. 듣기만 했던 그 사람.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도 이 맛에 그랬던 것일까. 오직 몰입.


3년 만의 외출. 셔플 댄스 첫 시간. 나는 맨 앞줄에 서 봤다. 선생님 발만 보느라 거울의 내 모습이 어땠는지 모른다. 몸치. 몸치. 몸치. 선생님은 나한테 자기를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선생님은 나와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음이 터져서 멈추지 않았다. 숨 고르려 구석까지 갔다 왔다.

선생님이 중간중간 못 하는 예시를 들 때마다 나는 다 해당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러면서 거울 앞에까지 온다"며,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어느새 거울 앞까지 가 있었다.


셔플은 '런닝맨'만 배우면 다 배운 거라고 했다. 오른 무릎을 굽혔다가 앞으로 뻗으며, 동시에 왼다리는 뒤로 뻗는다. 이 동작을 리듬을 타며 오른발 왼발 동시에 앞으로 내딛고 뒤로 뻗어야 한다. 그리고 또 동시에 뒤로 뻗친 왼 다리를 끌고 제자리로 와야 한단다. 그런데 나처럼 뒷다리를 "그렇게 넓게 뻗었다가 언제 끌고 오냐"며 선생님이 주의를 줬다. 그 말에 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잘 웃는 여자였다.


여름 내내 셔플 음악만 들었다. 일종의 예습이었던 걸까. 음악을 듣다 보니 셔플 댄스를 춰야겠다고 생각했었는지, 셔플 댄스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악을 들었던 건지. 뭐가 먼저였을까. 음악이 먼저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음악담당이었다. 비록 춤은 못 춰도 어울리는 선곡의 명수였다.

언니가 즐기는 문화생활을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들었다. 그래서 또래보다 아는 노래가 많았다.

영화며 책이며 음악이며 모두 언니 덕분이다. 언니는 문화생활에 과감했다. 어느 날 '세계파퓰러뮤직대전집'과, '팝송전집'등을 한꺼번에 사 왔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내 여름 계획은 그 음악을 모두 듣는 것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그 영화를 사진으로 봤다. 나는 <에덴의 동쪽>이 좋았다. 언니가 노래를 가르쳐 줬었다. 언니와 노래를 부르며 과수원을 한 바퀴 돌던, 어스름 여름 저녁이 좋았다. 지금도 언니와 여름저녁 이 습지 동네를 돌 수 있다니, 우리는 잘 살고 있구나 싶다.


언니와 나는 음악이 좋으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언니의 벨소리는 지금도 '나타샤왈츠'다. 남편이 치매 오기 전에 저장해 준 것이다. 우리 자매가 원하는 음악을 참 많이도 다운로드하고 저장하고 그래줬던 남편이었다. 지금은 유튜브로 들을 수 있으니 테이프가 늘어지고 레코드판이 튀고 그런 일은 없다.

언니가 오드리 헵번 사진을 모을 때, 나는 조루주 무스타키, 세르주 갱스브루, 데미스 루소스. 이 비슷한 세 사람의 노래에 빠졌었다. 역시 음악은, '기억 속의 멜로디'가 맞는구나 싶다. 그 시절로 데려다준다.


음악을 등에 업어서 그런지, 몸치임에도 몸은 자신을 갖는 것 같다.

단체 카톡에 동영상이 올라왔지만, 따라 하지는 못했다.

대신, 내가 배운 범위 안에서 남편을 가르쳐 줬다.

남편과 발동작을 했다. 음악 따로 동작 따로였지만 우리 둘 다 웃어댔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

그렇게 우리는 웃었다. 셔플이 우리를 웃게 했다.


시작이 반이다. 열 번 권하면 열 숟가락이라고 엄마가 그랬다.

내 몸에 열 번 권해본다.

나도 이제 '셔플러'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