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에토스

사람은 먼저 말하는 사람을 판단한다

by 남상석

설득은 사람의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질서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설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많은 사람들은 설득이 설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제시하고 논리를 전개하면 상대의 판단이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같은 설명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쉽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거부된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진다.

이 사실은 설득이 단지 설명의 내용이나 전달의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사람은 언제나 말의 내용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먼저 말하는 사람을 판단한다. 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이 사람의 의도를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의 판단이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판단이 먼저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판단 위에서 설명이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된다. 설득은 언제나 설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설득은 신뢰에서 시작된다.

직장에서 새로운 방식이 제안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같은 제안이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 평소에 신뢰를 받는 사람이 제안하면 사람들은 그 설명을 차분히 듣고 검토하려 한다. 그러나 신뢰를 잃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설명의 내용보다 먼저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 결과 같은 설명이라도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처음부터 거부되기도 한다. 이 판단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신뢰다.

그러나 설득이 언제나 같은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먼저 제시된 뒤 그 설명을 통해 신뢰가 형성되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신뢰가 먼저 형성되어 설명을 들을 준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설득은 하나의 고정된 순서를 따르기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많은 경우 신뢰는 설명을 들을 준비를 만든다. 사람은 모든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한 뒤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말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그 판단 위에서 설명을 들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때 신뢰는 이유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의 통로를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에서 쉽게 확인된다. 의사의 진료, 변호사의 조언, 기술자의 설명처럼 일반 사람이 모든 내용을 직접 검증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신뢰의 역할이 커진다. 사람들은 그 분야의 지식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먼저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고, 그 판단 위에서 설명을 들을 준비를 한다.

신뢰는 또한 평판과 추천이 중요한 시장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상품과 정보 앞에서 모든 것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평점, 후기, 베스트셀러 목록, 전문가 추천, 브랜드의 평판 같은 신호를 활용한다. 이때 사람들은 각 상품의 세부 정보를 완전히 분석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를 판단한다. 이러한 경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때 신뢰는 긴 설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시간을 줄이는 장치가 된다. 사람은 제한된 시간과 지식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검토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그럴 여유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뢰를 통해 판단을 단순화한다. 신뢰는 판단의 부담을 줄이고 선택을 빠르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신뢰는 판단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여 주는 사회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시간의 압박이 크거나 문제 자체가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는 신뢰가 곧바로 판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긴급한 의료 결정, 빠른 업무 판단, 복잡한 투자 결정과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이유를 충분히 검토하기 어렵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나 기관의 판단에 더 크게 의존한다.

이러한 여러 경우를 종합해 보면, 설득은 언제나 설명 → 판단이라는 한 가지 경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설득은 신뢰 → 설명 → 판단이라는 경로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신뢰 → 빠른 판단이라는 경로를 통해 설득에 가까운 결과가 먼저 나타나기도 한다.

이 점은 힘이 직접 작동하는 질서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보일 수 있다. 명령이 관계를 유지하는 중심 방식일 때 사람들은 반드시 상대를 신뢰하지 않아도 된다. 지시를 따르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과 동의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설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힘이 직접 작동하는 질서가 약해질수록, 관계를 움직이는 신뢰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사람의 사회는 힘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힘이 스스로를 설명해야만 작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고대 수사학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것이 바로 “에토스(Ethos)”다. 에토스는 논리나 감정의 호소 이전에 형성되는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킨다. 사람은 설명의 내용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그 설명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 설득의 방향을 크게 좌우한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의 판단은 신뢰만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이제 설득을 이루는 또 다른 요소들을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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