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내 팔자야.”
“운명에 맡겨야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정말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걸까?
아니면 개척할 수 있는 걸까?
운명(運命)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설명하는 말이다. 죽음, 행복과 불행, 만남과 이별 같은 경험을 초자연적 힘과 연결해 해석한다.
우리말에는 숙명(宿命), 천명(天命), 팔자, 운수(運數) 같은 표현이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이른바 ‘운명 교향곡’은 알 수 없는 힘이 다가오는 느낌을 음악으로 들려준다.
조선의 운명(fate)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의 어두운 동기처럼, 나라의 슬픈 종말이 다가오는 기운이 짙게 드리웠다. 적들이 다가오자 많은 관리와 유학자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어두운 운명을 직감하고 앞다투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들에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늘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주어진 길을 따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을 새로 내며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가 다시 쓰인다.
이순신은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성벽을 다시 세우고, 초소를 돌며 군기를 다잡았다. 무기를 보충하고 전선을 수리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책임을 다한 자에게는 상을 내렸고, 소임을 저버린 자에게는 죄를 물었다. 모두가 운명에 굴복할 때, 그는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이 조선의 destiny, 곧 뜻한 곳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이순신은 무장이면서 동시에 문인이었다.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난중일기에 사유와 감정을 기록했다. 그 일기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아, 한 장수의 깊은 내면을 보여 준다. 그는 거기서 “백성이 병들고 굶주리니 차마 볼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의 칼은 적을 향한 무기의 날이었지만, 그 근원은 백성을 향한 측은지심에 닿아 있었다. 이순신의 길은 무인의 길에 그치지 않고, 문과 무를 겸비하여 백성과 나라를 위한 길이었다.
영어에서 fate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불가피한 조건을 뜻한다. 대체로 부정적이다. 경제 전망이 어두울 때 쓰는 gloom and doom도 어두운 운명을 말한다.
반대로 destiny는 ‘뜻한 곳’, ‘정해진 목적지’를 가리킨다. Destination(목적지)와 같은 뿌리다. Destiny는 신의 뜻이나 더 높은 목적에 따른 예정된 자리, 그리고 사명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이 이름으로도 흔히 쓰인다.
이순신 장군은 말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운명은 피해야 할 저주가 아니다. 내가 붙잡고 개척해야 할 기회다.
물론 인간에게 바꿀 수 없는 숙명이 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한계다. 그러나 가난이나 실패, 심지어 장애까지 모두 팔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체념하면 자기 효능감(self-efficacy), 곧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는다. 자기 효능감은 건강, 교육, 직업, 결혼 등 삶의 중요한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자신감을 잃으면 능력보다 훨씬 낮은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운명을 스스로 좁혀 버린다.
만남과 이별,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을 모두 운명 탓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하다. 삶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 개척이어야 한다.
운명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야 하는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물음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운명을 개척할 것인가?
당신의 뜻한 곳(destiny)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