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지우고 쓰고 올리고 또 쓰고
|하나
서핑과 쇼핑
발리 입국심사 경험담으로 꽤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 발리에 왜 왔어?
- 서핑하러 왔어.
영어 발음 때문에 입국심사원은 ‘서핑’을 ‘쇼핑’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이 둘은 묘하게 통해서 그대로 대화가 이어졌다고 한다.
- 발리에 쇼핑하러 왔다고? 쇼핑을 두 달이나 하니? 너 돈 많아?
- 나 돈 없어.
- 돈 없이 어떻게 쇼핑을 한다고 그래?
- 돈 없이도 서핑할 수 있어.
수상하다고 여긴 입국심사원은 여러 가지를 캐물었다고 했다. 어디서 지낼 건지. 누구와 함께 왔는지. 미스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한 귀여운 일화.
|둘
내가 발리에 온 이유
나는 발리에 뭐 하러 온 걸까 생각해 봤다.
3년 전 캠프에 두고 온 데우스 서프보드를 찾으러 온 건 맞지만 서핑을 하러 온 건 아니다. 출발 전부터 발리에서 하고 싶었던 걸 굳이 꼽자면 다시 한번 짱구지역에서 지내면서 매일 바이크를 타고 다양한 채식요리를 먹으러 다니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갖고 싶었다. 일을 쉬면서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은 많은 편이었지만 나에게는 돌봐야 할 강아지가 있었다. 본가에서 살면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건 어려웠다.
해야 할 일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나만의 시간이 보장될 거 같았다. 질릴 정도로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면 결국 답을 찾아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좋은 아이디어가 마법처럼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셋
발리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들
해외에서의 생활은 매일 새로운 자극을 준다. 여행으로만 겪을 수 있는 경험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생각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오늘은 ‘밀크 앤 마두’라는 브런치 카페에 왔는데, 3년 전에 왔을 따보다 어린이를 동반한 손님들이 훨씬 많아졌다. 코로나 기간 동안 카페 옆에 놀이터 공간을 만들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키즈카페에서 엄마들끼리 만날 장소가 필요한 것처럼 여기 발리에서도 내니(보모)를 동반한 외국인 가족이 많았다. 현지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다.
부모의 외모를 꼭 닮은 외국인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주 긴 이어달리기처럼 느껴졌다.
못다 한 일이 있을지라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누군가는 바톤을 이어받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풀어 갈 것이다. 별 쓸모없는 생각이지만 의식하고 보고 있으면 신선한 기분이 든다.
나라는 존재는 언젠가는 없어지는데 나의 일부 조각들이 세상에 남아 세대를 걸쳐 존재하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맞다. 별 쓸모없는 생각이다.
|넷
하루키처럼 글을 잘 쓰고 싶어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서핑을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열 배는 강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29살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신인상을 받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 당시 운영하고 있던 재즈 카페도 문을 닫을 정도로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고 한다.
나도 불현듯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럴듯한 걸 쓸 수 있을 것처럼. 자꾸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실 더 기발한 소재는 20대 후반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루키가 29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29살은 아직 20대의 생활과 생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취향이나 관점을 의식하는 일에 꽤 익숙해지는 나이이다.
막 발굴해 낸 광산처럼 채취할 순금 같은 아이디어가 많고 아이디어를 가공하는 노련함도 준비되는 29살. 그리고 30대 초반이 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하기 시작한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모를 일이지만 더 멋진 것이 쓰고 싶다. 하루키처럼 달리면서 근력을 키우는 것도 좋고, 위스키도 좋아하고, 하와이에서 사는 것도 너무 좋을 거 같다.
나는 발리에 있다. 발리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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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온 지 30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