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결혼을 유지하게 할까. 왜 많은 부부는 다투고 싸우면서도 결혼을 이어 가는가. 만약 결혼과 이혼의 절차를 충분히 쉽게 만들어 둔다면, 고통스러운 결혼을 굳이 지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결혼을 오직 실용성의 관점에서만 판단한다면, 이러한 선택은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보인다.
결혼의 실용적인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가족 제도의 유지, 사회적 안정, 성적 욕구의 해소, 자녀 양육, 가사와 생계의 역할 분담 등이 그것이다. 만일 지금의 배우자와 이러한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다면, 더 적합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허용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기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혼은 언제든 더 효율적인 조합으로 교체 가능한 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결혼을 기능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결혼은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진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며, 동시에 성격과 능력, 가정환경과 같은 현실적 조건도 함께 고려한다. 이러한 판단은 삶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실제 결혼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혼은 완성된 조건을 가진 사람과 하는 선택이 아니라, 그 조건들이 성숙해 갈 가능성을 가진 사람과의 선택에 가깝다. 사실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누구나 불완전하며, 결혼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대부분 그 조건들이 충분히 성숙되기 이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에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선택에 더 가깝다.
문제는 바로 그 이후에 찾아온다. 결혼 생활 속에서 배우자의 모습이 나의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기대했던 능력이 드러나지 않을 때, 나와 다른 성격과 취향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때, 왜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가. 결혼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약점과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할 때에도, 왜 결혼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결혼은 또한 둘만의 관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결혼은 부모와 친지, 친구들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지속되며, 무엇보다 앞으로 태어날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확장된다.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아이들의 삶에 미칠 영향,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 경제적 부담, 그리고 배우자와 자신에게 남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복합적인 책임을 인식한 인류는, 결혼식이라는 공개된 자리에서 결혼 서약이라는 관습을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하객들 앞에서 이렇게 서약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평생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서약은 사랑의 감정만으로도, 현실적 조건만으로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다.
몇 해 전 딸아이의 결혼식에서 아버지로서 축사를 하게 되었다.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부모로서 30여 년 동안 결혼 서약을 지키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목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나온 결혼 생활이 결코 감정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었음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특히 기독교인의 결혼에서 이 서약은 사람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신 앞에서 이루어진다. 결혼은 사랑과 현실적 조건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신과 사람 앞에서 맺은 공적인 약속이기도 하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이해할 때, 결혼은 필연적으로 소멸의 위기에 놓인다. 감정은 변하지만, 결혼은 변하지 않기로 선택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보다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결혼은 사랑의 결과만이 아니다. 만약 결혼을 사랑의 결과로만 이해한다면, 사랑의 감정이 유지될 때에만 결혼은 의미를 갖게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결혼은 성적 결합이나 개인적 선택의 계약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 앞에서 맺어진 영적인 약속이며, 감정을 넘어서는 의지와 책임의 구조이다.
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이 사라졌을 때에도 상대의 선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람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 인격, 곧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함께 작동하는 관계이다. 상대의 조건을 이성적으로 고려하고, 사랑의 감정이 출발점이 되며, 어려움 속에서도 결혼을 지켜 내겠다는 의지가 작동할 때 결혼은 유지된다. 결혼은 감정의 연속이 아니라, 이성·감정·의지가 만나는 자리에서 지속되고 열매 맺는 사회적 관계이다.
사랑의 감정은 결혼의 출발점일 수는 있지만 토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결혼은 감정이 사라진 이후에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렇기에 결혼은 낭만의 연장이 아니라, 다양한 현실적 여건 속에서 사랑을 보호하고 지켜 내는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혼에 대한 Lewis의 입장은 논쟁적이다. 그는 사랑의 감정이 식었다거나 만족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결혼이 신 앞에서 맺어진 언약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법적 계약보다 훨씬 무거운 도덕적 책임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혼을 쉽게 허용하는 사회가 결국 결혼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가장 약한 존재들—특히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Lewis는 교회가 이혼을 교리적 죄목으로 규정하여 강제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교회의 사명은 기독교적 결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지, 법을 만들거나 법정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다. 기독교는 결혼 윤리에 대해 엄격하게 말할 수는 있으나,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결국 기독교의 결혼 윤리는 사랑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약속의 구조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가 결혼을 감정의 지속 여부에 맡길수록, 사람은 더 자주 상처받고 더 깊이 고립된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결혼을 낭만의 연장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을 통해 성숙해지는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결혼은 사랑이 계속 느껴지기 때문에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약속이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게 만드는 도덕적 형태이며, 그 엄격함 속에서 오히려 사람과 공동체를 보호하는 질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