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과 황제헌원, 패수의 진실

by 역맥파인더

軒轅之時 神農氏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而蚩尤最為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軒轅乃修德振兵 治五氣 藝五種 撫萬民 度四方 教熊羆貔貅貙虎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헌원(軒轅) 시대에는 신농씨(神農氏)의 후대가 쇠퇴해져 제후들이 서로 침략 정벌하고 귀족들에게 포악하게 굴었으나 신농씨가 정벌할 수 없었다. 이에 헌원은 군사를 훈련시켜서 조공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하니 모두 신하로 복종했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학하여 토벌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 신농씨가 제후들을 치려고 하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귀의했다. 헌원은 덕을 닦고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오행(五行)의 기운을 다스리고 다섯 가지 곡식을 심는 등 만민을 어루만지고 사방의 토지를 측량했으며, 곰, 비휴, 이리, 호랑이 등 맹수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염제(炎帝)와 싸웠다. 세 번의 전투 끝에 그의 뜻을 이루었다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為天子 代神農氏 是為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황제이다. 천하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황제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였고 평정한 곳은 떠나며 산을 개간하여 길을 개통하느라 편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 사기(史記) 본기(本紀) 권 1. 오제본기(五帝本紀) 황제(黃帝) 중에서

근역의 차들을 마한의 직산에 집결한 후 황해도 풍천과 요동반도의 개주, 홍산문화로 유명한 우하량과 시린골을 거쳐 평양인 다링가로 연결되는 고대 육상 차무역로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이끄는 삼천명의 천강(天降) 집단에 지도되어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을 건국한 이후 생겨난 단어가 우리[urij였다. 시옹[xiong]이 축약되어 시[xi] [si]라고 불리던 웅족(熊族)이 세월이 흘러 리[li], 이[yi], 지[ji][chi]로 음운변화(音韻變化)가 일어나고 호족(虎族)을 부르던 후[hu] 또한 주[ju], 수[su], 부 [bu], 루[lu] 등으로 음운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런 변화 가운데서도 지켜진 일정한 원칙은 곰부족은 발음이 이 [i]로 끝나고 호랑이 부족은 우[u]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나라라는 말은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이 한데 어울려 살던 강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중국과 조선으로 분리된 사건이 탁록지전으로 불리는 치우환웅과 황제의 십 년 전쟁이었다. 탁록지전(涿鹿之戰)을 영어로는 Battle of Zhuolu라고 쓰는데 그 이유는 루[lu]라고 불린 호족(虎族)과 시옹[xiong]에서 변화된 주오[zhuo]로 불린 웅족(熊族) 사이의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탁록(涿鹿)이 위치한 지역은 지금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위아래로 합쳐져 띠모양으로 한반도와 중국 동해 연안을 연결하고 있던 때에 근역(槿域)의 차(茶)를 받아 초원로로 보내는 동서 대륙 차(茶) 무역로에서 가장 흥성했던 지역이었다. 띠(帶) 모양의 사각형(方) 땅이었기에 대방(帶方)이라 불린 이 지역과 근역(槿域:한반도의 남서부)과 가까이 위치해 차(茶)를 쉽게 수입할 수 있었던 지금의 중국 동해안 지역은 그래서 처음부터 환웅의 아버지 환인(桓因)에게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수(傳授)한 황궁씨(黃穹氏)의 장자(長子), 유인씨(有因氏)의 후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유인씨의 유(有) 자는 루[lu]라고 발음되는 월(月) 자를 부수로 가진 글자인데 이것은 유인씨(有因氏)가 호족(虎族)이 주도하는 부족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발해가 바다가 아닌 육지였던 시절, 근역의 차를 집산한 마한의 직산에서 다르칸(Darkhan)까지 이어진 차무역로. 요하문명(구 홍산문화)이 발생한 연유였다.


호족(虎族)의 후예인 유호씨(有扈氏)는 근역(槿域)과 가까운 지금의 중국 동해 연안 지역을 따라 퍼져 있던 다른 유인씨(有因氏) 후손들과 달리 멀리 태행산맥(太行山脈) 서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유호씨(有扈氏)가 다른 유인씨(有因氏)의 후손들과 달리 근역(지금의 한반도 남부)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의 중국 서부지역에 몰려 살게 된 것은 연산 산맥 이남 지역으로 들어오는 근역(槿域)의 차(茶)를 대륙의 서쪽으로 무역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근역(槿域)의 차(茶)가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어 초원로로 보내지는 위택관(葦澤關), 도마관(倒馬關), 자형관(紫荆關)등의 관문(關門)들이 있는 석가장(石家庄)부터 보정(保定), 이현(易縣)까지의 지역에는 전통적으로 웅족(熊族)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어 그들이 대방을 통해 들어오는 근역의 차를 무역했다면 황하의 서쪽에서 흘러 합류하는 위수(渭水) 유역의 지금의 보계(寶鷄)와 서안(西安)이 있는 섬서성(陝西省) 지역과 같은 위도(緯度)의 태행산맥 서부지역은 호족(虎族)의 후예인 유호씨(有扈氏)의 영역이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근역(槿域)에서 만든 차(茶)를 대륙의 서쪽으로 무역하면서 황하 이북 지역에 확립되었던 호족(虎族)과 웅족(熊族) 두 부족사이의 역학 관계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건 지금의 장가구(張家口)를 통한 초원로(草原路) 접근로가 새로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심각해져 가는 기후 변화 때문에 해가 다르게 커진 바다가 지금의 한반도 평양에서 지금의 우하량(牛河梁)을 연결하는 육상 무역로를 바다로 만들어 끊어버렸고 바다를 피해 우회(迂廻) 해야 하는 무역로가 강요하는 추가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넓어져 가는 만큼 우하량으로 연결된 육상 무역로는 그 기능을 잃어갔고 대방(帶方)을 통해 무역되는 근역(槿域:한반도의 남서부)의 차(茶)는 늘어만 갔다. 그에 따라 대방(帶方)을 거쳐 북경을 통해 장가구(張家口)로 보내지는 차(茶) 교역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새로이 경제적으로 각광받게 된 지역은 지배족인 호족(虎族)의 주도권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낙랑(樂浪)이라 불렸다.

고대 마한의 차무역로 변천 과정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 불리는 우하량(牛河梁)과 조양(朝陽) 쪽에 집중되었던 마한(馬韓)의 차(茶) 무역이 바다가 점점 커져가는 기후변화 때문에 대방(帶方)과 북경축으로 이동한 것이 정세 불안의 원인이었다. 커져만 가는 발해(渤海) 때문에 새로이 각광받게 된 대방- 요성(遼城 Liao : 지금의 연성聯城 Liaocheng)- 낙랑(樂浪)의 북경- 장가구(張家口)를 잇는 차(茶) 무역로의 영유권을 놓고 벌어진 웅족(熊族)과 호족(虎族) 간의 경쟁이 결국 판천(阪泉) 전투를 거쳐 탁록전쟁(涿鹿之戰)으로 폭발해 버린 거였다. 당시 신시국(神市國)이라고도 불렸던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천왕은 치우(蚩尤)였고 그는 호족(虎族) 출신이었다. 치우의 치(蚩) 자는 사성음으로 웅족(熊族)을 가리키는 치 [chi]라고 발음되지만 글자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수(部首)가 뱀이 웅크린 모양을 상형한 벌레 훼(虫) 자여서 호족(虎族)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란생설화(卵生說話)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글자였다. 치우(蚩尤)에 앞서 황제헌원(黃帝軒轅)과 겨루어 패배한 염제신농(炎帝神農) 또한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을 한 형상이라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엔키(Enki)가 아닌 엔릴(Enlil) 신을 모시는 호족(虎族) 출신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당연히 새로이 각광받는 북경-장가구(張家口) 무역로의 관할을 호족(虎族)에게 귀속시키도록 했고 이런 조치는 처음부터 근역(槿域)의 차(茶)를 중개하면서 대방(帶方)과 지금의 중국 동해안 지역을 호족(虎族)과 함께 개발해 온 웅족(熊族)의 반발을 초래했다. 염제(炎帝)와 치우(蚩尤) 천왕의 조치에 반기를 든 웅족(熊族)의 지도자가 유웅씨(有熊氏)였던 헌원씨(軒轅氏)였다. 헌원씨(軒轅氏)가 이끄는 웅족군(熊族軍)은 판천(阪泉) 전투와 탁록(涿鹿) 전투에서 염제(炎帝)와 치우 군(蚩尤軍)에게 차례로 승리하고 북경- 장가구(張家口) 무역로의 영유권을 확보했고 헌원씨(軒轅氏)는 이 공으로 황제(皇帝)로 불리게 되었다. 유웅씨(有熊氏) 출신이었기에 곰 웅(熊) 자와 동자인 황(黃+ 能)이 그의 제호(帝號)가 되었고 이 글자는 후일 곰을 뜻하는 능(能) 자가 삭제되고 황(黃) 자만 남아 황제(皇帝)로만 기록되었다. 제왕(帝王)이라는 칭호(稱號) 또한 신시(神市)를 누르고 올라섰다 해서 즉 시(市) 위에 올라선(立) 왕(王)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오랜 전쟁 끝에 염제(炎帝)와 치우(蚩尤)에게 모두 승리한 황제(黃帝)가 이끄는 웅족(熊族)이 북경-장가구 무역로를 영유(領有)하게 되었고 이 전쟁은 중국을 지나(支那 China)라고 불리게 한 시작이 되었다. 차이나(支那)는 웅족(熊族)의 땅이란 뜻이었다. 지나(China)는 그리스로마식으로 Sinae라고도 기록되었다.

대륙의 동서 무역로로 개척되었던 초원로(草原路)와 천산로(天山路)로 근역(槿域)의 차(茶)를 보내는 곳이었기에 태행(太行)이라 이름 붙여진 남북으로 전개된 산맥(山脈)은 그래서 옛날부터 8개의 주요 횡단로(八陘)가 동서 교통로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그중 지금의 내몽골 시린골(Xilingol)과 직선으로 연결된 장가구(張家口)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북경지역은 대방(帶方)과 동해안 연안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호족(虎族)이 차지하고 지배하고 있던 곳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호족(虎族) 보다 열세였기에 대방지역에서 밀려난 웅족(熊族)이 터 잡고 살던 곳이었다. 결국 천안-평양-우하량-시린 골을 잇는 근역(槿域)과 마한(馬韓)의 차(茶) 무역로는 날로 커져가는 발해만(渤海灣)때문에 치우천왕 때에 이르러서는 대방-북경-장가구(張家口)-시린 골을 경유하는 무역로로 대체되고 있었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인해 초원로가 얼어붙자 대륙의 서쪽으로 차(茶)를 보내는 대체 무역로 개발까지 서둘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어 벌어진 판천전투와 탁록지전(涿鹿之戰, Battle of Zhuolu)의 승리로 웅족(熊族)은 태행산맥(太行山脈) 북서부 지역은 물론 태행산맥 북동부지역에서도 중요한 차(茶) 무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환국(桓國) 이래로 늘 호족(虎族)에게 지도권을 양보하며 협력자로 존재했던 웅족(熊族)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요한 차(茶) 무역로를 호족과의 전쟁 승리를 통해 독자적으로 영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는 향후 역사에 전쟁을 통한 질서 (秩序) 구축이라는 불행한 철칙(鐵則)이 관철(貫徹)되는 시작이 되었다. 전쟁에 패배한 호족이 남하하면서 근역의 차를 초원로로 보내기 위한 태행산맥 남부 지역의 횡단로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판천전투와 탁록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호족(虎族)은 패장 치우(蚩尤)와 함께 책임을 지고 낙랑(樂浪) 남쪽으로 내려갔고 상실한 낙랑(樂浪)의 차(茶) 무역로를 대신할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진력했다. 이때 낙랑지역과 대방지역을 가르기 위해 즉 웅족(熊族) 영역과 호족 영역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것이 패수(浿水 pei Shui)였다. 대방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경계선의 획정이었다. 배달(倍達=背達 beida)을 결정한 황궁씨의 후손인 호족(虎族)들이 그은 경계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경계선이 되는 강은 패수(浿水 pei shui)라 불렸다. 패수(浿水)는 조선(朝鮮)과 지나(支那 china)의 경계선이 아니라 호족(虎族)과 웅족의 차(茶) 무역로 관할 경계선이었다. 대방(帶方)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패수(浿水)와 연결되어 함께 호족과 웅족(熊族)의 차(茶) 무역로 관할 영역을 나눈 것은 호타하(滹沱河 Hutuo)였다. 결국 탁록전쟁을 통해 낙랑이라는 육상무역로의 중요한 교두보를 상실한 호족(虎族)들은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근역(槿域)의 차(茶)를 받아 회수(淮水 Huai he)와 장강(長江 Chang Jiang)을 거슬러 올라 한수(漢水 Han Shui)를 통해 지금의 중국 감숙성 천수(天水)로 보내는 해상무역로를 새로 건설했다. 이 해상무역로는 천수(天水)를 중간기지로 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을 거쳐 투르판(Turfan)에 이어짐으로써 후일 천산북로(天山北路)라는 초원로(草原路)를 대체한 새로운 육상 동서무역로를 만들어냈다. 초원로 외에 다른 무역로(貿易路)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륙에 천산북로라는 새로운 육상무역로가 탄생한 역사였다. 회수(淮水 Huai he)가 호랑이 발음과 동일한 후[hu] 이름을 가지게 된 연유였고 장강(長江 Chang Jiang)이 차(茶) 발음과 동일한 창[chang] 이름을 가진 연유였다. 해상무역로를 건설하면서 호족(虎族)인 치우천왕의 후예들은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지역마다 한(漢)과 천(天)이라는 호족(虎族)의 상징 같은 글자들을 넣어 이름을 지었다. 시루가 아닌 절구로, 육로가 아닌 해상으로 차(茶)를 가공해 무역을 하는 호족(虎族)의 특성을 한 글자에 압축한 것이 한(漢)이라는 글자였다. 결국 유웅씨(有熊氏)의 헌원(軒轅)이 이끈 웅족(熊族)과의 전쟁에 패배해 회수장강(淮水長江) 유역으로 남하, 청구국(靑丘國)을 세운 치우천왕의 후손들은 해상 무역로를 개척해 냈다.


乙卯二十年至是 藍國頗 與孤竹君 逐諸賊 南遷 至奄瀆忽居之 近於殷境. 使黎巴達 頒兵 進據邠岐 與其遺民 相結 立國稱黎 與西戎 雜處於殷家諸侯之間하사 藍氏威勢甚盛皇化 遠及恒山以南之地. 辛未三十六年 邊將申督 因兵作亂 帝暫避于寧古塔 民多從之. 癸未四十八年 帝崩 太子阿忽立. 재위 20년 을묘(기원전 1266)년에 이르러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孤竹國) 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쫓아 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 임금께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력을 나누어 빈(邠)·기(岐) 땅으로 진격하게 하고 그곳 유민과 서로 단합하여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을 여(黎)라 했다. 이들을 서쪽 융족(西戎)과 더불어 은나라의 제후국들 안에 뒤섞여 살게 했다. 남 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지고 임금의 덕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 - 단군세기 22세 단군 색불루 중에서

강(江)을 하(河)라고 또는 수(水)라고 구분해 사용하는 것은 인도 갠지즈(ganges)강에 이름을 붙일 때 부터 생겨난 전통이었다. 갠지즈란 이름도 강들이란 뜻이다. 강하라.


원양 항해가 불가능하던 시절, 치우천왕을 따라나선 웅족(熊族)까지 포함해 구려(九黎 [Jio li]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근역(槿域)에서 들어온 차(茶)들을 배에 실어 회수(淮水)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 한수(漢水)를 통해 대륙 서쪽으로 무역하는 새로운 길을 냈다. 회수(淮水)를 통해 서쪽으로 운반된 차(茶)들은 신양(信陽 Xinyang)을 통해 남양(南陽 Nanyang)으로 집산된 후 양양(襄陽 Xiangyang)으로 넘겨졌고 장강(長江)을 통해 거슬러 올라온 근역의 차(茶)들도 한구(漢口)에서 한수(漢水)로 운수(運水)를 바꾼 뒤 역시 양양(襄陽 Xiangyang)으로 집산되어 남양(南陽)에서 건너온 차(茶)들과 함께 한중(漢中)을 통해 천수(天水)로 보내졌다. 이러한 호족의 새로운 무역로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남양과 양양사이를 남북으로 흐르는 강에 패수란 이름이 붙여져 경계선이 되었다. 지금 그 강은 패수의 패자가 음운변화되어 백하(Baihe)로 불린다. 동서로 흐르는 회수와 한수를 이용해 중국 동해안에서 중국 서부지역인 한중까지 이뤄진 해상무역로는 육상 무역으로 전환되어 진령(秦嶺) 고도(古道)중 가장 먼저 개설된 기산도(祁山道)를 통해 천수(天水)로 연결되었고 지금의 하서회랑을 통해 투르판(Turpan)으로 이어졌다. 투르판에 도착한 근역(槿域)의 차(茶)들은 천산북로라 불리는 새로 건설된 무역로에 올려져 지중해까지 수출되었다. 치우천왕이 탁록전쟁에서 패한 후 남하해 장강회수 유역에 세운 나라가 청구국(靑丘國)이라 불리는 이유는 호족인 치우를 따라나선 웅족과의 연합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청구국의 청(靑)의 사성음은 칭[qing]이고 구(丘)의 사성음은 치오[qiu]다. 청구(靑丘)의 뜻은 치우를 따라나선 웅족(치)이 호족[qiu]과 함께 세운 나라란 뜻이었다. 치우천왕을 따라 남하한 웅족들의 후손인 구려(九黎)가 일궈낸 장강과 회수, 그리고 한수로 이어진 새로운 내륙 해상무역로는 번영했고 결국 호족 후예였던 조선의 색불루단군이 지금의 섬서성 보계 주위의 기(歧)와 빈(邠)을 합병해 나날이 번영해 가는 호족이 개척한 내륙 해상 무역로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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