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개인의 언어 & 사회의 언어

by 서정환

어제 친구들이랑 밥 먹으면서 한 친구가 "요즘 진짜 힘들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나도 완전 공감, 진짜 개빡치더라"고 맞장구쳤다. 그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이 다 똑같다는 거였다.


"진짜", "완전", "개빡치다"... 이런 말들을 우리는 마치 내 말인 것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만든 표현일까? 언제부터 이런 말들을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냥 주변에서 듣다가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언제 내 언어로 말해본 적이 있나 싶다. 슬플 때는 "슬프다", 기쁠 때는 "좋다", 화날 때는 "짜증 난다". 항상 정해진 단어들만 쓴다. 마치 한정된 감각의 사전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개인의 언어로 말하고 정치인은 사회의 언어로 말한다


며칠 전에 윤동주 시집을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표현이 신기했다. 나라면 "부끄러운 일 없이"라고 썼을 텐데.


시인들은 정말 다르다. 같은 감정이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비가 오는 걸 그냥 "비가 온다"라고 하지 않고, "하늘이 울고 있다"거나 "구름이 눈물을 흘린다"라고 한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반대로 뉴스를 보면 모든 정치인들이 똑같은 말을 한다. "국민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누가 말하든 비슷하다. 개성이 없다. 아니,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걸까?


그런데 나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시인처럼 내만의 언어가 있나? 아니면 정치인처럼 정해진 말만 하고 있나?


솔직히 말하면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쓰는 표현들 대부분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들이다. 드라마에서, 유튜브에서, 친구들에게서. 내가 창조한 말은 거의 없다.


우리는 모두 남의 언어를 빌려 쓰고 있다


요즘 젊은 애들 말을 들어보면 더 심하다. "ㅇㅈ", "ㄹㅇ", "개추"... 이런 줄임말들로만 대화한다. 심지어 말할 때도 "오져스", "갓띵작" 이런 인터넷 용어를 그대로 쓴다.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언어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는 거다. 개성이 없다.


카카오톡 대화를 보면 더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비슷한 이모티콘을 쓰고, 비슷한 표현을 쓴다. "ㅋㅋㅋㅋ", "ㅠㅠ", "대박"... 천편일률적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게 내 언어라고 생각한다. 내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가끔 옛날 일기를 읽어보면 웃긴다. 중학생 때 쓴 일기인데, 문체가 그때 읽던 소설과 똑같다. 무의식적으로 따라한 거다. 그때도 내 언어가 아니었던 셈이다.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본 적이 있나


친구 중에 특이하게 말하는 애가 있다. 예를 들어 뭔가 신기할 때 "오마이갓" 대신 "어머나세상에"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계속 들으니까 그 친구만의 매력이 되었다.


다른 친구는 자기만의 비유를 자주 쓴다. "기분이 솜사탕처럼 푹신해"라거나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지만 투명해"라고 한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 친구의 감정이 더 생생하게 전해진다.


나는 어떨까? 내만의 표현이 있나? 곰곰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그냥 모든 사람이 쓰는 말들만 쓰고 있는 것 같다.


어릴 때는 달랐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 "하늘이 화났나 봐, 얼굴이 빨갛네"라고 노을을 표현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우리 아들 시인이네"라고 웃으셨던 게 기억난다.


언제부터 그런 표현들을 잃어버렸을까? 언제부터 안전한 말들만 쓰게 되었을까? 아마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일 것이다. 튀는 게 싫어서.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내 언어가 사라졌다. 내 목소리가 사라졌다. 모든 사람과 똑같은 말을 하게 되었다.


언어는 생각을 만든다


무서운 건 언어가 생각까지 획일화시킨다는 거다. 같은 말을 쓰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개빡친다"라는 말에 익숙해지면 화를 표현하는 방식도 단순해진다.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억울한 화, 실망스러운 화, 서운한 화, 분한 화... 하지만 우리는 모든 걸 "빡친다"로 퉁친다.


시인들이 다양한 표현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들은 언어를 통해 더 섬세하게 느끼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내만의 언어를 만들어보는 거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비유를 생각해 내거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시도해 보거나.


물론 어색할 거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야 내 언어가 생기는 거 아닐까?


오늘부터 하나씩 시도해보고 싶다. 작은 것부터. "좋다" 대신 다른 표현을 써보거나, 내만의 비유를 만들어보거나.


누가 웃든 말든, 이상하게 보든 말든. 내 언어를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