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필로그 - 거짓말 수집가가 된 이유

by 서정환

스물일곱 살 겨울,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까지 복수전공한 나에게 어른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돈이 안 되지만, 문학까지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요즘 콘텐츠 시대잖아,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해." "창작자는 굶어죽지 않아, 어떻게든 길이 있어."


하지만 졸업 후 받은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화랑에서는 "신인 작가는 일단 무료 전시부터 해봐"라고 했고, 출판사에서는 "요즘 소설로는 먹고살기 힘들어"라며 원고를 돌려보냈다. 4년간 그린 수백 장의 그림들은 작업실 구석에 쌓여갔고, 밤새워 쓴 소설들은 파일 폴더 속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아, 나는 속았구나.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림 잘 그리네, 나중에 화가 되겠구나"던 미술선생님, "글쓰기 재능이 있어, 작가가 되면 좋겠다"던 국어선생님, "예술가는 배고프지만 의미 있는 일이야"라던 교수님들의 격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진짜 성공이야"라던 부모님의 응원까지.


그 모든 말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습관적으로 세상의 말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은 따라온다"는 말을 믿고 작업에만 몰두했다가, 3개월 만에 통장 잔고가 바닥나면서 결국 학원 강사 알바를 전전했던 경험. "진정성 있는 작품을 하면 사람들이 알아봐 준다"는 말을 믿고 개인전을 열었지만, 정작 관객은 가족과 친구들뿐이었던 기억. "창작자는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을 되뇌며 버텼지만, 매달 월세를 걱정하며 라면만 먹던 날들의 씁쓸함.


20대 후반이 되면서 이런 경험들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되었다. 공모전에서 입상해도 상금은 택시비 정도였고, 원고료를 받아도 한 달 생활비에도 못 미쳤다. "예술가는 부업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여러 일을 시도해봤지만, 정작 창작할 시간과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미술과 문학, 두 영역을 모두 경험하면서 깨달은 건 둘 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화가로서는 작품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고, 소설가로서는 문학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진짜 예술가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과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 사이에서 매일 갈등했다.


하나씩 쌓여가는 실망 속에서, 나는 어느새 거짓말 수집가가 되어 있었다. 예술가의 꿈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부터, 창작자의 삶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까지. 노트에 적기 시작한 것들이 어느새 1000개를 넘어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거짓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나는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진짜다"라는 말 대신 "먹고살면서 예술하는 것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고, "순수예술만이 가치 있다"는 말 대신 "상업적인 작업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화가와 소설가라는 거창한 타이틀 대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라는 소박한 정체성으로 돌아왔다.



가장 큰 변화는 창작에 대한 태도였다. 예전에는 "작품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단순한 동기로 돌아갔다. 전시회 관람객 수나 원고료 액수보다는, 오늘 하루 얼마나 만족스럽게 작업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던 순간들, 좋아하는 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세상이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들, "왜 아무도 이런 현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라고 원망했던 밤들 말이다. 나만 바보같이 예술가의 삶을 너무 로맨틱하게 봤나 싶어서 스스로가 한심해졌던 경험들 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화가와 소설가를 꿈꾸며 모은 거짓말들을 당신과 나누면서, 우리가 함께 진짜 우리만의 답을 찾아가길 바라면서.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길,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길, 그리고 무엇보다 "꿈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재정의하는 것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주길 바라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한 거짓말들을 함께 정리해보자.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정말 중요한 진짜 이야기를 찾아보자.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